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탐방] 한훈 광복단결사대장의 후손 한상빈씨 이야기
우리는 ‘호국보훈의 달’을 두 방면에서 접근하였다. 하나는 6·25, 또 다른 하나는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는 집안들은 대부분 망했다. 가세가 빈궁하니 자식들 공부 하나 제대로 가르칠 수 없었고, 가난과 무식의 대물림 현상은 불 보듯 뻔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집안을 일으킨 후손들이 있다. 계룡 무궁화동산에는 광복단결사대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결사대장였던 한훈 선생의 생가가 지척지간이다. 신도안에서 부모를 모시던 첫째손자 한상회 씨는 대전으로 나가 무인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며 상당한 입지를 구축하였다. 둘째 손자 한상빈 씨가 사는 곳은 논산 광석평야이다. 평생 농부로서 땅만 파면서 무너진 집안을 일으켜 세워왔다. 그 뚝심의 발원지가 궁금해진다.
광석면사무소 로타리에서 장마루쪽으로 틀다보면 왼쪽으로 사과나무, 배나무 과수원이다. 이 과수원집 주인은 35년 전 계룡시에서 토지보상을 받고 새 터전을 찾아 이주해온, 광석면 사람들 눈에는 여전히 타지 사람이다.
계룡시가 조성되기 위한 전초작업으로 비밀리에 6·20사업이 시작되었고, 신도안 주민들도 대규모 이주를 시작했다. 당시 신도안 정장리에는 120여 세대가 살고 있었다. 정장리 안터골은 무궁화거리 광복단결사대기념탑이 세워져 있는 일대이다. 이 동네 이장도 보았던 한상빈씨는 대토를 찾아 나섰다. 이름 그대로 너른 광석(廣石) 평야가 눈에 들어왔고, 당시 보상금으로 논2만평까지 구입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노력을 거듭하여 과수원과 대지를 사들여 지역에서는 대지주와 같은 삶을 개척해왔다. 이렇게 해서 35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도 주변 사람들은 그를 잘 모른다. 과수원 부부도 본인들 이야기를 별로 해오지 않았다.
그 많은 농사를 짓자니, 잠자는 시간마저 아깝다. 동네 사람들 한가찌게 만나 콩이야 팥이야 할 시간도 여의치 않다. 자나깨나 과수원 부부가 하는 것은 일, 오직 일뿐이다. “취미생활은 안 하세요?” 기자의 질문에 돌아온 답은 “농사죠, 뭐.”
농사는 벼농사, 과수원, 그리고 양봉이다. 농토 중 7천평은 직영한다. 매년 소출하는 쌀 대부분은 불우이웃이나 주변 지인들과 나눈다. 이사 온 다음해부터 지금까지 지속해온 일이다. 이러면서 이웃들을 만난다. 요즘은 짬을 내서 노인회, 향우회, 총화협에도 참여한다. 광석면이나 공공기관에서 건축부지다, 도로 내는 데 땅이 필요하다 하면, 그때마다 필요한 만큼의 땅도 기부체납을 해왔다. 그렇게 해야 마땅하다고 여겨져서 해왔을 뿐이다. 이러면서도 집안 내력 같은 건 전혀 밝히지 않아왔다. 왜? 그 뿌리는, 할머니의 지독한 교육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응두! 85세로 작고하신 할머니는 광복단결사대 한훈 대장의 부인이다. 영화 “밀정” 등에 부분 노출된 것처럼, 한훈은 국내 한복판에서 암약했던 일정부 요인 암살단원이었다. 두 눈에 핏발 선 일본형사들이 주동자인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만만하게, 최고 악질의 가혹행위를 가한 대상은 그의 부인이었다. 친정 쪽도 쑥대밭이 되었다.
