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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치 Dec 11. 2023

정신머리 없는 나의 소비

내일도 살아야 하니까

"저 정신머리 없는 계집애"

아빠는 생전에 나를 가끔 저렇게 표현하셨다. 기억력이 안 좋음을 탓하신 게 아닌 돈이 생기는 족족 다 써버리는 나를 나무라시던 말이다.


난 우리 집 식탁이 참 싫었다.

"길치, 너 이리 와서 좀 앉아봐"라고 부르신 날은 여지없이 정신머리 없는 나의 소비 습관에 대한 한심함과 저축의 필요성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시기 때문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7남매의 장남, 그에 못지않은 깡시골 6남매의 장녀였던 부모님은 온돌도 없는 다다미 방에서 작은 전기장판에 나와 동생을 눕히고 걸레가 꽝꽝 얼 정도로 추운 날씨를 버티며 살림을 일으켜 세우셨다. 그렇게 고생하며 모아 간신히 내가 4살 때, 가회동에 작은 집을 마련하셨더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빠의 할머니, 부모님과 누나들.. 그리고 그의 자식들까지 14명의 가족이 모여 살게 되었고 엄마는 도시락을 8개씩 싸며 조카들을 챙기고 고모들의 시집살이까지 톡톡히 하셔야만 했다. 그러다 엄마를 험담하는 넷째 시누와 시어머니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고 엄마는 화병이 생겨 앓다 급성 폐렴에 걸렸고, 당시는 의료 보험이 되지 않아 간신히 마련했던 집은 엄마의 병원비로 고스란히 들어가게 되었다.


다시 원점이 되었지만, 부모님은 정말 열심히 일만 하셨다. 배운 것도 물려받은 것도 없고 오히려 뜯어가는 곳만 수두룩하지만, '성실'과 '책임감'하나로 몸이 부서져라 일하시며 서울에 작은 집도 마련하셨고 노후 준비도 모두 마치셨다. 그런 부모님께 '오늘'만 사는 듯 저축 하나 없이 사는 내가 한심한 건 당연하다. <아저씨>의 원빈은 멋있기라도 하지.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때였다. 웬 스님이 오시더니 갑자기 내 관상을 봐주셨었다. 기억나는 건 "돈이 필요한 만큼 들어오나 그만큼 나가는 사주"라는 것이다. 주문도 하지 않으면서 자꾸 말을 시키시는 스님이 불편했지만 '돈이 필요한 만큼 들어오나..'라는 말이 기분 나쁘진 않았다. 뒤에 '그만큼 나가는 사주'는 홀랑 잊어먹고 말이다.


그 스님 말씀이 진짜였을까? 내 삶은 늘 그랬다. 적게 벌면 적게 나가고, 많이 벌면 많이 나갔다. 하나의 업에 20년 넘게 종사하다 보니 자연스레 급여는 많이 올랐고, 혼자 벌지만 그래도 우리 식구들 맛있는 거 먹고 싶을 때 기분 좋게 사줄 수 있을 만큼은 벌게 되었다. 그러면 뭐 하나. 그만큼 나가는데...


나도 열심히 돈을 모았.. 아니 갚았을 때가 있었다. 결혼 후 전세자금 대출은 나에게 꽤 큰돈이었고, 돈이 모이는 족족 1층 은행에 가서 갚았더란다. 대출금이 줄어드는 게 그리 재밌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보다 훨씬 적은 돈을 벌었음에도 금방 대출을 갚고 헌 집 증후군에 질려버릴 대로 질려버린 터라 신축 빌라 전세로 이사도 했었다. 그곳에서 2년이 다 돼 가던 즈음, 집이 팔렸으니 이사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한 겨울에 만삭의 몸으로 발품을 팔아 친정 근처의 오래된 아파트를 자가로 (영끌하여) 구매할 수 있었다. 2천만 원으로 시작해 4년 만에 내 집마련 한 정도면 나도 아예 정신머리가 없던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그렇게 산 집은 아이를 내가 키운다는 조건으로 이혼하며 깨끗이 포기했고, 무일푼으로 부모님께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한심스러워 죽겠는데, 매일 같이 오는 택배에 수많은 아이 장난감과 물건들에 얼마나 미우셨을까 이해도 된다.


