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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Dec 07. 2022

브뤼셀 당일치기

 어쩌면 보통날 7


누구에게나 막연하게 로망인 도시가 아마 하나 둘쯤 있을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아련해지면서 막상 가면 상상 속에 존재했던 도시가 실재하지 않을까 두려운, "꼭 여행할 거야"라는 말을 달고 살면서도 최우선의 여행지로 선택하기엔 머뭇거리게 하는. 내겐 브뤼셀이 그런 막연한 로망의 도시였다. '가야지'보다 '가고 싶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도시. 


지금으로부터 딱 5년 전. 그 로망의 도시였던 브뤼셀을 실제로 마주하기 위한 여행 일정을 짰다. 다른 유럽 유명 도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도시이기에 항공편이 많은 파리를 거점으로 삼으면서 그중 3일간을 브뤼셀에 머무는 일정이었다. 테라스가 딸린 스튜디오를 에어비앤비로 빌렸고, 그 스튜디오에서 내려다보며 찍은 빨간 차양의 골목길 사진을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바꿨다. 이 작은 도시를 구석구석 다닐 계획을 즐겁게 짜며 출발을 2주 앞두고 있던 때. 아뿔싸, 브뤼셀 중앙역에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용의자를 제외한 희생자가 다행히 발생하진 않았지만 그랑 플라스의 관광객들을 모두 대피시키고 기차 운행을 대거 중단한 후폭풍이 있던 테러였다. 직전 해에 브뤼셀 공항과 지하철역에 테러가 일어나 30여 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런던이나 파리 같은 대도시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는 나랑 상관없는 먼 일처럼 느껴졌는데, 브뤼셀처럼 작은 도시에서 일어난 테러는 왠지 내 일이 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기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브뤼셀 일정을 취소했고, 여행 내내 나는 파리에만 머물렀다. 로망의 실현은 또 미뤄졌고, 브뤼셀은 그렇게 닿을 듯 말 듯한 도시로 남아 있었다.


2022년 11월. 오랜만에 2주간의 긴 여행을 계획하며 나는 다시 파리를 목적지로 삼았다. 여행이란 행위 자체가 그리웠고 그렇기에 이왕이면 파리면 좋을 것 같아서였다. 불 켜진 에펠탑 앞에 오래 앉아 있는 나를 상상했고, 좋아하는 샴페인을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샹파뉴도 방문하고 싶었다. 게다가 브뤼셀은 파리에서 기차로 1시간 20분이면 닿을 수 있는 도시. 잊고 있던 5년 전의 욕심이 슬금 나타났다. 목적지가 확실하니 계획은 금방이었다. 


긴 여행을 리프레시할 수 있게 브뤼셀 일정은 여행 후반부로 잡았다. 잘 아는 파리에서 전혀 모르는 브뤼셀로 넘어가는 맛은 지칠 수 있는 여행 후반부에 더욱 짜릿할 듯했기 때문이다. 파리와 파리 근교의 여러 일정을 약 열흘에 걸쳐 소화한 뒤 드디어 브뤼셀에 향하는 날. 오전 7시 55분발 기차를 타기 위해 이른 아침 북역으로 향했다.


파리 북역을 검색하면 늘 따라붙는 단어가 치안이다. 북역 주변은 이민자촌이 형성되어 있어 파리 중심부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긴 하지만, 편견을 빼고 보면 이곳도 다 사람 사는 곳이다. 다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는지 북역 내 파이브 가이즈는 오전 7시부터 오픈해 있고, 여러 곳의 카페들은 카페인을 찾는 사람들로 줄이 길다. 그중 스타벅스에 들러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플랫폼 번호를 확인하고 표 검사를 마친 뒤 브뤼셀 미디행 기차에 탑승했다. 


잠깐 눈을 붙이고 났더니 풍경을 감상할 새 없이 브뤼셀 미디 역에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파리보다 더 어두운 짙은 회색빛 하늘, 눈을 현혹시키는 커다랗고 지저분한 그라피티들, 철로에 떨어져 있는 여러 쓰레기들. 도시의 첫인상은 날씨에 많이 좌우될 수밖에 없다. 브뤼셀은 그렇게 어수선한 얼굴을 하고 나를 맞이했다.


