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의혹의 그림자] 리뷰
개봉: 1943년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
출연: 테레사 라이트(찰리 뉴튼), 조셉 코튼(삼촌 찰리 오클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의혹의 그림자]는 자신의 이름과 동일한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로 삼촌과 특별한 연결고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찰리가, 삼촌의 행동에 의심을 갖게 되고 비밀을 파헤쳐 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작은 의심의 씨앗에서부터 시작되어 점점 의혹의 그림자가 커져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결정적인 장면 중 하나인 도서관 씬에서, 신문기사를 통해서 삼촌이 은폐하려고 하는 진실이 무엇인지 확인하게 된 찰리의 그림자가 점점 커져가는 모습은 그녀의 마음속 의혹을 시각화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내가 주목했던 부분은 영화 초반의 삼촌 찰리가 뉴튼 가족을 방문하기 이전의 장면들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는 한 남자(찰리 오클리)와 함께 쓰레기처럼 아무렇게나 버려진, 그 가치를 부정당한 듯한 돈이 보인다. 그는 특별한 이유 없이 물잔을 세면대로 던져서 깨트리며 화를 내고, 누군지 알 수 없는 두 남자에게 미행을 당하며 급히 전보를 친다. 아픈 곳이 없음에도 환자인 양 타인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다리를 절뚝이면서 기차에서 내렸으나, 자신을 마중 나온 찰리를 본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의기양양하고 여유 있는 삼촌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뉴튼 가족에게는 공유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삼촌 찰리 오클리에 대한 의혹은 조카 찰리 뉴튼 보다는 우리에게 먼저 도착한다.
찰리가 삼촌에 대한 의심을 키워가기 이전에 우리는 이미 그의 수상함을 알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따라서 영화 초반의 장면으로 인해 우리는 삼촌 찰리가 은폐한 진실이 드러나기도 전부터 의혹을 담은 시선을 가지고 영화를 볼 수밖에 없으며, 그로 인해 이 영화 속 가장 큰 ‘의혹의 그림자’는 바로 관객들의 시선이 될 수 있다. 영화 전체를 덮고 있는 것이 바로 영화 첫 장면을 통해 발생하는 ‘의혹의 그림자’인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삼촌 찰리를 향한 ‘의혹’은 우리에게 먼저 도달하였으며, 뉴튼 가족에게는 의도적으로 지연된다. 영화 속에서 진실이 지연되는 순간들은 또 있다. 삼촌 찰리가 보낸 전보는 집에 누워서 공상하던 조카 찰리가 전화를 받지 않는 바람에 늦게 도착했다. 우리는 이미 그 전보의 내용을 알고 있고, 조카 찰리가 삼촌의 방문을 기대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진실이 도달하는 순간을 기다리게 된다. 찰리는 결국 삼촌에게 방문해 달라는 전보를 보내러 가서야 그 내용을 확인하게 되고, 그들의 마음은 마치 쌍둥이의 텔레파시처럼 통한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일부러 지연된 전보는 삼촌과 조카를 더욱 특별한 관계로 묶는 계기가 된다. 영화 중반부까지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이 조카 찰리에게 어떻게 도달하는지를 반복해서 보게 된다. 이렇게 어떤 사건이 발생할지 사전에 정보를 알고 이를 예측하던 우리가 더 이상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은, 찰리가 도서관으로 진실을 확인하러 가는 여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진실을 확인하려는 찰리의 앞길을 막는 듯한 사건들(교통경찰, 양방향에서 무질서하게 다가와서 앞길을 막는 자동차)은 마치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찰리의 마음처럼 보이기도 하며,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을 마지막까지 지연시키는 히치콕의 전략으로 보이기도 한다.
마침내 진실이 밝혀진 순간은 우리와 찰리가 동등한 시선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즉, 도서관에서 신문 기사를 통해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은 우리가 기다려왔던 결론에 도달하여 답답함이 해소된 순간이면서 이제부터는 관객들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에서, 찰리와 우리는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된다. 모든 사실을 알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면서 지켜보던 상황에서 벗어나 이제는 다음 순간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긴장감으로 찰리를 지켜보게 된다. 삼촌은 계속해서 사고로 위장하여 찰리를 죽이려는 시도를 하는데 서로를 믿고 사랑하던 과거가 무색하도록 그의 노력은 꾸준하고 열심이다.
영화 속 삼촌과 조카의 관계는 그들의 말처럼 마치 ‘쌍둥이’ 같다. 그들은 둘 다 침대에 누운 자세로 처음 화면에 등장하며, 세상을 향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시선도 유사한 지점이 있다. 삼촌은 남편이 사망하고 홀로 된 과부들을 ‘돼지’로 비하하면서 그녀들을 죽이고 빼앗은 돈으로 사업가인양 행세하였으며, 조카는 그들의 가족이 풍비박산 났다며 비난하지만, 그저 침대에 누워서 아버지의 돈과 어머니의 노동으로 편안하게 생활하고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 못 할 고민을 각자 가지고 있는 것과 그 비밀은 둘 사이에서만 공유된다는 점도 유사하다. 심지어 찰리의 방에서 삼촌 찰리가 지내게 되는 설정은 동일한 공간을 공유하게 되는 둘의 관계를 나타낸다. 앞문과 대응되는 뒷문이 있는 집의 구조도 그렇다.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대응되는 문을 통해서 그들의 심리 상태를 드러낸다. 아무런 의심이 없는 상황에서는 앞문을 통해서 방으로 들어가지만 의심과 비밀이 생긴 뒤에는 뒷문을 이용하게 된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와 함께 영화 속에서 다양한 의혹의 순간들을 그림자로 표현한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앞서 언급했던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침대에 누워있는 찰리의 얼굴 위로 창밖의 나무 그림자가 어른 거린다. 관객들이 찰리에게 가지게 될 의혹을 그림자로 표현한 장면이다. 하숙집 주인아주머니는 창문의 커튼을 내려 찰리의 얼굴을 완전히 그림자로 덮이게 만든다. 도서관에서 조카 찰리가 삼촌의 비밀을 확인 한 순간에 도서관 벽에 드러나는 그림자는 대표적인 ‘의혹의 그림자’이다. 마지막 의혹의 그림자는 삼촌 찰리의 마음에 깃들게 된다. 찰리는 그와 함께 뒤를 쫓기던 또 한 명의 용의자가 사망하면서 사건에 대한 조사가 종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에 2층으로 가는 계단을 뛰어 올라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엇인가 알아챈 듯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다. 이때 현관 앞에 서 있던 조카 찰리의 그림자는 계단 위에 있는 그를 향해 길게 드리워진다. 이 순간의 의혹은 삼촌이 느꼈던 안전에 대한 의혹이다. 조카 찰리가 사실을 알고 있는 한 자신은 아직 안전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느끼게 되는 순간인 것이다.
관객이 가지게 되는 의혹, 조카가 삼촌에 대해 가지게 되는 의혹, 삼촌이 조카에게 가지는 의혹들이 맞물리며 재미있는 영화적 경험을 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