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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Dec 04. 2022

행복은 샴페인 속 기포에

 어쩌면 보통날 6


* 이 글은 짧은 버전으로 브릭스 매거진 / 신한 플레이 앱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



와인에 빠지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멋있어 보였으니까. 소주나 맥주보다 근사한 어른의 술 같았으니까. 일반 마트에서 살 수 있는 저렴한 와인으로 시작해 선호하는 품종이 생긴 지금까지 나는 종종 와인 중에 어떤 걸 제일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고, 그럴 때마다 망설임 없이 답한다. "샴페인이요." 어떤 날을 기념하고 싶거나 즐겁고 싶을 때 무얼 하면 좋겠냐는 질문에도 마찬가지다. "샴페인 하세요!('드세요'가 아니라 '하세요'다)" 


입구가 좁은 튤립형 잔에 샴페인을 따르면 기포가 촤르르한 소리를 내며 보글보글 올라오고 황금빛으로 출렁인다. 그때 한 번. 훅 퍼지는 빵 냄새를 음미하다 한 모금 마시면 입 안에서 기포가 자잘하게 터지며 식도로 까끌하게 넘어간다. 그때 다시 한번. 비주얼에서부터 맛과 향까지 삼위일체다. 게다가 이름도 샴페인이다. 어쩜 이름도 샴페인.


어떤 여행은 우연에서 시작된다. 소담한 골목길을 2층 테라스 창문에서 찍은 사진 한 장으로 리스본 여행을 계획하거나,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제목만으로 프라하 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는 것. 그리고 그 우연한 여행을 다녀온 게 나라면, 샴페인 하우스가 직접 운영하는 호텔에 대한 짧은 글 하나로 샹파뉴 여행을 계획한 건 필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맡고 있는 중요한 업무가 마무리되고 내 생일이 있는 11월에 맞춰 2주 간의 휴가를 준비했다. 일단 도착지는 파리. 근교 도시들은 당일치기로 짧게 다녀오기로 하고 생일에 맞춰 샹파뉴 지역에서의 2박 3일 일정을 짰다. 우리가 흔히 샴페인이라고 부르는 와인은 프랑스 샹파뉴 지역에서 만든 스파클링 와인이다. 프랑스 내에서도 샹파뉴 지역이 아닌 곳에서 생산되는 스파클링 와인에는 샴페인이란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샴페인이란 이름 자체가 프랑스 샹파뉴(Champagne)를 영어로 읽은 것. 이 샹파뉴 지역 중 대표적인 도시인 랭스와 에페르네를 주요 여행 도시로 결정했고, 오래전부터 즐겨찾기에 넣어두었던 아비제의 자크 셀로스 호텔을 마지막 종착지로 결정했다. 방문하고 싶은 샴페인 하우스의 투어는 시간과 인원이 한정되어 있어 일찌감치 예약도 마쳤다. 생일에 샴페인을 샹파뉴에서 마음껏 마실 거야 라는 목적에 이만하면 충분히 부합하겠지 


여행사 깃발 아래 뭉친 단체 여행객들로 만석이었던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파리. 5년 만이다. 그새 새로 생긴 미술관들을 찾았고, 스트라스부르 당일치기와 디즈니랜드 싱글 라이더 즐기기를 마친 뒤 샹파뉴 이동을 위해 짐을 꾸렸다. SNCF 앱에서 미리 예약해 둔 기차 시간을 확인하고 여유 있게 파리 동역으로 향했다. 부지런히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파리지앵들 사이에서 더블 에스프레소에 크로와상으로 아침을 챙겨 먹고 랭스행 탑승 플랫폼을 확인해 기차에 올라탔다. 파리에서 랭스까지는 테제베(TGV)로 40분이면 닿는 가까운 곳이다.