이혼 후, 나는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게 되었고 아이와 신나게 놀러 다니고 공부도 하고 즐겁게 지냈다. 작지만 부모님과 연 끊을 행동만 안 한다면 평생 살 집도 있고, 그냥 잘 쓰고 재밌게 살았다.



그러나 아빠가 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시고, 나에겐 가장이라는 책임이 생겼다. 가끔 혼나는 것만 참으면, 아빠는 나의 든든한 언덕이었는데 그 언덕이 갑자기 사라졌다. 암에 고통스러운 그 순간에도 아빠는 정신머리 없는 내가 엄마 노후를 힘들게 할까 걱정되셨는지, 모든 재산은 엄마에게 넘기신다는 유언도 녹음을 해 두셨다. (지금 생각하니 아빠한테 서운하다. 저 그렇게 망할 X은 아니거든요. 아빠)


즉, 혼자 남은 엄마로 인해 내가 금전적인 부담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장녀로서의 책임감에 나는 부지런히 딸과 엄마를 챙겼다. 그런데 그 방법은 하늘에 계신 아빠가 자랑스러워할 건 아니었다는 게 문제다. 아빠는 벌 때 열심히 모아 미래를 준비하길 원하셨을 텐데, 평생 고생만 한 우리 엄마 맛있는 거 좋은 거 많이 사드리고 싶었고, 외로운 우리 딸도 부모가 모두 있는 아이들보다 더 많은 경험하고 삶을 즐기길 원했다. 그래서 우리는 잘 입고, 잘 먹고, 즐겁게 여행하며 살았다.


우리 모두 건강만 하다면, 그 행복이 영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삶에 고난은 예고 없이 왔다. 요즘 내 브런치를 도배한 아이의 등교 거부로 우리 식구들은 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픈 아이가 얼른 회복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게끔 모두 노력하고 인내하는 것이 가장 크지만, 그와 별개로 우리와 함께 사는 것만으로 엄마가 겪지 않아도 되는 고통을 받고 계신 것 같은 죄책감도 나에겐 꽤 큰 아픔이다.



엄마라도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드려야겠다. 그러려면 어떡하지? 우리가 독립해야 하나.. 난 어떤 준비도 안 해놨는데... 막막하다.


드디어 나도 정신이 들기 시작한다. 실컷 즐기고만 살았더니 당장 선택을 해야 하는데 옵션이 없는 거다. 물론, 독립이 답은 아니다. 그걸 따지기 전에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내가 한심해졌다.


나에게 내가 이 말을 해 주고 싶다.

"이 정신머리 없는 계집애야! 이제 정신 좀 차려!!"


나와 아이, 강아지와 고양이 모두 빠진 텅 빈 집 거실에 앉아 있는 엄마를 상상해 보니 독립 또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일 뿐, 안 그래도 외로운 엄마를 더 외롭게 할 것 같다. 우선은 지지고 볶고 힘들어도 엄마 옆에 남기로 결정은 했다.


다만,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내 현실은 충격이었다. 그리고 내가 언제까지 지금처럼 수입이 있을지, 힘이 들어 또는 회사에 일이 생겨 갑자기 일을 그만두게 되면 지금처럼의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직장을 바로 구할 수 있을지.. 그걸 확신하기엔 내 나이가 참 많다.


이젠 정말 아빠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내 소비를 좀 챙길 생각이다. 독립은 접었지만, 나중에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여러 옵션을 펼쳐두고 신중하게 고민하고 싶다. 돈 때문에 어떤 선택에 주저하고 싶지 않다.


상상을 해본다. 하루하루 학교 가는 게 힘든 아이가 중학교 가서도 이런다면... 자퇴를 선택하게 된다면... 일을 쉬고 아이와 몇 달 어학연수라도 받으며 따뜻한 나라에서 지내고 오는 선택을 가볍게 할 수 있는 그런 거?


이것 봐라. 또 돈 쓸 생각만 하고 있다.


농담이고, 아빠 잘해볼게요.

아빠의 검소함, 배워볼게요.


아빠..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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