7세에 어머니를 사별한 한상빈은 그 할머니 품에서 자라다시피 하였다. 나이 차이는 40~50이었지만, 사실상 어머니였다. 나 어린 그가 투정부릴 곳은 할머니뿐이었다. 그 때마다 유응두 할머니는 부드럽게, 때로는 단호하게 응하셨다. 교육에서만큼은 유독 엄격하였다. 아니, 한상빈으로서는 하루 종일 일만 하시며 사시는 할머니의 한마디, 한마디를 허투루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그 중 하나 귀에 딱지 생기도록 들은 말 : “너 어디 가서라도 할아버지가 총 쏘면서 독립운동을 했다 는 말, 절대 하지 말거라!”
어린 소년은 장화도 없이 일하다가 발이 찔리고 힘들어서 반항을 한다. “할아버지가 큰일을 하셨다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고생만 해요?” 이런 철부지에게 할머니는 호미를 내려놓으시고 모시 적삼을 끌어내린 다음, 어깨를 보여 주신다 “상빈아, 네 할아버지 찾아내라고 할미 어깨뼈도 망가뜨린 게 무서운 일본놈들이다. 독립운동 얘기 함부로 꺼냈다가 너도 이렇게 모진 꼴 당할 수 있어.”
둘째 손자 한상빈은 신도안에서 학교를 다녔다. 서울 가서 상급학교는 붙었지만 “입학금이 없어서 못 들어간다.”는 말에 볼멘 소리로 대들었다 “그까짓 독립운동 해봤자 뭐해요?” 할머니는 대노하셨다 “이놈아, 할아버지가 그 일하신 게 우리집안 자식들 잘되라고 그런 줄 알아? 나라를 위한 일은 그렇게 속 좁은 게 아냐!” 때론 달래기도 하고 때론 호되게 나무라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쯤에는 장성한 손자 한상빈을 칭찬하셨다. “네가 빚을 져서라도 땅을 많이 장만해둔 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나라가 없으면 어디가 죽어도 하소연할 데가 없듯이, 네가 논밭이 없으면 자손들 무슨 수로 먹여 살리겠느냐?”
아이러니하게도 할머니의 토지에 대한 애정은 일본에게서 싹텄다. “상빈아, 일본사람들이 나쁘기는 하지만 배울 건 배워야 한다. 할매는 일본사람들 사는 모습 다 봐왔단다. 아침 6시에 나오면 저녁6시까지 잔꾀 같은 거 부리지 않고 줄기차게 일해나가더구나. 그러니 남의 나라에 와서도 땅 사고 부자가 됐던 거야. 우리나라 사람들도 15시간 일해나간다면 일본을 이길 수 있단다.” 칭찬을 받고 싶은 어린 소년은 대답하였다. “할머니, 그러면 나는 20시간씩 일하면 부자 되겠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하루 2시간만 자고, 나머지 시간은 일에만 몰두한다. 골몰무가(汨沒無暇), 그의 하루, 아니 그의 74년 일생이 그렇게 점철되어 왔다.
한훈 대장은 두 남매를 두었다. 딸도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는지, 1923년 독립운동가들의 무덤인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고 수백명의 일경과 교전 중 순국하신 김상옥 의사 집안으로 들어갔다. 91세 비교적 장수를 한 반면, 아들인 한세택 씨는 81세에 별세하였다. 한상빈 씨 부친 머리는 비상하였지만 현실은 그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분을 못 이길 때는 선친이 숨겨두었던 육혈포를 꺼내서 탕탕 쏘곤 했단다. 6·25사변전 강경에서 사업을 하던 그는, 부친인 한훈 대장이 북송 도중 사망하게 되자 신도안 안터골로 들어와 어머니를 모시면서 살게 되었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은 상회, 상빈 두 형제만 남겨두었다. 두 번째 부인, 즉 한상빈 씨의 작은 어머니는 5남매의 동생을 생산하였다. 이들이 함께 생활하는 동안 상빈은 꾸지람을 들으면 할머니에게 쪼로록 달려갔다. 그 때 할머니는 귀여운 손자의 하소연을 받아주기는커녕 엄명하셨다. “어서 엄마에게 가서 빌어, 무조건 잘못했다고!” 그러면서도, 계모 슬하에서 자란 효순 임금 고사를 들려주는 인자하고 박식한 할머니였다. 그렇게 자라난 한상빈 씨 머리 속에는 할아버지나 아버지보다 할머니 생각으로 더 가득한 듯싶다. 할머니는 소리내어 운 적이 없었다. 강인한 판단력은 물론 학식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현모양처를 넘어 당대의 여장부 사표(師表)였던 모양이다.