랭스는 역에서부터 도심, 주요 와이너리까지 모두 걸어 다닐 수 있는 작은 도시다. 단선으로 1시간이면 원하는 목적지에 모두 닿을 수 있는 곳. 랭스 대성당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뷰에 반해 예약한 호텔에 먼저 짐부터 맡겨둔 뒤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비가 오락가락해 시리게 춥던 파리보다 따뜻한 편이라 한결 좋다. 첫 목적지는 눈앞의 랭스 대성당. 9세기부터 프랑스 국왕의 대관식이 거행되어온 곳(이런 만큼 이곳의 샴페인이 왕실과 귀족, 유명 인사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으로 화려한 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유독 프랑스 북부 지역에서 발달했다는 스테인드 글라스. 누구나에게 열린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색색깔의 유리를 투영한 채광이 어두운 내부를 군데군데 성스럽게 비추고 있다. 누군가가 밝혀놓은 소망의 촛불들과 기도하는 사람과 성당의 역사를 읽고 있는 관람객들. 성당 제단의 정면 뒤편엔 샤갈이 제작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자리하고 있었고, 짙푸른 배경색에 무게감 없는 형태의 인물들이 비현실적으로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세 개의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종교가 없는 나지만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십분 이해되었다.


샴페인의 도시에 있는 동안 내가 할 일은 그저 매끼 샴페인을 마시는 것. 점심엔 로랑 페리에 하프 보틀을 곁들여 에스까르고에 스테이크를 먹고 오후 2시에 예약해 둔 뵈브 클리코 와이너리를 향해 걸었다. 적당히 마신 샴페인과 편안하게 신은 로퍼, 걷고자 하는 마음. 랭스가 단박에 마음에 들었다.


노란 간판에 익숙하게 쓰인 글자, 뵈브 클리코.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더니 투어를 함께 할 사람들이 대기실에 모여 있었다. 오늘의 투어를 담당할 직원이 뒤이어 나타났고, 일행당 하나씩 설명에 맞춰 시각적 자료를 확인할 수 있는 태블릿 PC를 전해 받았다. 축축하고 서늘한 깊은 동굴 아래로 아래로. 한참을 걸어 내려오니 익숙한 와인 병들의 무더기가 보였다. 뵈브 클리코는 샴페인 제조 공정에서 만들어지는 찌꺼기를 제거하는 방법을 창조해 침전물이 없는 맑은 샴페인을 만들어낸 곳이다. '뵈브'는 불어로 '미망인'이라는 뜻. 작황이 좋은 해에만 만드는 빈티지 샴페인도, 블랜딩 로제 샴페인도 최초로 선보인 사람이 여성, 클리코였다. 그간 와인 책을 보며 익혀왔던 터라 샴페인 제조 공정부터 뵈브 클리코 역사 설명까지 1시간 가량의 영어 투어 내용이 술술 들어왔다. 예습과 복습의 현장. 투어의 마지막은 테이스팅 룸에서 진행되는 시음. 오늘 시음한 와인은 2015 빈티지였다. 작고 섬세하게 터지는 버블과 입 안을 구르는 다정한 맛. 최근 가격 대비 맛이 아쉽다고 느꼈었는데 이런 맛이었나. 이래서 이곳까지 온 거다. 오늘 저녁에 바로 마실 엔트리 샴페인을 구입해서 나오는 것으로 투어를 마쳤다. 


