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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Dec 30. 2022

여행 재생목록

 어쩌면 보통날 9


여행 D-2. 


짐을 싼다. 여행지에서 입고 싶어 새로 산 옷을 가장 먼저. 그다음엔 자주 손이 가는 애착 옷과 세면도구, 출력해놓은 티켓들, 세면도구, 고데기 등을 펼쳐진 캐리어 안에 차곡차곡 담는다. 핸드 캐리 해야 하는 보조배터리와 여권, 지갑은 손가방에 넣고 여행 직전에 챙길 것들은 메모장에 따로 적어둔다. 


여기까지 마치면 이제 제일 중요한 준비를 시작할 차례.


컴퓨터 앞에 앉는다. MP3로 쓰는 중인 아이폰을 연결하고 아이튠즈를 연다. 새로운 재생목록을 생성하고 여행 도시 이름을 입력한다. 그리고 선곡한다. 여행지에서 듣고 싶은 노래, 들어야 하는 노래라고 생각되는 곡들을 신중히.


여행 D-day.


빠뜨린 건 없는지 한 번 훑어본 뒤 캐리어를 잠근다. 손가방을 챙기고 MP3로 쓰는 중인 아이폰을 꺼낸다. 이틀 전 만든 재생목록을 클릭한다. 이어폰을 꽂는다. 집 문을 나서는 지금부터 여행이 끝날 때까지 이 재생목록만 내내 들을 예정이다. 보통 50곡에서 100곡 내외로 선곡한 노래만을 줄곧. 






이것은 나의 여행 이야기다.


여행을 떠나기 전 그곳에서 들을 재생목록을 준비하기 시작한 건 2015년 여름, 뉴욕 여행에서부터였다. 휴가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회사지만 긴 휴가를 내기엔 눈치가 보이던 저연차 시절, 가는데만 반나절이 걸리는 뉴욕은 마냥 로망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던 도시였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2015년을 큰 수술을 받으며 시작했고, 병원에 입원해 회복하는 동안 불현듯 뉴욕 여행을 결심했다. 삶은 언제든 이상하게 흐를 수 있고 그러니 당장에라도 뉴욕을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왕복 항공권을 비즈니스로 결제했고 타임스퀘어에서 한 블록 떨어진 풀옵션 레지던스를 예약했다. 유한한 시간 앞에서 긴 비행 따위, 많은 비용 따위였다. 


2주가 채 되지 않는 짧은 일정이라 뉴욕에서 봐야 할 것들을 나열하며 촘촘한 일정을 짜던 중 영화 <비긴 어게인>을 다시 봤다. 각자 좋아하는 노래를 선택해 들으며 뉴욕의 도심을 걷는 주인공들을 보고 있다 보니 뉴욕에선 아무 노래나 들어선 안 되겠다 싶었다. 여행이 완벽해지려면 딱 맞는 배경 음악이 있어야 했다. 낮과 밤을 나누고, 어퍼 이스트 사이드와 첼시를 구분하며 뉴욕을 상상했다. 그러다 보니 노래가 추려졌다. 하나씩 하나씩 추가하다 보니 어느새 100곡이 되었다.


그렇게 루스벨트 아일랜드 트램을 탈 땐 <레옹>의 마틸다가 된 듯 Sting의 <Shape of my heart>를, 한낮의 브루클린 브리지를 걸을 땐 Years & Years의 <Eyes shut>을 들었다. 타임스퀘어의 밤을 수놓는 화려한 간판 불빛 아래에선 <비긴 어게인>의 댄과 그래타처럼 Stevie Wonder의 <For once in my life>를 들었다. 


노래와 장소의 강렬한 합일. 김민철 작가가 <모든 요일의 기록>에서 썼듯 음악과 나 사이에 만들어진 결정적 순간, 그 순간에 평생 음악이 달라붙는 적확한 경험을 나는 뉴욕에서 했다.


이 이후부터 나는 여행을 앞두고 항상 재생목록을 만든다. 이미 알고 있는 도시는 아는 대로, 가본 적 없는 도시는 모르는 대로 분위기를 상상하며 선곡한다. 그렇게 미리 선곡을 마친 노래들만 여행지에서 듣는다.


때로는 어울리는 대로, 때로는 어울리지 않는 대로 노래가 풍경에 붙어 남았다. 그 자체로.