군대에서 제대한 한상빈은 이내 결혼한다. 설악산에서 자라 현재 72세가 되기까지 백년해로중인 남은신 여사는 동네사람들조차 “하늘이 낸 사람”이랄 정도로 부덕을 겸비한 내조꾼이다. 1969년 결혼 후 제금날 때까지 15년 정도 할머니와 지냈고, 1984년까지 15년은 아래 동네에서 할머니 말씀대로 내리 줄창 일만 하면서 살았다. 축산업 초창기였던 당시 소 돼지도 부지런히 키우고 누에도 10장 이상 키워서 억척스레 돈을 모아 해년마다 땅을 사들였다. 땅금도 비싸지 않은 시절이었던지라, 나중에 보니 동네에서 농토가 제일 많은 천석꾼이 되어 있었다. 군부대 보상도 잘 받아서 대토를 논산 광석뿐 아니라 대전에도 임야를 장만했다. 할머지는 3년 전 국립묘지에 안치되었지만, 그런 게 꿈꾸기도 어려웠던 그 시절 할머니 돌아가시면 모시기 위해서였다. 2남 1녀도 대전으로 유학시키면서 대전 생활을 병행하였다.
한훈 대장의 자필이력서나 친필을 보면 무인으로서뿐 아니라 문인으로서의 탁월성이 돋보인다. 해방 후 신익희 처럼 내로라하는 정치인들도 때가 되면 신도안 할머니에게 인사차 다녀갔다고 한다. 그의 외아들인 한세택 씨는 6·25때 신도안 들어와 농사를 짓다가 다시 대전으로 나가 민주당으로 출마하는 등의 정치활동도 시도하였다. 학문은 독학하였지만 출중하여 대전 최초로 노인대학교를 만들어 운영할 정도였다.
집안의 머리는 그 아들 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주먹이 바위만한 큰형 상회 씨는 선친의 용맹함을 물려받아 무예쪽으로 빛을 발하며, 현재 대전에서 체육관장을 하고 있다. 둘째인 상빈씨도 광석에서 농사에 전념해왔지만, 70평생에 걸쳐서 대전 생활도 4년 정도 병행하였다. 현실적 필요에 따라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서 그 방면 활동도 하였다. 대전에 있는 동안 산악회장도 맡았는데, 당시 광석에서 농사지은 것을 회원들에게 나누어주곤 하였다. 그런 추억이 빛바랜 듯했지만, 요즘 절대적으로 부족한 농촌 일손을 그때 그 산악회 회원들이 덜어주고 있는 게 현재요, 질긴 연이란다.
살아가면서 법의 위력을 체감한 상빈 씨는 슬하 3남매 중 큰 아들에게는 사법고시를 주문하였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들어간 큰 아들은, 그러나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동문 선배인 김근태 의원의 보좌관으로 주저앉고 만다. 경제학과출신답게 경제적이지는 못하지만 그의 재산은 ‘제2의 김근태’라는 닉네임이 만족스럽고..... 둘째 아들도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나와서 애니메이션과 영화 관련 일을 하고 있지만, 처절한 가족사에 눈길 주려하는 분위기는 아니란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만, 상빈씨 가문은 절반의 승리랄까? 대농(大農) 자식답게 주말이면 손주들까지 내려와서 벼 모도 심고 과수원 일도 거들게 한다. 노동교육에 있어서 할머니가 엄격했듯, 그 교육 100% 전수받은 손자 한상빈 씨의 추상같은 영(令)도 여전히 세워지는 모양이다.