랭스에는 뵈브 클리코 외에도 크룩, 루이 로드레, 포므리, 루이나르, 찰스하이직, 드라피에, 멈 등 유명한 샴페인 하우스가 모여 있다. 뵈브 클리코처럼 투어가 활성화된 곳도 있지만 대부분 생산에만 집중하고 있는 곳들이 많아 랭스 북쪽과 남쪽에 무리 지어 나뉘어 있는 각 샴페인 하우스들을 성지순례 하듯 돌았다. 한 병에 수십만 원씩 하는 와인들이 나오는 곳. 샴페인 라벨에 적힌 생산지 'Reims'가 바로 여기다. 나를 살찌우고 내 통장을 텅장 만든 도시에 직접 와 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도시. 어둠이 내릴 때까지 구석구석 돌아다니다 호텔로 돌아왔다. 랭스 대성당이 보이는 쪽으로 소파와 테이블을 옮겨놓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뵈브 클리코를 꺼내왔다. 샴페인의 도시에 와 있다는 게 실감나는 아주 사소한 디테일. 호텔 방에 기본으로 구비되어 있는 와인잔이 샴페인 잔이다. 이토록 샴페인에 진심이라니. 이불을 외투처럼 덮고 창문을 열였다. 불 켜진 랭스 대성당을 보며 이 도시에 듣고 싶어 선곡해 온 윤상의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틀었다. 한국 시간으론 어느덧 생일 당일. Happy birthday to me. 내가 나한테 이 도시를 선물한다. 


푹 자고 일어난 아침. 목폴라 하나에 레더 재킷을 입으니 기온이 딱이다. 하늘이 깨끗하게 맑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혼자 여행하며 느는 건 셀프 카메라 찍는 스킬. 건물 사이에 비쭉 나온 턱이 보이면 핸드폰을 올려놓고 타이머로 사진을 찍었다. 누군가가 찍어주는 사진보다 한결 자연스러운 표정이 남았다.


투어 예약 시간인 10시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더니 문이 잠겨 있던 곳. 정확히 10시가 될 때 문을 열어주는 프렌치적인 포므리는 투어를 위해 두 번째로 방문한 샴페인 하우스다. 포므리 역시 남편이 죽고 난 뒤 가업을 이어받아 유명 샴페인 브랜드로 키워낸 곳이다. 포므리가 특히 샴페인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가진 점은 당분을 대폭 줄인 달지 않은 브뤼(Brut) 샴페인을 만들어낸 곳이기 때문. 우리가 아는 샴페인의 맛, 샴페인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어낸 여성이 포므리다. 


포므리는 다른 샴페인 하우스 투어와 달리 현대 미술을 관람하는 형태로 지하 셀러를 개방하고 있었다. 생전에 예술을 사랑하고 후원하는데 아낌이 없었던 루이스 포므리 여사를 기리기 위해 2003년부터 <익스피리언스 포므리Experience Pommery>란 현대미술 전시를 개최하고 있다. 포므리 앱을 다운 받아 전시 설명을 들으며 셀러를 셀프로 관람하는 형태. 카타르 월드컵 개최 기념으로 공공예술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한 최정화 작가의 Fruit Tree 작품 앞에서 제일 오랜 시간을 보내고 종종걸음을 옮겼다. 제일 첫 타임에 제일 첫 관람객으로 들어온 지하 동굴은 으스스한 기분을 들게 해 사실 다른 작품들을 오래 들여다보지 못하게 했다. 대신 관람 후 포므리 한 잔 시음하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을 보냈지만. 


미슐랭 빕그루망에 선정된 le jardin에서 먹는 점심. 나이가 지긋한 점원이 추천한 샴페인을 한 잔 마신 뒤 주변을 둘러봤다. 미국 가족과 프랑스 가족이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메뉴를 받아 들면서부터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대화를 하고 있는 프랑스 가족과 핸드폰을 보고 있는 미국 가족의 다름이 재밌다. 프랑스에서는 저녁 식사를 보통 7시 이후부터 2시간을 기본으로 하는데, 그러면서도 날씬함을 유지하는 게 저 끊임없는 대화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4코스로 진행된 식사를 마친 뒤 또 투어를 위해 찾은 곳은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서 주인공들이 마시던 샴페인, 떼땅져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군 지휘 본부가 샹파뉴 지역의 한 건물이었던 샤토 드 라 마르케테리(Chateau de la Marquetterie)에 설치되었고 피에르 떼땅져는 부관으로 이곳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곳의 아름다움에 반했던 떼땅져는 전쟁이 끝난 뒤 샹파뉴로 돌아와 지휘 본부를 설치했던 이 건물을 구입했고 샴페인 하우스도 함께 매입했다. 샤르도네 품종 비율이 높아 우아한 맛이 강점인 떼땅져의 역사의 시작이었다. 


