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차 〈냉장고는 내 철학이다〉

『혼자여서 괜찮은 날들』

by 박동욱

혼자 살다 보면 불편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별거 아닌 문제인데도
식자재를 살 때면 그런 감정이 불쑥 올라온다.

장을 볼 때
딱 ‘한 끼 분량’으로 사기란 참 어렵다.
마트는 늘 ‘가족 단위’를 기준으로 한다.
두부는 두 모, 고기는 600g, 과일은 봉지째.
혼자 살면서 ‘적당히’라는 말은
내겐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유는 안다.
소량 포장은 쉽지 않고,
판매자 입장에서는 효율이 중요하니까.
하지만 요즘 1인 가구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마트 진열대는 여전히 대가족 중심이다.
가끔은 얄밉다.

그래서 나는 ‘냉동실 철학’을 택했다.
장을 보고 돌아오면
먼저 ‘소분’부터 한다.
닭가슴살은 하나씩,
김치는 소포장 지퍼백에,
채소는 한두 번 쓸 만큼씩 나눈다.

그렇게 정리한 식자재들을
냉동실에 고이 넣는다.
그리고는 잊는다.

시간이 흘러
출출한 밤, 냉동실 문을 열면
그 안은 마치 개인 박물관 같다.
어느 시대의 유물인지도 모를
만두 반 봉지, 먹다 남은 핫도그,
‘언제 샀더라?’ 싶은 육수 팩까지.

“엥? 이게 있었네?”

그 순간,
냉장고는 단순한 가전이 아니라
내 삶의 타임캡슐이 된다.
냉동실 구석에 남은 유물 하나가
어느 계절의 나를 떠올리게 한다.
그때 먹고 싶던 기분까지도 되살아난다.

나는 자주 냉장고 앞에 선다.
문을 열고, 한참을 바라본다.
먹을 걸 찾는 게 아니다.
마치 내 삶의 상태를 점검하듯.
요리할 의욕이 있는지,
게으름이 쌓였는지,
사는 게 정돈되어 있는지.
냉장고는 말없이 알려준다.

채워져 있어도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을 때.
텅 비었는데도
왠지 든든하게 느껴질 때.
냉장고는 늘 내 마음을 닮아 있다.

가끔은 생각한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냉장고를 보면 된다.

무엇이 있고,
무엇이 사라졌고,
무엇이 유통기한을 넘겼는지.
그걸 보면 지난 몇 주,
혹은 몇 달의 내가 보인다.

혼자 살며 냉장고는
음식을 저장하는 공간을 넘어서
게으름과 성실함, 욕심과 절제,
기억과 망각이 공존하는
작은 우주처럼 느껴진다.

언젠가 친구가 내 냉장고를 열고 웃었다.
“야, 여긴 왜 소주보다 얼린 레몬이 더 많아?”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게 내 삶의 철학이야.”

술은 줄이고,
대신 요리에 쓰는 작은 풍미를 위해
얼린 레몬을 챙겨두는 내 삶.
그게 어쩌면
혼자 살아가며 생긴
가장 현실적이고 철학적인 변화다.

혼자 사는 사람의 냉장고는 말이 많다.
다이어트를 결심했던 시기의 닭가슴살,
누군가 놀러 오기로 했던 날 사뒀던 와인 한 병,
요리에 도전했던 흔적처럼 남은 각종 양념들.

그 안에는
계획이 있고, 실패도 있고,
의욕과 포기가 나란히 들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다.

오늘도 나는 냉장고 문을 연다.
무언가를 꺼내기 위해서라기보다
내가 잘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비록 그 안에는
빙하기를 지난 고기 한 조각과,
정체불명의 통닭 육수가 남아 있더라도 괜찮다.
그 모든 게
내가 살아온 시간이고,
앞으로도 살아갈 방식이니까.

그래서 나는 말한다.

냉장고는 내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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