대부분의 관광지가 걸어 다닐 수가 있는 곳이라 브뤼셀 미디 역에서 도심 중심부까지 1회권을 두 번 끊어 왕복에만 사용하려고 했는데 카드 핀 번호 오류로 기계 구매가 되지 않았다. 창구 직원을 찾아 하루 동안 무제한으로 사용이 가능한 1일권을 구매했다. 여행지에선 늘 모자람보다 넘침이 나은 법이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에 1일권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목적지인 Trône역으로 가는 지하철을 잘못 타 개찰구로 나와 반대로 이동했다. 1회권만 끊었으면 내부에서 한참을 걸었어야 했는데 1일권이라 가능해진 짧은 동선. 역시 넘치니 낫다. 아침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무표정한 건 서울이나 브뤼셀이나 파리나 똑같은 법. 파리와 같이 내릴 사람이 직접 문을 열고 내리는 각진 지하철 내부를 관찰하며 목적지로 향했다.


현대적인 시설의 Trône역에서 내려 조금 걸으니 거대한 규모의 브뤼셀 왕궁이 나타났고, 브뤼셀 공원을 지나니 고풍스러운 건물이 모여 있는 스퀘어가 보였다. 자크 쿠덴 베르그 성당, 벨기에 왕립미술관, 르네 마그리트 미술관 등 관공서와 함께 주요 관광지들이 몰려 있는 곳이다. 저 멀리 브뤼셀 시가지가 낮게 보이는 작은 광장의 이름은 Mont des Arts, 예술의 언덕. 그랑 플라스로 직행하지 않고 이곳으로 온 건 브뤼셀을 약간 높은 곳에서 조망해본 뒤 여행을 시작하고 싶어서였다. 물론 르네 마그리트 미술관도 이곳에 있고. 


월요일인 오늘 브뤼셀에 온 건 파리를 방문하면 꼭 가고 싶었던 레스토랑이나 꼭 숙박하고 싶었던 아비제의 자크 셀로스 호텔 등 운영 시간과 날짜가 제각각인 곳들의 방문 일정을 먼저 정리한 뒤 남은 날들 중에서 브뤼셀 여행 날짜를 잡았기 때문이다. 하루 꽉 채워 관광 위주로 다닐 예정이고 브뤼셀에서 꼭 먹어야지 하는 곳들은 연중무휴인 곳이 많아 아무 걱정 없이 기차 예매까지 전부 다 끝냈는데, 그제야 미술관은 월요일이 휴관이라는 게 생각났다. 벨기에 출신 작가 르네 마그리트 작품은 꼭 현지에서 직접 보고 싶었는데.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바탕으로 모자와 우산 등의 까만 오브제가 그려진 르네 마그리트 미술관의 외관을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담고 걸음을 옮겼다. 브뤼셀에 다시 와야 할 명분 하나는 남겨뒀다고 위안 삼으며.


유럽엔 3대 허무 관광지가 있다. 명성이나 알려진 스토리보다 실제로 보면 허무하게끔 별 거 없다는 의미에서다. 독일 라인강의 로렐라이 언덕, 덴마크 코펜하겐의 인어공주 동상, 그리고 벨기에 브뤼셀의 오줌싸개 동상. 오줌싸개 동상은 1619년 조각가 제롬 뒤케누아(Jerome Duquesnoy)에 의해 제작된 벨기에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크기가 60cm로 아주 작은 조각상이다. 


예술의 언덕에서 5분 정도 걸어 내려오니 골목 끄트머리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저기구나. 가까이 가서 본 동상은 예상보다 더 작았지만 동상 주변이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고 동상 자체도 어느 전통 의상을 입고 있어(루이 15세가 이 동상의 약탈을 사과하는 의미로 프랑스 후작의 의상을 입혀 돌려보낸 것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에서 보내는 의상들을 주기적으로 입힌다고 한다) 허무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얼마나 대범하고 공개적인 노상방뇨인지. 관광객들이 오줌싸개 동상을 뒤에 두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나도 건너편 건물의 창문틀에 핸드폰을 올려놓고 셀프 카메라를 찍었다. 치-즈.  