약 10분간 떼땅져를 설명하는 영상을 먼저 보고 시작하는 투어. 본인들의 샴페인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만큼 우리 샴페인을 마시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고, 멋진 일인지, 그걸 얼마나 마케팅해 왔는지를 동등한 비율로 설명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18미터 지하에 자리하고 있는 셀러로 들어가자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며 투어를 포기한 사람이 나왔다. 동굴 벽을 만져보자 축축함이 느껴졌고, 습기를 잘 머금는 백악질 토양의 특성 때문에 1년 내내 최적의 온도와 습도가 유지된다는 설명이 따라왔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샴페인 모양이 꽁뜨(Comtes)였다. 한 병에 수 십만 원을 호가하는 와인들. 마시지 못하는 대신 눈으로 가득 담았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출시될 꽁뜨 와인들. 와인의 시간은 인간과 다르게 흐른다. 


역시 시음까지 마친 뒤 떼땅져를 나섰다. 주기적으로 샴페인을 마시니 몸이 따뜻하게 데워진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지나갈 때마다 현지인들이 꼭 빵을 사고 있는 빵집이 있길래 홀린 듯 들어갔다. 생일 케이크를 대신할 작은 딸기 타르트와 바게트를 샀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불어, 윈느 바게트 실부쁠레(Une baguette s'll vous plait, 바게트 하나 주세요)를 드디어 썼고, 나이 지긋한 점원이 최고라며 치켜세워줬다. 현지인들처럼 긴 바게트를 옆구리에 끼고 40유로가 되지 않아 '어머 이건 사야 해'한 샴페인 폴 로저 한 병을 샀다. 이 가격이면 매일매일 샴페인 마시며 살 수 있겠구나. 아직 이곳 시간으론 생일이 지나지 않았으니 그 핑계로 다시 치얼스.


랭스에서의 2박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오전 일찍 동네를 산책하고, 친절한 직원이 있는 카페에서 더블 에스프레소로 정신을 깨운 뒤 랭스 역으로 이동했다. 다음 목적지는 샴페인의 수도, 에페르네. 랭스에서 에페르네까지는 완행 기차로 30분이 걸리는 아주 가까운 곳이다.


에페르네에선 점심을 먹고 샴페인 투어 1곳만 잠깐 할 예정이라 단기간 캐리어를 맡길 수 있는 내니백(Nannybag) 서비스를 예약했다. 주소로는 호텔이었지만 실제로는 에어비앤비를 운영하는 곳이었다.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에페르네에 온 목적을 물어 모엣 샹동을 말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길 오는 대부분이 모엣 샹동을 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근처 대형 마트와 경찰서 위치, 주요 관광지의 위치를 알려주며 혹시 예약한 시간보다 빠르거나 늦을 경우엔 꼭 연락을 달라며, 바깥으로 나와 배웅을 해주었다. 랭스는 에페르네에 비하면 아주 대도시다. 에페르네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샴페인 대로(Avenue de Champagne)를 기점으로 관광객이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다. 반나절이면 구석구석을 볼 수 있을 정도. 지도로 방향만 가늠하고 일단 점심을 예약한 식당으로 향했다.


