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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Nov 14. 2023

태양빛으로 물들 때면 (4)

무슨 대화가 오고 갔을까. 책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 들킬까 봐 노심초사한 마음 반,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은 마음 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감추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네가 자리를 떠난 후부터, 질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그 잠깐의 대화를 복기해 보았지만 기억에 남는 유의미한 것이 없었다. 어쩐지 무척 신이 난 표정으로 책에 대해 이야기하던 코와 입 언저리만이 뚜렷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반쯤 깬 꿈의 잔상이었고, 너의 목소리는 수영장에 옅게 잠수한 채 듣는 오래된 성당의 종소리 같았다.


대화를 편안하게 나눌 수 있는 사이가 아님이 분명했다. 어색함 없이 친근하던 네가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오늘의 날씨나 어제 먹은 음식, 이상한 이웃과의 해프닝 따위를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나를 들키는 게 싫었다. 말하는 내용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지레 짐작할까 무서웠다. 내가 원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빚어낼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카페에 도착하면 먼저 유리외벽을 통해 네가 있는지 확인했다. 평소처럼 들어가 앉아있는데 네가 나에게 말을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우습게도 숨이 막히고 식은땀이 흘렀다. 


네가 있는지 무심하게 확인하고, 멀리에서 널 종종 흘끗 바라보기만 할 때가 좋았는데. 너는 어째서 나한테 말을 걸어 별 볼 일 없는 아침의 소소한 즐거움을 앗아가야만 했던 걸까? 논리라곤 없는 이기적인 마음이 영문조차 모를 널 원망했다.


창문 너머로 네가 보이는 날이면 집에 돌아가 커피 없는 아침을 보냈다. 주변에 다른 카페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싫었다. 마치 다른 가게에 눈을 돌리면 부도덕한 사람이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커피가 나의 망상 속 허영이 되기 전까지는 늘 집에서 아침을 맞았다. 그럼에도 다시 겪는 커피 없는 아침은 시간도 공기의 흐름도 멈춘 듯했다. 침대가 있는 작은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탁 트인 거실의 정직함이 부담스러웠기에.  


지저분하고 어두운 방 안, 암막 같은 커튼 사이로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내 허벅지에 닿았다. 따뜻했고, 슬퍼졌다. 집에서도, 거리에서도, 카페에서도, 난 언제나 혼자였다. 그런데 새삼, 집에 존재하는 유일한 생명체인 나의 존재를 느끼는 것이 외롭다 느꼈다. 외로운 적이 없었는데, 외로워졌다. 누구와도 이야기한 적 없었는데,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음에 이유 모를 박탈감을 느꼈다. 




그날도 역시 오전 9시에 일어나, 주섬주섬 나갈 준비를 마쳤다. 나갈 준비라고 해봐야 별 것 없다. 씻고, 적당히 편하고 헐렁한 옷을 주워 입는다. 핸드폰과 열쇠, 여전히 들고만 다닐 뿐인 네가 좋아하는 책을 챙겨 카페를 향한다. 도착하여 여느 때처럼 너의 출근 여부를 확인했다. Ok. 오늘은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신메뉴가 나와있었다. '스파이시 골든 오렌지 라테'라고 한다. 별 듣도 보도 못한 조합의 커피 메뉴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이 쯤되면 이제까지 안 만들어본 거라면 뭐든 다 만들고 보는 게 아닐까 싶다. 


신메뉴라면 호기심에 매 번 사 먹어 보던 시절도 있었지만, 대개 일반적인 라테의 맛이었다. 비슷비슷한 와중에 어떤 건 좀 달고, 어떤 건 좀 신 맛이 나고, 어떤 건 괴상하고. 더 이상은 속지 말자 생각하여 아메리카노를 고수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신메뉴에 자꾸 눈길이 갔다. 좋아하는 것들로 이루어진 이름이라 그랬을까. 매운 것도 좋고, 태양의 황금빛도 좋고, 오렌지도 좋아하고. 어차피 그저 그런 라테의 맛일 것을 알지만, 기분전환이 될 것 같았다. 좋아하는 단어들에 커피값을 쓰는 것으로. 




"스파이시 골든 오렌지 라테 나왔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 맞다, 라테. 내가 시켰었지.'


창가 테이블에 앉아 멍하니 핸드폰으로 캔디 크러시 게임에 빠져있었다. 주문하고 돈을 지불하는 행위로 어쩐지 의무를 다해버린 한 잔의 커피, 까맣게 잊었다. 청량한 레몬색의 커다란 커피용 머그컵을 내려다보았다. 


'어라, 색이 어떻게 이래.'


나를 집어삼킬 듯이 불타는 일몰의 색, 그 위로 태양을 상징하는 듯한 크림색 라테 아트가 그려져 있었다. 내리쬐는 햇살을 정통으로 맞아 금빛으로 섬세하게 반짝이는 모습이 동경하는 이의 나체마냥 아찔했다. 뚜렷하게 이글거리는 태양빛 라테. 해에 덮여버린 바다의 속을 알 수 없는 잔잔함. 아폴론의 탄생석을 녹인 모습이 이와 같지 않을까. 


나는 낭만에 빠져 허우적대기에는 역시 현실적이다. 그 빛깔에 압도된 채 생각했다.


"... 대체 얼마나 매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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