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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러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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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까스 Mar 20. 2023

2023 동마 완주 후기

요약: 힘들다.

 올해 1월 초였다. 러닝크루 단톡방이 시끌시끌해졌다. 동아마라톤이라는 대회 신청 기간이 다가온다고 했다. 이왕 달리기를 취미로 시작한 거, 마라톤 풀코스라는 끝판왕을 언젠가 깨보고 싶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다. 너도나도 신청하는 크루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신청 대열에 합류하고 말았다. 이게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2013년 1월과 2019년 1월. 나는 두 차례에 걸쳐 무릎 수술을 받았다. 십자인대 파열과 함께 주위 연골까지 찢어진 꽤 큰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2013년에 처음 수술을 받고 생활하다가 무릎 상태가 악화되어 2019년에 재수술을 받았을 때, 나는 거의 걷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거실까지 가지도 못해 방에서 밥을 먹었고, 가만히 서 있는 것도 고통스러워 샤워를 할 때도 바닥에 주저앉아 씻어야 했다. 병원에서 MRI를 찍어도 통증의 원인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때 갔던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계속 아프면 지팡이 짚고 사셔야죠 뭐."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는지, 2019년에 공부를 끝낸 이후 다행히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몇 달에 걸친 재활 이후 무리없이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평소에 믿지도 않는 신에게 얼마나 감사드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후로도 통증은 간헐적으로 찾아왔고, 나는 무릎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달고 다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다리 쓰는 일을 최대한 피했다. 걸어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다고, 나에게 운동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러닝을 시작한 계기는 매우 사소했다. 별 생각 없이 인스타를 뒤적이다가 한 인친의 러닝 기록을 보게 되었다. 10K 기록이었는데 매우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큰 결심 따위는 없이 '나도 한 번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다음날 나가서 달려보았다. 생각보다 무릎이 아프지 않았다. 그리고 스트레스가 날아가고 몸이 상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걸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면, 뛸 수 있다는 것은 기적같은 일이었다. 몇 달 전만 해도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절뚝이던 길을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내달릴 수 있다니! 이마에 흘러내린 땀이 너무도 달콤했다.


 이후 나는 꾸준히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중간에 게으름을 피운 날도 많았으나, 나에게 맞는 운동이 러닝이라는 생각은 점점 확고해져갔다. 그렇게 2년 정도를 중랑천을 달리다가 이사를 하고 나서는 양재천에서 달리기 시작했고, YRC 러닝 크루에 들어가게 되었고, 마침내 동아마라톤까지 신청하고 만 것이다!



연습일지. 원래 계획은 월, 토 제외 주5회 훈련이었으나...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부상 당하기 전까지는.


 나는 무언가를 기대하고 마라톤을 신청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평일에 10K 뛰듯, 주말에 LSD 뛰듯 똑같은 러닝이라고 생각했다. 대회 전날 본 영상에서는 "마라톤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다이나믹한 철학과 명상이다" 라는 멘트가 나왔는데, 나는 그런 거 모르겠고 그냥 매우X1000 힘들었다. 고수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철학과 명상을 할 여유 따위는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28키로 지점까지는 진짜 어떻게든 페이스 맞춰 달렸다(사실 25키로 정도까지는 페이스 운영을 꽤 잘 한 것 같다). 이후 14키로 정도를 걷뛰 했는데, 한걸음 한걸음이 지옥이었다고 간단하게 평할 수 있겠다. 발 구석구석이 아팠다. 나중에 양말을 벗어보니 물집까지 큼지막하게 잡혀있었다. 다리가 내 다리 같지가 않고 뻑뻑했다. 평소에 괜찮던 허리까지 아파왔다. 별로 뛰지도 않아도 심박수는 금방 180까지 올라갔다. 준비한 에너지젤은 몸에 맞지 않는지,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총체적 난국이 이런거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14키로 정도는 평소라면 편안하게 뛸 수 있는 거리지만 이미 28키로를 뛴 내 몸은 멈추라며 아우성치고 있었다. 이런 느낌은 레이스 마지막으로 가면 갈수록 심해졌는데, 잠실대교 이후 5키로 구간은 헬파티, 40K 이후 남은 2.195키로는 첫 20키로보다 정신적으로 훨씬 힘들었다. 목표했던 서브4 기록은 35키로 부근에서 이미 바이바이한 상태였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사람들의 응원 덕이었던 것 같다. 불쌍한 표정을 짓고 뛰어가다 보면 어느샌가 내 손에 레몬, 콜라, 초코파이를 쥐어주시는 서포터즈 분들이 계셨다(덕분에 마라톤을 끝낸 나는 배부른 상태(?)였다). 배번에 적힌 내 이름을 보고 힘내라며 불러주시는 분들도 계셨다. 종합운동장에 들어서는 구간은 이러한 응원이 절정에 다다른 구간이었는데, 그 직전까지 걸어가던 사람들도 그 때만큼은 없는 힘을 쥐어짜 뛰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 그리고 이 구간은 카메라가 있기 때문에 표정관리를 해야 하는 구간이기도 하다. 힘들게 뛰었는데 사진이라도 남겨야지.


 마침내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고 트랙에 진입했는데, 트랙 반시계 방향 10미터 쯤에 결승점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를 돌아서 골인해야 했다. 차라리 보여주질 말던가! 피니시라인이 바로 앞에 있는데 한 바퀴를 더 돌아서 가야만 하는 그 느낌이란... 400미터 쯤 되는 트랙이 그렇게 길어보일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물고 스퍼트를 내어 골인했다! 힘들다, 아프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렇게 나의 인생 첫 풀코스 마라톤이 마무리 되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비공인 기록, 완주 메달, 주경기장 앞에서 한 컷. 크루원들을 찾지 못해 혼자 찍었다...

 



 아쉬운 점도 많았으나, 좋았던 점이 훨씬 많았다. 크루에 들어갔지만 시간 맞추는 게 귀찮아 맨날 혼자서만 뛰었는데, 주변에 같이 뛰는 사람들이 있으니 훨씬 재미있었다. 후반부에는 너무 힘들었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미세먼지로 오염된) 서울 하늘을 올려다보며 레이스 자체를 즐기려고 노력했다. 힘든 상태 자체도 꽤 즐거웠던 것 같다. 어디서 또 이렇게 체력적인 한계를 마주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마라톤이 아니라면 언제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뜨거운 응원을 받아볼 수 있을까? 특히 종합운동장 안으로 진입할 때 절정에 달한 응원 탓에 느껴지는 영웅이 된 듯한 기분을 어디서 맛볼 수 있을까?


 이번 대회는 첫 대회이기도 하고, 준비 기간도 3개월 정도로 짧았고, 복장이나 보급식품에 대한 지식도 충분치 않았다. 다시 말하면 개선할 점이 매우 많고, 그만큼 개선될 여지도 많다! 다음 목표는 10월에 있을 춘천마라톤이다. 7개월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으니, 잘 준비해서 또 즐겁게 달려봐야겠다.



ps. D-1 글에서 마라톤의 끝이 축제라고 했는데, 사실은 달리는 과정 자체가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 장당 거금 5천원씩 내고 받은 사진 추가

왼쪽은 41-42키로 구간인 것 같다. 이미 혼이 나간 상태. 오른쪽은 주경기장 들어오기 직전. 사람들의 응원을 잔뜩 받으며 마지막 힘을 내고 있다.


오른쪽 사진 특히... 얼굴 표정에서 보이듯, 멈추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다. 사진을 보니 저 때의 괴로움이 다시 생각나는 듯 하다. 장하다 내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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