랭스의 길(Rue de Reims)이라는 작은 거리엔 레스토랑이 몇 곳 있는데, 그 몇 곳이 대부분 미슐랭 별을 받은 레스토랑 혹은 미슐랭에서 추천한 레스토랑이었다. 이중 내가 선택한 곳은 Symboise. 로제 샴페인 한 잔에 스타터와 메인으로 이루어진 코스를 주문했다. 24유로라는 합리적인 가격에 아뮤즈 부쉬와 곁들일 바게트도 함께 나왔다. 단호박 버섯 수프에 생선요리까지, 이번 여행 중 단언컨대 제일 맛있는 곳 중 하나였다. 12시에 예약을 해서 식사를 했는데 식사를 마쳐갈 때까지 손님이 없어 '이 맛있는 식당이 없어지면 안 되는데'란 생각을 할 즈음 예약 손님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보다 식사 시간이 훨씬 늦은 곳이란 걸 잠깐 망각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시 에페르네를 찾았을 때 이곳이 꼭 건재하고 있었으면. 그래서 다른 메뉴를 먹어볼 수 있었으면. 


모엣 샹동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모엣 샹동 ; 매 초마다 세계 어딘가에서 Moët & Chandon 병의 코르크가 터집니다.' 와인을, 샴페인을 잘 몰라도 모엣 샹동이나 돔 페리뇽은 어디에선가 들어봤을 것이다. 샹파뉴에서 가장 큰 지하 와인 셀러를 자랑하는 만큼 일단 샴페인 하우스의 규모부터 남달랐다. 보이는 건물만 몇 채. 돔 페리뇽 수도사의 동상이 있는 입구로 들어가 예약 확인을 마친 뒤 투어 시간을 기다렸다. 


LVMH(Louis Vuitton, Moët & Chandon, Hennessy)소속답게 루이뷔통 가방을 크로스로 멘 직원이 안내를 시작했다. 샴페인 병에 라벨을 부착하는 시스템을 도입해 샴페인 병의 시각적 통일성을 도모하고, 브랜드와 관련된 형태와 색상, 디자인 등에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한 곳이 모엣 샹동이라고 한다. 샹파뉴 지역적 특징부터 소유 중인 포도밭의 규모, 포도 수확에서 1,2차 발효 과정 설명까지. 샴페인 투어는 모엣 샹동이 가장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영어로 투어가 진행되는 내내 설명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영어를 들은 게 아니라 샴페인을 들었기 때문이다. 


테이스팅도 그냥 샴페인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전문 소믈리에가 샴페인 마시는 방법에 곁들이면 좋은 음식들을 설명해주어 특히 샴페인을 잘 몰라도 충분히 즐길만할 것 같았다. 샴페인은 귀로도 즐길 수 있다며 잔을 귀에 가까이 대보라 하자 정말 파도가 넘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맛보단 브랜드 이름으로 마시는 와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모엣 샹동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섬세한 맛이 느껴졌다. 이번 샹파뉴 여행 동안 모엣 샹동을 포함해 총 네 곳의 샴페인 하우스 투어를 했고, 시음한 각 와인들이 뵈브 클리코를 제외하곤 모두 기본 엔트리 와인들이었는데 평소 내가 집이나 식당에서 먹는 것과 같은 와인이라고 믿을 수 없는 맛들을 느꼈다. 생산된 곳에서, 가장 알맞은 온도로 보관하여,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오픈하면 이런 맛이었다. 이래서 생산지에 오는 것이다. 


세계에서 제일 비싼 거리로 일컬어지는 샴페인 대로(Avenue de champagne)를 걸었다. 초입의 모엣 샹동을 시작으로 페리에 주에, 폴 로저, 베르제르, 메르시에 등의 샴페인 하우스가 이 길에 자리 잡고 있다. 샴페인 하우스 저택들 사이로 저 멀리 포도밭을 품은 얕은 산들이 보인다. 몸을 따뜻하게 데운 샴페인 덕에 부스터를 단 듯 골목을 쉴 새 없이 걸어 다녔다. 이제 이 샹파뉴 여행의 최종 목적지로 출발할 시간. 픽업 시간에 맞춰 캐리어를 찾으러 갔다. 다시 만난 직원이 이제 파리로 가냐고 묻자 아비제로 가 1박을 한다고 했더니 여기 사람들이 좋은 샴페인을 마시러 가는 곳이 아비제라고, 그랑 크뤼 와인을 생산하는 좋은 곳이라며 모엣 샹동을 간다고 했을 때 보여줬던 얼굴과 다른 얼굴을 했다. 작은 도시라 이동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전날 미리 예약해 둔 우버를 기다리겠다고 하자, 집 문을 걸어 잠그고 나가는 그와 인사를 나눴다. 본 쥬흐네(Bonne journée), 좋은 하루 보내.