아직 식사를 하기엔 이른 시간. 브뤼셀에 오면 꼭 먹어야 하는 벨지안 프라이를 먹기 위해 가장 유명한 곳 중 하나인 Fritland의 오픈 시간을 기다렸다. JTBC <비정상회담>에서 프랑스 대표 로빈과 벨기에 대표 줄리안이 각자 프렌치프라이냐 벨지안 프라이냐 가지고 싸우니 이탈리아 대표 알베르토가 "그냥 감자튀김이에요"라고 했는데. 곳곳에 벨지안 프라이 캐릭터가 심심치 않게 그려져 있을 정도로 벨기에는 감자튀김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해 보였다. 추천받은 소스와 함께 쁘띠 사이즈로 시킨 벨지안 프라이를 받아 야외 좌석에 앉았다. 물론 바로 튀겨 나온 통통한 감자튀김이 맛이 없을 수가 없고, 약간 매콤한 마요 느낌의 추천 소스가 찰떡궁합이긴 했으나 특별한 맛은 아니었다. "그냥 감자튀김이에요"


빅토르 위고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했다는 그랑 플라스. 그랑 플라스를 네모나게 둘러싸 바짝 붙어 자리하고 있는 건물들은 시청과 왕의 집(브뤼셀 시립 박물관), 브라반트 공작의 집(초콜릿 박물관), 맥주 양조업자 길드하우스, 정육업자 길드하우스 등이라고 한다. 귀족이나 공작이 아닌 상인들의 하우스가 도심의 가장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게 특색 있다.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 건물 외벽에 화려한 치장을 하여 현재의 황금빛 광장이 되었다는데. 아기자기한데 화려하고 실용적이면서 사치스러운, 그 모순 자체가 그랑 플라스였다. 광장 가운데엔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와 마구간이 자리하고 있었고 관광객을 태운 마차가 그 옆을 달그락 거리며 지나갔다. 눈으로 보는 것의 절반도 담아내지 못하는 사진이지만 일단 연신 찍었다. 


스페인어 깃발을 곳곳에 든 단체 관광객들 틈을 지나고 나니 그랑 플라스 끝자락에 르네 마그리트 기념품 숍이 있었다. 아쉬운 대로 와플 과자가 든 틴 케이스와 엽서를 구입했다. 벨기에는 틴틴과 스머프의 고향이기도 하다. 만화가 발달한 곳답게 건물 곳곳에 틴틴이나 만화 캐릭터로 그려진 벽화가 종종 보였고 만화적인 간판을 내건 곳들이 많았다. 브뤼셀 거리는 조형물이나 동상들도 키치 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브뤼셀에서 한 끼를 먹는다면 역시 홍합. 지리학적 이유로 홍합이 자라는 데 좋은 환경을 갖춘 벨기에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은 홍합찜과 감자튀김(여기서도 감자튀김이다)을 함께 먹는 물 프리츠(Moules frites)다. 브뤼셀의 부세 거리는 이런 홍합 요리를 하는 식당들이 모여 있는데, 나는 그중 Aux Armes de Bruxelles로 향했다. 파리에선 식전주로 항상 와인을 선택했지만 브뤼셀에선 무조건 맥주다. 벨기에의 맥주 문화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을 정도로 저마다의 양조 방식으로 수 천 개의 맥주를 만들어내는 나라이니 익숙한 이름의 병맥주보단 처음 보는 이름의 크라프트 맥주를 시켰다.  


veulemans라는 이름의 맥주가 바닥이 둥근 형태의 전용잔에 시원하게 서빙되어 왔다. 날이 꽤 서늘해 어깨를 움츠리고 다녔는데, 맥주 한 잔에 몸이 노곤해진다. 나이 지긋한 점원들이 친절하게 응대해주는 곳. 커다란 냄비에 따뜻하게 익은 홍합찜이 감자튀김과 함께 나왔다. 이걸 혼자 다 먹을 수 있나? 싶었지만, 홍합은 살 안 찌니까. 바닥이 보일 때까지 다 먹고 나서야 부른 배를 두드릴 수 있었다. 


