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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Oct 30. 2023

태양빛으로 물들 때면 (2)

늘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삶이 밀물처럼 몰아닥쳐 나를 밀어내려 한다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큰 불만이 있다거나 하진 않았다. 남의 일을 관조하듯 생각했을 뿐이다. '아, 나의 인생은 참 별 것 없고 조악하구나.'


화분에 담긴 난초처럼 가만히 제 자리에 있는 것 말고는 별 재주가 없다. 어떤 것도 재미가 없고 잘 해내지도 못한다. 주변에 사람도 없다.


인간은 무섭다.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어서 함께 있으면 불안하다. 웃어줄 땐 재미있고 행복하지만, 과연 언제 웃음이 그칠지 알 길이 없으니.  


금전적으로는 괜찮다. 큰 부자는 아니지만 먹고살 걱정을 하며 여생을 보낼 필요는 없다. 이런 말 하는 사람들 전부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운이 좋게도 투자에 빠르게 성공했다.


투자 공부에 매진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뭘 알고 해서 잘 된 것도 아니다. 누구나 뭐 하나쯤 잘 되는 일이 있다고 하지 않나.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잘 풀려서 소중함도 못 느낀다고들 하는 그런 것들.   


그래도 숨은 쉬고 살아 있으라는 하늘의 배려가 아닐까 생각했다. '쓸모없게 느껴지겠지만 그런 너도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어'라며 끈적해진 뺨을 한 번 쓸어주고 떠난 사려 깊은 손길을 기억하기에 그렇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내려 마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것도, 맛을 잘 구분하는 것도 아니었다. 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저 우아한 취향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고자 했다. 볼 사람도 없음에도.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상상 속에 지내는 것을 좋아한다. 지내던 아파트는 편리했지만, 지저분하고 심미적인 가치라곤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눈도 제대로 못 뜨는 내 모습은 아름답지 못하고 초라하다. 하지만 상상 속의 나는 늘 고급스러운 질감의 백색 파자마를 입고, 옛 유럽의 정취가 슬쩍 배어있는 현대적인 미국식 로프트에서 잠이 깨곤 했다.


얼굴은 전혀 붓지 않고 입술은 생기 있게 붉다. 천장이 높고 큰 창이 많은 집이라 나를 비추는 서정적인 햇살 조명이 만족스럽다. 완벽하게 세팅된 부엌에서 커피를 내려마신다. 모던한 터치의 깔끔한 플레이트에 귀여운 다과거리를 담아 곁들인다. 그 옆에는 물론 핸드폰이 아닌 책이 있다.


상상이 구현한 나의 아침은 훌륭했다. 실제로 마실 커피만 있다면 현실인 척하며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커피를 내리는 기계는 종류가 참 다양했다. 커피의 종류는 더욱 그랬다. 세상에 커피 전문가는 왜 그리 많은지,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참으로 시끄러웠다. 이 기계는 이래서 좋지만 무슨 기능이 아쉽고, 이 커피콩은 산미가 좋지만 뒷 맛이 어떻고 등등.


재주가 없으니 쉬운 일이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사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뭘 사도 제대로 조작해서 내려먹을 자신이 없었다. 기계 청소는 어떻게 해야 하나에 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다. 결국 집 근처의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커피나 카페 운영에 무지한 나였지만 네가 평범치 않다는 건 한 순간에 눈치챘다. 커피와 함께 구입한 케이크를 먹을 포크를 달라고 하자, 일회용 식기들이 가득 들어있는 통에서 포크를 꺼내어 한 번 정성스레 닦더니 냅킨에 곱게 싸서 건네주었다. 보통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는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카페였다. 볕이 잘 들고 화초가 많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식물로 가득한 식물원 같은 집을 꿈꾼 적이 있었지만 역시 관리할 자신이 없어 포기했었기에 더 각별하다. 이른 아침과 점심시간에는 무척 붐볐지만 그 외엔 한산하여, 오전 9시쯤 눈을 뜨는 내게 적합했다. 이곳으로 정했다.


카페에서 너를 다시 본 것은 일주일쯤 흐른 후였다. 내가 무엇을 마셨는지는 물론, 얼굴과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매니저급인 걸까? 일을 정말 잘하는구나.' 하며 감탄했다. 그리고는 우습게도, 그와 동시에, 목적도 이유도 없는 기대를 품은 자신을 발견했다. '혹시 나에게 관심이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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