- 논산시전통두레풍물보존회 윤종민 강사의 삶
시대의 소리꾼 장사익을 들으면 속까지 후련해진다. 사물놀이 김덕수를 만나면 소리의 블랙홀로 빨려들어간다. 화려한 무대 위의 유명국악인이나 인간문화재를 완상하노라면 외관부터 수려하다. 논산에는 이런 유명세도 덜하고 관공서에서 발행하는 “쯩”도 없지만 “끼·흥·신명”의 3박자 보지자가 있다. 광석면 어느 함석집에 기거하는 징한 생활 속의 예인, 올해 80세 장구선생 윤·종·만이 그분이다.
올해 2018년 10월 12~14일 제주도 성읍 민속마을에서 59회 한국민속예술축제 및 25회 전국청소년예술축제가 3일간 열린다. 여기에 충남 도대표 하나가 출전한다. 일반부 6건이 접수된 상황에서 논산의 논산두레소리가 도대표로 만장일치 선발되었다. 이로써 논산시전통두레풍물보존회(단장·주시준)는 8,100만원의 지원금을 받아 제주도에 가게 되었다. 요즘은 그 전국대회를 치루기 위해 한창 연습중이다.
이번 심사위원 3명은 학자쪽보다는 민속학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이 밝힌 심사기준은, 인위적 연출을 자제하고 향토민속 원형에 충실한 재현․전승 작품이 우선이었다. 그 결과 뽑힌 두레풍물은 주시준 단장이 이끌고 있다. 연습장은 해월로 183, 논산에서 제일 높은 제일감리교회 부근의 어느 이발관 지하이다. 매주 화․금요일 밤마다 열리는 이곳 연습장에 왜소한 노인 하나가 오토바이를 끌고 나타난다. “장구선생”으로 통하는 윤종만 옹! 이제 80을 바라보는 나이에 일견 은퇴를 앞둔 노병으로 보인다. 현실 또한 다르지 않다. 제자들이 신명 나서 1시간여 두드리는 동안, 그가 동참하는 시간은 1/4 안팎이니 말이다.
김덕수· 윤종만· 주시준
작은 체구에도 그의 말에는 위엄이 서려 있다. “배우려고 나왔으면, 열심히들 해야지!” 그의 일갈에 따라 연습이 시작된다. 지하실 연습장 공기가, 일순 공연장 분위기로 급전환이다. 이 악기, 저 악기 소리를 듣고 카메라로 담으면서 벽에 걸려 있는 수상 사진들로 둘러 보았다. 세계적인 사물놀이의 대명사 김덕수와 나란한 사진도 보인다. 상금 500만원 현수막도 보인다. 7살 때부터 시작됐다는 그의 풍류 인생이 이런 사진 몇 장이나 상패로 웅변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일반인들은 김덕수는 잘 알아도, 윤종만은 잘 모른다. 예술가를 비교하는 게 언어도단이겠지만, 논산전통두레풍물보존회 조직에서 윤종만은 고문, 김덕수는 자문위원이다. 윤종만은 그에게 있어서 대선배요 스승이기도 하다. 사물놀이는 두레에서 나왔다. 무대에 올리기 위하여 4가지를 추출한 때가 1987년이다. ‘공간사랑’에서 김덕수와 최종실이 사물놀이를 탄생시킨 후.... 끝내 유네스코에 등재까지 되었으니 김덕수의 사물놀이는 할 일을 다한 셈이다. 이런 김덕수에 비하여 그 원조격인 두레풍물은 갈 길이 멀다. 부여와 함께 공주와 논산 트라이앵글은 두레풍물의 본산이라 할 만하다. 부여 초촌 고추골 풍장이 유명하였는데, 노성 하도리풍장도 질세라이다. 두레풍물이 상승세를 타면서 이제 두레의 메카는 논산이다. 부여에서 출발한 김덕수는 윤종만 선생에 대하여 “키워주는 사람을 못 만나서 대성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안타깝다”고 토로한다.
그렇다고 해도 낭중지추(囊中之錐)이다. 숨겨진 끼와 재능이 숨을 데가 어디 있겠는가? 그 얘기로 들어가기 전, 주단장과 윤종만 옹의 인연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대개는 제자가 스승을 삼고초려(三顧草廬)한다. 그런데 논산 두레풍물은 거꾸로이다. 10여년 전, 윤종만 선생은 박동진 명창을 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아무리 명창이라 해도 제자 없이 사라지면 저렇게 끝이구나.” 그래서 당시 사물놀이를 곧잘 하는 주시준 씨를 찾아간다. 몇 차례 설득 끝에 두레로 바꾸어서 가르치지 곧잘 해냈다. 그 후 이 둘은 사제지간을 넘어 10년지기 명콤비, 도반으로 동해이다. 두 명이 합심하여서 두레의 역사를 새로 써가는 중이다.
지금은 두레풍물 하면 논산두레 주시준으로 민속학자들은 거의가 다 알고 있으며 논산이 두레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기 좋은 기회로 본다. 회원 50여명이 각자 좋아서 집단을 이루었고 주시준·윤종만 쌍두마차는 그들을 도와준다는 느낌, 놀자리를 마련해주는 기분으로 오늘도 흥타령이다. 오늘 연습 도중 간식으로 나오는 먹거리들은 가난한 밥상 분위기이다. 그러나 진짜 흥은 쪽박에서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두레풍물단에서 2016년에 선보인 지게작대기 풍장도, 기실은 가난한 나무꾼들의 고된 삶에서 나왔다.