우버 기사와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족히 30분은 흐른 시간. 조금만 더 기다려볼까 하는데 에페르네 시내로 들어온 차는 한참을 헤매며 나와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오후 5시가 되면 어두워지는 동네. 이러다 더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아 페널티 금액을 물고 우버를 취소한 뒤 역으로 이동했다. 우버만 기다리고 있었던 게 허무하게도 빈 택시가 여럿 대기 중이었다. 카드 결제 가능 여부를 확인하고 목적지를 말하자 주소를 입력하지도 않고 바로 출발했다. 금세 어둠이 짙게 내린 도시. 에페르네 중심을 벗어나자 가로등이 띄엄띄엄있어 창 밖은 온통 짙은 회색. 스쳐 지나는 어둔 그림자들이 모두 포도밭이다.  


간판 하나 제대로 없는 작은 동네에 들어오자 심심치 않게 샴페인이란 단어가 적힌 벽들이 보인다. 작은 규모로 퀄리티에 신경 쓴 좋은 와인들을 만들어내는 곳. 좁은 골목을 조금 더 들어오자 모던한 나무 건물에 목적지 이름이 적혀 있다. 도멘 자크 셀로스(Domaine jacques selosse)


흰 저택에 들어와 체크인을 마쳤다. 직원이 방을 설명해주고 식사가 이루어지는 공간을 설명해주었다. 총 10개의 객실은 각 나라별 건배의 뜻을 담은 단어들로 불렸다. 내가 묵는 방은 Joy. 호텔을 예약할 때 식사 여부를 미리 체크하게 되어 있었고 나는 저녁과 함께 조식까지 예약을 모두 해놓았다. 미슐랭 추천 식당답게 일부러 식사만을 위해 찾는 곳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그 유명한 자크 셀로스 샴페인을 현지가로 마셔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짐을 풀고 쉰 뒤 8시에 맞춰 식당으로 향했다. 방 이름을 확인하더니 미리 세팅된 1인석으로 자리가 안내되었다. 


식사는 4코스로 이루어진 단일 메뉴였다. 칠판에 자세히 코스 내용이 적혀 있었지만 흘려 쓴 불어라 블라인드 테스트 느낌으로 식사를 기다렸다. 알러지가 있는지 확인하는 지긋한 나이의 점원에게 메뉴가 무슨 뜻인지는 전혀 모르지만 분명 맛있을 거라 하니 환하게 웃었다. 대체 어떤 와인이길래 국내에서 수십 만원에 판매되고 그마저도 물량이 없어 구할 수 없나 싶어 기본급의 자크 셀로스 이니셜 한 병을 시켰다. 오늘까지는 생일 기념이란 핑계가 통하는 날이다. 


치즈가 고소하게 씹히는 아뮤즈 부쉬에 자크 셀로스 이니셜 한 병이 먼저 나왔다. 이게 그 자크 셀로스구나.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게 칠링 바스켓이 아닌 먼저 식탁 위에 놓아주는 센스. 진한 노란색을 띤 자크 셀로스는 꼭 위스키를 오픈한 것처럼 강렬한 노이즈가 첫 인상이었다. 전문가들처럼 여러 가지 향들을 캐치해내지 못해 멋있는 설명을 할 순 없지만, 잘 보관된 여문 느낌이 들었다. 아, 이거구나. 한 모금 한 모금이 새삼스러웠다. 관자, 생선, 돼지고기 등을 이용한 요리가 차례로 나왔고, 맛을 묻는 직원에게 급히 찾아본 불어로 맛있다고 답했다. 총 두 시간 반이 넘는 식사. 그래도 중간 중간 직원과 얘기를 나누고 때맞춰 나오는 음식을 먹고, SNS에 감상을 적다보니 순식간에 지나갔다.


