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브랜드에게 필요한 것은 차별화된 경험입니다.
이번 한국 방문 기간, 두 개의 클래식 공연 초대권을 받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야프 판 츠베덴이 지휘하고 토마스 햄슨이 노래하는 서울 시향의 공연이었고, 다른 하나는 박지훈 지휘자가 이끄는 E&F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하 E&F)와 합창단의 지브리 콘서트였습니다.
클래식을 보고 듣는 것을 좋아하지만, 저는 어디까지나 브랜딩 전문가이지 클래식 전문가는 아닙니다. 아는 것과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공연을 해석하고 즐기게 되다 보니, 결국 둘을 각각 브랜드로 생각하여 비교하게 되더군요.
두 공연 모두 클래식이라는 장르를 대하는 진지한 자세와 열의가 있었고, 교향악단과 솔리스트의 협연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조금도 닮지 않은, 다른 브랜드였습니다.
서울 시향은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교향악단입니다.
E&F는 이번 지브리 콘서트가 첫 연주회였습니다.
서울 시향의 연주자들은 서울 시향이 직장이기에 늘 근로기준법에 맞춰 함께 연습합니다.
E&F는 다양한 배경의 연주자들이 공연 날짜에 근접하여 섭외되었습니다.
서울 시향은 뉴욕과 홍콩 필하모닉에서 활약 중인 얍 판 츠베덴 음악감독이 지휘를 맡습니다.
E&F는 악단이 속한 회사의 대표이기도 한 박지훈 대표가 지휘를 맡습니다.
서울 시향은 모차르트, 말러, 드보르자크의 전통적인 클래식 악곡을 연주합니다.
E&F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지브리 애니메이션 OST 명곡들을 연주합니다.
서울 시향은 미국 유명 바리톤인 토마스 햄슨과 정갈한 협연을 합니다.
E&F는 합창단, 피아노, 색소폰, 김순영 소프라노, 극 연출 어린이들.. 거기에 심지어 이웃집 토토로까지 함께합니다.
서울 시향의 공연은 정제된 우아함, 조용한 정통 클래식의 권위가 느껴집니다.
E&F의 공연은 참여형 공연으로서, 오락적 요소들로 관객들의 참여를 유도합니다.
서울 시향의 얍 판 츠베덴은 공연 중간 간결하고 예의 바르게 영어로 감사 인사를 합니다.
E&F는 박지훈 대표가 지휘와 동시에 사회를 보고, 관객의 참여와 몰입을 돕는 스토리텔링을 주도합니다.
서울 시향은 정해진 곡을 모두 연주한 후 공연을 끝냅니다.
E&F는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관객과 어우러지는 깜짝 앵콜을 두 곡 합니다.
서울 시향의 브랜드가 보수적인 역사와 전통, 퀄리티에 대한 신뢰와 프리미엄을 내세워 클래식 팬들을 매료시킨다면, E&F의 브랜드는 개방적인 실험 정신과 대중성, 기발한 연출과 구성으로 대중을 몰입시킵니다.
저는 두 브랜드가 모두 좋습니다. 전혀 다른 매력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 같은 중립보다는, 분명 둘 중 한쪽에 치우친 팬과 안티팬이 더 강하게 존재할 것입니다. 타겟층이 전혀 다르고 대비되는 특징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두 브랜드는 클래식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각자 중요한 존재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신생 악단인 E&F가 서울 시향을 따라하려 했다면 경쟁력 있는 브랜드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클래식을 사랑하는 관객들이 어째서 이미 실력과 경력, 팀워크로 잘 알려진 대표 교향악단인 서울 시향이 아닌 새로운 무명의 악단을 선택해야 하는지 설득하기 어려우니까요.
그러나 E&F는 ‘관객 참여형 콘서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클래식 공연의 틀을 벗어나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전통을 중시하는 브랜드인 서울 시향에겐 E&F처럼 현대적인 아이디어를 접목시키며 공연의 틀을 깨부수는 일이 어렵습니다. 그렇게 E&F는 틈새를 파고 들어 클래식을 어려워하는 대중들과 아이들에게 다가갑니다.
니치 마케팅(Niche marketing)이라는 용어 한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자신의 브랜드만의 특별한 전문 분야, 틈새 시장을 찾아 공략하는 전법이죠.
브랜드 니치가 필요하다 vs 필요 없다로 많은 논쟁이 벌어지곤 합니다.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니치를 ‘전문 분야’라는 의미로 특정하여 니치가 필요 없다는 주장을 하기 때문인데, 니치의 기본이 브랜드의 전문 분야에 차별성을 부여하는 것임을 놓치면 해석에 혼선을 빚게 됩니다.
브랜드에게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차별화입니다. 그러니 니치를 찾는 것은 필수입니다. 단지, 하나의 브랜드가 다루는 전문 분야가 반드시 하나일 필요가 없을 뿐입니다.
E&F가 참여형 콘서트라는 니치 공연을 구성하여 저에게 다소 파격적이고 흥미로운 경험을 제공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그냥 또 하나의 영화 음악 공연을 즐긴 것일 뿐 악단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브랜드의 니치는...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