일찍 서둘렀더니 많은 것을 한 것에 비해 시간이 이르다. 오늘은 카타르 월드컵 한국 대 가나 전이 현지 시간으로 오후 2시부터 진행되는 날이다. 배는 잔뜩 부르니 따뜻한 펍에 가서 맥주 한 잔 하며 축구를 보면 좋을 텐데. 부세 거리를 왔다 갔다 하며 월드컵 중계를 틀어놓은 펍을 찾았다. 그렇게 찾은 곳이 운명적이게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맥주 종류를 파는 곳으로 기네스에 오른 델리리움 카페였다. 메인 홀은 퀘퀘 묵은 효모 냄새와 축축한 열기 같은 것이 기분 나쁘게 내려앉아 있어 그대로 돌아 나왔는데 같은 펍 내에 다른 입구가 있었다. 규모가 커 다양한 방식으로 카운터를 운영하는지 별도의 공간이 또 있었고, 사람도 많지 않으면서 TV 모니터 앞자리가 비어 있어 바로 자리를 잡았다. 


유명하다는 체리 맥주 한 잔을 시키려고 했더니 5유로 미만은 카드를 받지 않아 기본 라거 맥주 하나를 추가 주문했다. TV 앞에 자리 잡고 축구에 집중. 우리가 내내 우위를 점한 것 같은데 0대 2로 전반전이 마무리됐다. 그렇게 후반전.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조규성의 헤딩골이 터졌고 나도 모르게 함성을 질렀다. 펍에는 각 국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내게 다들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워 주었다. 조규성의 두 번째 골이 터졌을 땐 모두가 박수를 쳤고, 가나가 역전 골을 넣고 나선 어쩔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경기를 직접 뛴 선수들만큼 아쉬우랴. 맥주 두 잔을 비우니 경기가 끝이 났다. 


분명 맥주 배는 충분히 불러 있는데. 델리리움 카페의 창문 너머로 보였던 와플 가게가 내내 아른거려 저절로 발이 움직였다. 넷플릭스로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본다는 점원이 와플 기계에서 막 찍어낸 기본 와플을 건네주었고, 그 자리에 서서 순식간에 다 먹었다. 축구는 졌지만 와플은 또 맛있다. 인생은 일장일단인 법이다. 


기분 좋은 배부름에 도심 곳곳을 걸어 다녔다. 구름 사이로 살짝 깨끗한 하늘이 보이는 오후. 여행을 할 때 꼭 모으는 시티 머그 유아 히어 시리즈를 사러 스타벅스에 들렀더니 생각지도 않게 겐트, 브루게 기념 머그까지 있다. 고민은 잠시. 벨기에, 브뤼셀, 겐트, 브루게. 총 4가지의 머그잔을 하나씩 샀다. 무게는 잠깐이고 추억은 영원이다.


오후 다섯 시가 되면 어두워지는 도시. 그랑 플라스 야경을 좀 기다려보기 위해 일찌감치 왕의 집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날이 조금 맑아지면서 어두워지니 이곳 건물의 황금 부조가 더욱 선명한 빛을 낸다.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아진 광장. 그러다 갑자기 오후 다섯 시가 되자 광장의 불이 한꺼번에 꺼졌다. 뭐지? 하던 찰나에 호두까기 인형 <사탕요정의 춤> 아카펠라 버전으로 노래가 깔리고 그에 맞춰 그랑 플라스의 화려한 조명쇼가 시작됐다. 시청사의 창문 하나하나가 스크린이 되어 창문틀이 노란색,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그랑 플라스 건물들이 그 자체로 스크린이 되어 조명을 리드미컬하게 받아낸다. 


눈을 뗄 수 없이 화려했다. 약 10분 간의 조명 쇼는 "호호호 해피 메리 크리스마스"란 인사와 함께 크리스마스트리가 짠 하고 점등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랑 플라스 건물 전체에 일제히 노란 조명이 들어왔고, 관광객들의 눈은 낮보다 더욱 반짝이며 인증샷을 찍느라 모두 환한 웃음을 지었다. 나도 그 가운데에서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조명 쇼가 있다는 것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어 입을 떡 벌리고 봤다. 어쩜 딱 적확한 시간에 여기에 앉아 있다 이 조명 쇼를 봤지? 생각지 못한 선물을 받은 느낌이다. 