숨 돌릴 여유 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늦게까지 다녔던 여행의 피로가 이 복도 끝에 내 방이 있다는 위안에 수마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얼굴과 손가락이 울긋불긋 물들었고 와인을 더 마실 배까지 남아 있질 않아 아쉽지만 와인을 조금 남기고 자리를 정리했다. 방으로 돌아와 씻고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숙면했다.


여기서 1박만 하는 게 아쉽지만 1박 이상을 했으면 이런 아쉬움이 또 남지 않을 테지. 아침 일찍 파리로 돌아갈 짐을 싸고 조식을 먹으러 갔다. 어제와 같은 테이블에 다시 세팅되어 있는 자리. 직원이 나를 보자 "어제 마시다 남은 샴페인 보관해두었는데, 지금 마실래?"라고 물었다. 따로 보관해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었는데. 본인들이 만든 샴페인이라 남는 것을 버리는 게 아까운 마음도 포함되어 있었을까. 단박에 바로 달라고 말하고 자리에 앉았다. 왠지 땡잡은 느낌이었다. 샴페인 한 잔 가볍게 비우고 뷔페로 준비된 메뉴들 중 크로와상과 뱅 오 쇼콜라를 담아 왔다. 따뜻하고 바삭한 빵들을 먹고 있자니 정말 프랑스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 난다. 기차 시간을 이르게 잡아놔 적당히 먹고 직원에게 인사를 한 뒤 체크아웃을 했다. 


어제 체크인할 때 오늘 택시가 필요하다 말했더니 잊지 않고 바로 콜택시가 예약돼 있어 지체하지 않고 에페르네 역으로 향했다. 깔끔한 벤츠 택시, 영어로 의사소통이 아주 편한 젊은 기사. 파리에서 랭스를 향했던 1등석 기차 안도 대부분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도시구나 싶다.


에페르네에서 파리까지는 비지정석으로 예약을 해 비어 있는 좌석 아무 데나 앉으면 됐는데 이 작은 도시를 벗어나 파리까지 가는 사람들이 가득해 자리가 없었다. 복도 중간에 자리를 잡고 한 시간 반 가량 서서 왔다. 창 밖 풍경이 점점 도시화되더니 어느덧 파리 동역에 도착했다.


이 여행의 시작이었던 파리. 분명 파리에 도착할 땐 '역시 파리가 최고야'였는데, 작고 조용한 도시에 있다 다시 파리로 돌아오니 '파리가 원래 이랬나'가 되었다. 사람 많고, 복잡하고, 시끄럽고, 지저분하고. 토요일을 맞이한 분주한 동역을 빠져나와 만차인 버스를 타고 호텔로 이동했다. 그새 더 무거워진 캐리어를 힘겹게 들고 연신 "빠흐동"을 외치며 도착지에 내렸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이 보이는 몽마르트르의 호텔. 2주간의 여행이 반환점을 돌았다. 이제 파리에서 못다 한 일정을 마치고 돌아간다.


내게 행복은 샴페인과 동의어다. 그러므로 샴페인을 생산하는 샹파뉴 지역은 행복을 생산하는 곳이다. 고로 짧게나마 내 행복의 출처를 찾을 수 있었다. 지난 7월 한국을 찾은 현 떼땅져 총괄 이사인 클로비스 떼땅져가 샴페인에 대한 기술적인 질문을 한 어느 칼럼니스트에게 친절한 답을 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저 샴페인을 즐겨주세요. 떼땅져를 마실 때마다 행복하고 즐거우셨으면 좋겠습니다." 


맞다. 내 행복은 샴페인 속 기포에 있다. 감히, 샹파뉴를 여행하는 내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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