대농으로서 엄청난 일을 본인 부부와 가족의 노동력으로 감당하는 동안 농부 상빈 씨는 몸, 특히 위장이 상했다. 몇 해 전 과수원 봄꽃 수정을 위해서 자연스레 시작한 양봉이 생명의 은인이 되어 주었다. 시판하지 않는 프로폴리스를 새벽마다 공복에 상복한 결과 위장은 물론 몸 전체가 기적처럼 살아났다. 평생 파트너도 함께 회춘하여서 매일매일 주어진 일과를 감당해내고 있는 요즘이다. 덕분에 동구밖 과수원 주인으로서 TV에 출연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한상빈 씨는 새벽 2시에 어김없이 일어나자마자 이면지에다가 하루 할 일을 쭉쭉 적어간다. 숱한 목록 하나씩 끝낼 때마다 X표를 쳐간다. 메모지와는 별개로 공책 일기를 50여 년 내내 써오고 있다. 영농일지를 겸한 생활사의 기록들이다.
신문사 인터뷰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평소 일하는 시간 뺏는 것 같아 미안해질 정도로 빡빡한 일정이요, 치열한 일과이다. 오직 일, 오직 땅 일구기에만 올인하던 그가 최근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7~8년전 쯤 『놀뫼신문』에서 어떤 여기자가 집으로 찾아왔단다. 택시기사에게서 듣고 왔다면서, 이 동네에 쌀 나눠주는 분이 있다 해서 물어물어 왔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깜냥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대신 『놀뫼신문』한 부 구독하기는 하겠습니다.” 최근에는 구독료 밀릴 때도 많다는 겸연쩍은 발언에 기자가 뜨악한 표정을 지으니, 대농은 대농대로 고민이 깊다고 술회한다. 토지 구매시마다 농협 융자 등 다소간의 무리를 수반해왔기에 그 후유증이 따른다는 현실인데......
그런 현안들이 해결되면 숙원 사업을 실천에 옮기고 싶다고 피력한다. 그 중 첫째가 한훈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삶을 재조명하여, 나라와 이웃을 위하는 삶이 진정 어떠한가를 생생한 기록으로 죽기 전에 남기고 싶다는 염원이다. 그 동안 숨기고만 살았던 독립운동가의 삶이, 더 이상 음지에 머물도록 할 수만은 없다는 인식의 대전환이다. 친일파들은 여전히 득세하는 선순환 구조의 역사, 아니 질긴 세습의 역사인 반면, 독립운동가 후손의 삶은 배움의 기회가 원천 차단되는 등 처참 일변도인 현실이었다. 이제라도 그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고 싶은 모양이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한훈 대장의 일가를 취재하는 동안 “대한 광복절기념공원”이 영주 풍기읍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훈 선생의 고향이자 활약지인 충남이 아닌, 경상북도에... 계룡시도 하마터면 한훈 대장을 그대로 묻어둘 뻔하였다. 그 동안 김철규 향토사연구가의 개인적인 관심과 줄기찬 노력이 없었다면, 한훈 선생의 이야기 복원이나 생가 찾아내는 일 등등이 요원했을 수 있다. 때마침 6월 18일 오전, 사계고택에서는 “계룡시 향토사이야기”가 펼쳐졌다. 그 첫번째가 ‘광복단결사대장(일명 조선독립군사령관) 한훈 의사의 이야기’다.
광석면 신당리 한상빈 씨 자택에는 그 동안 숨겨왔던 한훈 선생의 글씨 몇 점과 “독립정신(獨立精神)”을 구가하는 김구 선생의 친필이 걸려 있다. 당시 실천하는 암살행동단장으로서 이 두 거장의 교류는 스스럼 없었겠지만, 대중들 눈은 노출된 특정인에게 더 꽂히게 마련! 앗겨버린 역사의 한복판을 떠나지 않고 5척 단신의 품에 육혈포 장진한 채 백척간두 산하(山河) 누비면서 이 땅을 지켜내고자 청춘을 걸었던 피눈물 광복단결사대에게도 눈 돌려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다른 데 사람들은 그렇다 치지만 계룡시만이라도, 논산시만이라도......
이진영 기자
[글·사진] 이지녕
위 사진 중 일부는, 한상빈 씨와 김철규 향토사연구가가 제공하였습니다.
이 글은 『놀뫼신문』 2018-06-20일자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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