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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Oct 21. 2023

욕망하는 이방인들의 도시, 뉴욕.

다시 한번 꿈을 꾸기 위하여.

뉴욕에 갓 도착한 패기 넘치던 20대 초반의 나는, 틈만 나면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에 타임스퀘어를 찾았다. 관광객들이 빠져나간 야심한 밤의 타임스퀘어는 특별하다. 언제나 심하게 붐비는 거리가 한산하게 트여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타임스퀘어를 가득 채우는 상징적이고 화려한 전광판들은 거리를 빼곡히 메운 채 밤새 꺼지지 않는다. 그 자극적인 불빛들이 생기 있게 요동치는 한산한 거리 한복판에 우뚝 서 있노라면, 뉴욕이 온전히 나의 소유인 것 같았다. 금장식이 달린 곤룡포를 닮은 붉은 망토를 걸치고 왕의 자리에 올라 용맹하게, "이 세계는 이제 나의 것이다!"라고 외치는- 조금은 귀여운 소년 만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나의 멋진 대사와 함께 극적인 바람이 몰아친다. 휘날리는 망토와 나의 빛바랜 노란 머리칼, 하늘을 향해 쳐든 빛나는 주먹.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될 현실의 디테일이라면 바람과 함께 철없이 날아오르고 하염없이 굴러가는 길바닥의 수많은 쓰레기들일 것이다. 이 디스토피아적인 그림마저 어찌나 매력적이고 설레던지. 




뉴욕은 미국 내에서는 물론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자유를 사랑하는 이들이 꿈과 야망을 가지고 파도처럼 밀려들어오는 곳이며, 그것이 도시에 생명을 불어넣는 동력이다. 모두의 사연 많은 열정의 에너지는 뉴욕의 공기에 밀도 있게 담겨 있기에, 아직도 나는 북적거리는 맨해튼 거리를 거닐 때면 마음이 두근거린다. 


숨이 살짝 가빠지기 시작하는 기분 좋은 흥분감이다. 언제든 먼 기억 속 새벽의 타임스퀘어로 나를 돌려보내어 앞뒤 없이 가슴 뛰게 만드는 첫사랑 같은 힘, 그것이 이 지저분하고 불편한 도시에 대체할 수 없는 가치를 부여한다. 그렇기에 뉴욕에 살고 있거나 살아본 이들은, 입버릇처럼 욕을 퍼부으면서도 뉴욕을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사랑에 빠진 뉴요커라면 모름지기 욕망해야 한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패하며 자신의 꿈을 이룰 때까지 전력으로 전투에 임해야 한다. 욕망하는 에너지가 도시를 숨 쉬게 하기에, 욕망이 정체되면 뉴욕의 심장은 힘을 잃고 멈춰버린다. 뉴욕이 화려하고 낭만적인 그 본연의 모습으로 영속하기 위해서는, 도시 내부의 욕망을 위한 사투가 쉴 틈 없이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로 인해 모두가 대도시를 피하던 판데믹 기간 동안, 뉴욕은 충분한 에너지를 받지 못한 채 시름시름 앓아누웠다. 달콤한 꿈에서 문득 깨어나 마주한 텅 빈 방처럼 허무한 그 모습엔, 도시의 황폐한 슬픔이 짙게 배어있었다. 최면이 풀린 걸까, 긴장이 풀린 걸까. 많은 이들이 도시를 떠났다. 


판데믹 이전부터도 뉴욕은 언제나 유입이 많은 만큼 이탈도 많은, 철새들의 도시였다. 이방인이 뉴욕에서 10년 이상 매일같이 욕망을 위해 분투하는 삶을 지속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 않나. 들끓는 욕망으로 만성이 되어버린 두통이 무의미해지는 날은 온다. 만신창이가 된 자신이 딛고 있는 이 땅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내가 19년이라는 긴 시간 뉴욕을 떠나지 않고 맴돌며 지내왔다는 것은, 주변에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전장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때 그 시절 소년 만화에 등장하던 인물들은 거의 모두 뉴욕을 떠났다. 떠나는 이들은 미련이 없었다. 훌륭히 후회 없게 싸웠기 때문이다. 다른 삶을 찾아 떠나는 그 가벼운 발걸음에 내가 먹구름이 될 이유는 없었다. 쉽게 남겨졌고, 괜찮아야 했다.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편안하게 예술과 삶을 이야기하는 일상의 휴식을 사랑한다. 뉴욕 같은 도시에서라면 그렇게 늙어간다는 것은 더욱더 훌륭하지 않은가. 사막의 오아시스 같던 그 행복을 원하지 않는 이별에 계속해서 빼앗기는 경험은 언제나 오랜만에 들이키는 독한 술의 첫 한 모금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만나는 모든 이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마음의 온도가 체온보다 살짝 낮다면, 떠나도 많이 슬프지 않으니까. 뉴욕의 복잡한 거리 풍경에 차분하게 섞인, 눈길을 사로잡지만 사진으로 남길 정도는 아닌 이름 모를 가로수 한그루가 되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난 이방인들이 모인 도시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내 방식대로 익숙해졌다. 


가로수의 삶은 지극히 자유로웠다. 그 자유는 이방인의 특권이자 소통의 결핍에서 초래되는 필연적인 외로움의 근거였다. 헤어짐이 싫어 멀리 하는 것. 아무도 믿지 않는 것. 입 안에 물면 금방 사라지는 달콤한 휘핑크림처럼 그 순간에만 유의미한 사랑을 고백하는 것. 우울의 화살 끝이 나를 향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작은 방패로 얼굴만 겨우 가리고는 다치지 않을 거라 안심하는 천진함. 




평온한 가로수의 일상도 오래가진 못했다. 유난히 고단한 일만 벌어지기 시작했다. 태풍이 심해 큰 가지가 몇 개 부러졌다. 근처에 다른 나무는 끔찍하게 허리가 꺾여 쓰러졌으니 크게 불평하기엔 눈치가 보였지만, 대책 없이 아픈 것을 참을 수가 없어 홀로 매일 울었다. 지나가는 강아지들은 늘 그렇듯 내 몸에 오줌을 갈겨대었고, 아이들은 나를 향해 영문모를 것들을 자꾸 던졌다. 쓰레기는 또 왜 그리 많이 버리고 가던지. 씹던 껌은 왜 나에게 붙이는지. 


가로수라 한들 여긴 무인도가 아니라 뉴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하늘의 친절한 충고일까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다. 치열하고 역동적인 도시. 정체된 가로수로 지루하게 지내는 것이 더 어려운 곳.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다. 뉴요커라면 모름지기 꿈꾸고 욕망해야 한다. 고통과 짜증, 권태가 나를 짓누른다 해도. 




답이 없었다. 아니, 기운이 없었다. 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욕망할 의지도, 무작정 도망갈 힘도 없었다. 이제 어쩌나 하며 바람이 잦아드는 방향으로 고개를 트는 순간이었다. 어린 길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와 정성스레 아픈 곳을 핥아주었다.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내 편이 나타났다. 혼자가 아니라는 깨달음은 용기가 되었다. 출혈이 멈춘 나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 정말로 오랜만에, 다시 한번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새벽의 타임스퀘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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