7살때부터 솜아난 끼
윤종만은 1940년 7월 20일 부여 초촌면 진호리에서 윤태원의 육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러나 두 달 후 공주 탄천·이인으로 시집가는 누나 가마 속에 함께 실려가는 운명이었다. 풍물이 좋아서 7살부터 깽매기 대신 깡통을 두드렸다. 지게의 멜빵과 작대기도 그의 악기였는데, 이것은 결국 지게풍장으로 완성된다. 산에 나무하러 갈 때 네 명이 얼려서 상쇠, 장구, 징... 그러나 징은 입소리로 “징~~” 이런 그를 먹고 살기 힘든 누나는 “넌 커서 대체 뭐가 되려느냐”면서 작대기로 두들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구도 배우기 시작하였다. 14살부터는 논에서 장구를 치면 키가 작아서 벼 잎이 장구 궁체에 맞아서 장구피가 파랗게 물들곤 했다. 그의 학력은 탄천 복룡국민학교 중퇴이다. 배가 고프니까 밥 얻어먹으려 장구를 쳐나갔다. 대부분 어깨 너머로 배운 거지만, 스승이 꼭 있어야만 하는 게 큰 양장구였다. 서른 살 때 공주 대실(죽곡리) 엄석순, 엄봉용 씨를 찾아가 머슴을 자청하였다. “쬐그만 놈이 어디서 그렇게 배웠냐?”는 칭찬도 고마웠지만, 7개월 후에는 그 집을 나와야 했다. 배가 고파서다. 1년 머슴품삯 쌀5가마 시절, 그에게 장가올 여자가 없었다. 매형의 중매로 어찌어찌 30세의 노처녀를 얻었고, 세 딸을 고등학교까지는 갈켜서 시집들을 보냈다. 그의 나이 50세가 되니 선생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제 그는 양장구 같은 악기뿐 아니라 농요, 즉 못방구, 김메는 등의 소리 등을 익히고 상여소리 기능까지 보유하게 되었다.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강사로 나섰다. 노성면 두레풍물, 한국전통예술진흥회 두레풍물, 탄천면 두레풍물, 광석면 오강리 두레풍물을 거쳐 2001년부터 현재까지 논산전통두레풍물보존회 두레풍물강사로 안착 중이다. 수상 경력 또한 화려해 보인다. 2010년 황토현 전국농악경연대회 개인상, 2013년 논산시 논산예술제 개인상, 2015년도 8월에는 세계사물놀이 겨루기대회 우수연주자상, 11월에는 전국두레풍물경연대회최고연희자상....
이 외에도 광석면 율1리 그의 집에는 각약각색의 상패들이 즐비하다, 돈 아닌 상장들만.... 시내 대교동에서 셋집에서 살다가 이곳 광석으로 이사온 지 10여 년. 그의 화려한 경력과는 안어울림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생활비는 기초수급자 20만원, 부인의 면사무소 아침청소 32만원, 담배값과 오토바이 기름값 정도 받는 강사비가 그의 한달 총수입액이다.
고된 생활에서 움터나오는 소리 두레
지난 3월 30일, 옆동네인 오강2리에 “지와바리 전수관”이 세워졌다. 일꾼들은 두레일을 끝낸 다음 두레기 앞세우고 풍물을 치며 돌아와 음식과 술을 대접 받는다. 이때 기와를 밟듯이 서로의 등을 밟아주며 피로를 풀고 화합을 도모하며 즐기던 전통놀이가 바로 지와바리! 두레풍물의 일종이다. 서민이나 머슴들은 농사일이 힘드니까 농악으로 달랜다. 그래서 쓰는 표현이 “두레를 난다”, “두레 먹는다” 그들은 먹는 재미로써 두레풍물을 즐겼다. 윤종만이 걸어온 길이 바로 그러하다. 예인으로서라기보다 생활인으로서 버거운 삶을 소리로 풀어내온 일생이다. 생활을 위해 그는 소리를 질렀다. 한때는 개장사를 하면서 동네에 들어서면 소리를 쳤다. 지게풍장도 초동의 낭만이라기보다는, 산일의 연장이었다. 생활 속의 지게가 일순 악기, 즉 풍물로 변신한다. 지게 목발이나 작대기 긴 거는 “궁~~다리” 낫자루 손잡이는 짦은 소리~ 논일, 밭일, 산일로 고되거나 지루해질 때 각종 농기구들이 노동자들을 위무해주었고, 묻혀 있던 그것들이 고스란히 살아나 ‘지게풍장’이란 이름으로 부활한 것이다.
주시준 단장은 탄식을 토해낸다. “유형문화재는 자료가 있어서 복원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무형문화재는 그의 사후 복원이 어렵기에 생전에 전수를 받아놔야만 합니다. 선생님은 악기뿐 아니라 농요, 상여소리까지 해서 가르쳐 왔지만 아직도 똑같은 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네요.” 이제 선거철이고 공약으로 문화정책이 함께 선보일 터이다. 문화시장, 딴따라시장 다 좋다. 그러나 진정한 문화인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삼고초려할 데가 화려한 무대 위일 수도 있지만 한적한 시골 함석지붕은 아닌지 둘러볼 일이다. 시장 한 사람뿐 아니라 시민과 서민 모두의 심미안, 혜안, 귀명창이 이번 제주도 공연 이전에 빛 발하여 열호하면 참 좋겠다. 논산문화원에서 펴낸 『논산의 민요』같은 책자나 CD도 쏟아지면 좋겠다. 두레하면 논산으로 알고 있으며, 논산은 이미, 가히 세계적이기 때문이다.
글·사진 : 이지녕
이 내용은 『놀뫼신문』 2018-05-22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이 후속편이 "‘논산전통두레풍물보존회’, 한국민속예술축제 휩쓸고 대통령상"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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