브뤼셀에 도착해 걸어왔던 길을 정확히 반대로 돌아간다. 겨울의 유럽은 밤이다. 흐린 하늘 아래 같은 색깔로 흐리던 건물들이 불빛을 입는 시간. 거리를 수놓는 크리스마스 일루미네이션 장식이나 건물들의 조명으로 이제야 브뤼셀이 제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꼭 야행성 동물처럼. 아까와 분명 같은 길인데 완벽히 다르다. 따뜻하고 포근하게까지 느껴지는 길을 되짚는다. 그랑 플라스를 지나 오줌싸개 동상, 예술의 언덕, 르네 마그리트 미술관, 브뤼셀 왕궁을 지나 Trône역. 점심을 먹었던 레스토랑의 자리 안내를 담당했던 정장 차림의 노신사가 딱 브뤼셀이랄까. 웃음기 없는 얼굴을 보고 무뚝뚝하다 단정 지었으나 자리를 착석하고나자 따뜻한 미소를 건네주던 그처럼 황량한 첫인상과 달리 천천히 부드러운 진면모를 보여준 도시가 브뤼셀이었다.


저녁 7시 23분으로 예약해둔 기차를 탑승하기 위해 다시 브뤼셀 미디 역으로 도착했다. 제법 파리지앵처럼 1리터짜리 물을 사서 챙긴 뒤 전광판에 뜬 플랫폼 번호에 맞춰 이동했다. 이제 9시쯤이면 파리에 도착한다. 돌아갈 곳이 파리라니. 


브뤼셀에서 3일을 있었으면 이런 기분은 안 들었을 수도 있겠다. 브뤼셀이 워낙 작다 보니 브루게나 겐트를 다녀왔을 수도 있었을 테고, 다닐만한 곳이 넓지 않아 매번 같은 길을 걸어 다니며 흐린 눈을 했을 수도 있었을 테지. 파리 내에서 비슷비슷한 풍경들을 보고 다니느라 그랬을까. 어제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아 일찌감치 호텔로 돌아와 이른 잠을 청했었는데, 컨디션이 안 좋았다는 게 무색하게 쌩쌩거리며 브뤼셀을 누볐다. 북역에 도착해 버스 정류장으로 나오자마자 타야 할 버스가 바로 도착해 지체하지 않고 호텔에 도착했다. 이고 지고 온 시티 머그들은 기내용 짐으로 미리 분류해 정리해놓고 누웠다. 


그간 유럽의 도시들을 여행하며 국경을 넘을 땐 모두 비행기를 이용했었다. 다구간 항공권을 이용하거나 경유 도시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동 시간을 최소화했었다. 그래서 한 번에 가까운 나라들을 묶기보단 동시에 가기 어려운 나라들을 묶어 여행했었다. 매번 휴가는 충분히 길지 않았고 이 편이 훨씬 경제적이었으니까. 어느 나라를 가든 비행기나 배를 타는 게 당연한 나라에서 태어났고, 어느 나라를 가든 비행기를 타는 게 당연했던 내게 육지로 국경을 넘어보는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내가 살고 있는 도시와 서울은 KTX를 타고도 2시간이 걸리는데 프랑스 파리에서 벨기에 브뤼셀은 고작 1시간 20분이면 충분했다. 국경을 넘는 일이 이렇게 쉬운 곳.


세계나 나라를 섬처럼 분절하지 않고 사는 삶은 어떤 삶일까. 다른 나라를 향하는 게 도전이지 않을 수 있는 일, 좀 더 나가도 좀 더 행동해도 '그게 뭐 별 거라고' 여길 수 있는 위치, 여행에 너무 애쓸 필요가 없고 여행에 너무 안달내 하지 않으며 살 수 있는 환경에 놓인 삶은 어떤 삶일까. 물론 그랬다면 이런 여행을 할 순 없었을 것이다. 이토록 매일매일을 소중해하고 일 분 일 초를 아까워하며 평소보다 갑절은 집중하며 보내는 하루는 이렇게 멀리 떠나왔기에 가능한 것일 테지. 살아보지 않은 삶에 대해선 쉽게 말하게 되는 법이다. 어쨌든 역시, 인생은 일장일단. 


'가고 싶은'에서 '가봤던' 도시가 된 브뤼셀. 막연하게 로망이었던 도시 리스트 하나가 지워졌다. 기쁘게 지웠다.


아직 내겐 며칠의 여행이 더 남아있고, 일 분 일 초를 더 소중히 여길 마음가짐도 그만큼 남아있다. 그럼 푹 쉬고 내일 더 힘내서 여행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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