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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Nov 21. 2023

태양빛으로 물들 때면 (5)

좀처럼 입을 대기 힘든 음료였다. 토바스코 소스를 잔뜩 넣은 듯 매워 보이고, 도대체 맛이 어떨지 가늠하기 힘들었으니. 무엇보다도 귀한 아름다움을 망가트리기 싫었다. 온전히 그 모습 그대로 박제하여, 영원히 곁에 두고 보고 싶었다. 


계속해서 음료의 표면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있는 이곳이 현실인지 아니면 라테가 만든 심해 안에 현실이 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풍덩 뛰어든다면 저 컵 속으로 들어가 해를 삼킨 붉은 바다를 헤엄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상상에 즐거웠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임에도. 


눈치 없이 마음이 벅차오르는, 또 다른 나의 망상. 




고작해야 동네 카페의 라테 한 잔을 앞에 놓고 별 별 생각을 다 하는 자신이 또 불현듯 한심해졌다. 왜 그 바다를 헤엄치려고 하나? 마치 수영을 할 줄 아는 것처럼. 왜 그냥 마셔버리지 못하나? 언제부터 매운 걸 못 먹었다고. 언제부터 과연 커피의 아름다움을 평하는 미감이 있었다고. 


'마셔보자.' 


일단 마시면, 태양은 일그러지고 바다는 패일 것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아름다움을 잃어, 나중에는 그저 그렇게 꼬질한 설거지감이 될 뿐일 터였다. 내가 끝까지 마시든, 마시지 않든. 


인간과 닮았다. 사랑을 닮았다. 마음이 싹 터 바라보고 있을 때 가장 고귀하고 아름답다. 동경하고 갈망하는 그 마음은 상대를 향해 몸을 튼 채 박제된다. 닿지 못해 안타까워도, 멀어서 서글퍼도, 영원히 고귀하다. 


감히 손을 뻗어 연결 짓는 순간부터 관계의 시간이 흐른다. 그 시간의 끝에는 그 어떤 마음이라도 설거지감이 되어 버린다. 무엇도 처음 같지 않고, 영원을 꿈꾸는 것은 나의 망상만큼이나 속절없다. 


알면서도, 인간은 관계를 맺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반복하다 보면 설거지가 능숙해지나 보다. 나는 설거지에도 영 재주가 없어서 인간이 싫은가 보다. 




망설임은 계속되었다. 그토록 나는 매료되었다. 그리고 너는 또 예상치 못하게, 마침 그 순간 또 내 앞에 나타났다. 햇살이 강렬하게 밀려들어오는 큰 창을 등진 채, 어김없이 금빛으로 반짝거리며.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순간에 대처하는 것에 서투르다. 게다가 그토록 피해 다니던 네가 아닌가.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자연스러울 타이밍은 놓치고 말았다. 이제는 무슨 말을 꺼내도 어색함이 드러날 터였다. 


이를 어떡하나 - 긴장감만은 들키지 않겠노라 애를 쓰며 너와 눈을 맞춘 채, 대처할 방법을 고민했다. 고작 몇 초의 시간에 밀물이 들어 영겁 같았다. 너의 목소리가 화살이 되어 바다를 갈랐다. 


"오늘 원래 오는 날인데, 일이 좀 생겨서 지각했어요." 


"....?" 


"놀랐죠, 미안해요. 그런데 여기 지금 계실 줄은 저도 몰랐어요." 


슬픔이라고는 모르는 강아지처럼 맑고 큰 눈이다. 예의 바르면서도 친근하게 내 눈을 바라본다. 너는 내가 무슨 생각인지 알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알린 적도, 들킨 적도 없었는데. 




"새로 나온 메뉴 시켰네요?" 


너는 계속해서 편안한 어조로 내게 말을 붙였다. 신기했다. 말하지 않아도 생각을 읽어내는 사람이 있다니. 어쩐지 조금 편안해졌다. 나의 본모습이 어떻게 여겨질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바짝 수축되었던 마음이 풀어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이 사람은 나를 이해했다- 심지어 내가 아무 노력도 할 필요가 없었다. 


"아, 네... 궁금해서 시켜봤는데 너무 예뻐서 마시기가 곤란해요."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인 대응을 하려면 거짓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 너무 맛있을 것 같더라고요!" 같은. 왜냐하면 내가 하고 있는 진짜 생각 같은 것에 남들은 관심이 없으니까. 그들이 듣고 싶을 말을 해주는 편이 호감을 살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네 눈에 대고 진실을 말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나는 어쩐지 잘 알지도 못하는 너의 손바닥 위에 올라선 채 오갈 곳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부담 갖지 말고 마셔봐요. 생각보다 안 매워요.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


얼마나 매운 지 궁금해한 것까지 들킨 걸까? 아니면 다른 손님들이 자주 물었던 걸까? 어느 쪽이든지 관계없었다. 너의 손바닥 위에 서 있던 나는 무심코 앉았고, 너는 가볍게 나를 감싸 쥐었다.  




인간은 돌이킬 수 없지만, 라테는 혹여라도 그리우면 다음에 또 사 마시면 된다. 그러니 이왕 해하여 없애야 한다면 아름다움과 따스함이 여전한 지금, 더욱이 너와 함께인 흔치 않은 순간이 이롭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그 어디에도 논리라고는 없었다. 나 자신을 납득시켜야 할 궤변이 필요했을 뿐이다. 네가 권하는 대로 하고 싶었을 뿐이다. 두 손으로 컵을 들고 조심스레 한 모금을 들이켰다. 


우유의 친절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혀를 타고 들어와 입 안을 어루만지며 나의 언어를 봉인했다. 혀 끝을 깨물 듯 살짝 씁쓸한 에스프레소의 흔적이 완벽했다. 코로 숨을 들이쉬니 캘리포니아 광활한 농장, 갓 딴 수백 개의 오렌지에 파묻혀 있는 자연 그대로의 나를 보았다. 그 느닷없는 싱그러운 향에 휘감겨 정신이 혼미해질 찰나, 묵직하고 강렬한 신미가 목구멍 깊숙이 치고 들어왔다. 파도가 거친 붉은 바다에서 금빛의 재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지저분한 내 방에서 함께 눈을 떴다. 아침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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