태풍이 지나간 타이베이엔 혁오의 <공드리>가, 런던 프라이드 한 잔을 마시고 걷던 밀레니엄 브리지엔 정기고의 <Nocturne(야상곡)>이, 방콕 시암에서 칫롬까지 걷던 스카이워크에선 modjo의 <Lady>가, 암스테르담 운하를 걷는 동안엔 내내 Sherry W의 <Amsterdam>였다.


지금 듣는 노래와 풍경이 정확히 일치하는 순간엔 덜 맛있었던 음식도, 생각보다 지저분하고 실망스러운 거리도 다 괜찮아질 수 있는 일. 그렇기에 내겐 여행지에서 어떤 노래를 듣느냐는 여행지에서 무얼 먹고 무얼 보는지만큼 중요하다. '하필' '지금' '이' '노래'를 '여기'에서 들을 때. 그때 비로소 여행은 완성된다. 






파리로 시작해 스트라스부르, 브뤼셀, 랭스, 에페르네 등을 다녀온 약 2주간의 여행. 나는 역시 이번에도 재생목록을 만들었다. Paris란 제목 아래 담긴 곡은 총 89곡.


11월의 파리는 꽤 스산한 편이다. 비가 오락가락하고 짙은 회색 구름이 하늘을 뒤덮는 날이 잦다. 그러다 가끔 선물처럼 파란 하늘이 얼굴을 비출 때가 있는데, 그런 날이면 나는 몽마르트르를 향했다. 오르막길을 오르다 숨이 거칠어질 때 즈음 뒤를 돌아보면 어느덧 파리 시내가 발아래로 낮게 펼쳐져 있는데 햇빛이 촤르르 떨어져 있는 지붕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정말 파리에 있구나' 싶어졌다.


몽마르트르로 가야지, 하는 순간부터 이 두 곡이었다. 영화 <아멜리에>의 OST <Comptine D'Un Autre Ete L'Apres Midi>와 <J`y Suis Jamais Alle>. 파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인 데다 <아멜리에> 속 아멜리에가 일하는 카페가 몽마르트르에 있어 미리 염두에 두고 선곡한 곡들이었다. 250개의 언어로 사랑을 말하고 있는 사랑해 벽과 사크레쾨르 대성당, 바와 레스토랑과 갤러리들이 모인 골목을 거닐 때 이 두 곡을 내내 반복해 들었다. 꼭 영화 속에 들어와있는 것만 같았다.


여행 재생목록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건 그 도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OST. <미드나잇 인 파리>와 <라따뚜이>는 파리가 배경인 영화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아하는 영화다. 언제고 헤밍웨이가 있는 파리로 데려가줄 것 같은 Stephane Wrembel의 <Bistro Fada>와 맛있는 식사를 꼭 챙겨야 할 것 같은 Camille의 <Le Festin>은 보통의 파리 거리 어디에나 어울리는 곡이었다. 몇 단어만 아는 불어가 갑자기 술술 완벽히 가능할 것 같은 기분.


몇 곡의 샹송도 있었다. 여행지를 파리로 정하면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노래는 Françoise Hardy의 <Comment te dire adieu>. 나온 지 꽤 오래된 노래지만 가끔 이어폰을 빼고 귀를 쉬게 할 때 이따금씩 파리 내 매장에서도 흘러나와 슬며시 웃게 한 노래였다. 유튜브에서 샹송을 검색해 취향에 맞는 노래를 찾아내 재생목록에 포함해 놓기도 했다. Angéle의 <Balance ton quoi>와 Claire Laffut의 <Vérité>는 그렇게 알게 된 노래였다. 모르는 언어로 불리는 노래는 이따금씩 이방인으로서의 위치를 자각하게 했다.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특정 가수의 목소리를 필요로 할 때가 있다. 윤상의 노래는 <우연히 Paris에서>, <남겨진 이야기> 외 8곡을 이이언(MOT/나이트오프)의 노래는 <잠>, <날개> 외 3곡을 담았다. 빼놓을 수 없는 방탄소년단의 노래는 <Bicycle>, <Airplane pt.2> 외 14곡을 담았다. 89곡 중 31곡이니 이 세 가수가 재생목록의 35% 가까이 차지한 셈이다.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특정 노래를 필요로 할 때도 있다. 보통 여행 재생목록을 만들 때 기본 설정값인 곡들. 폴킴 <spell>, 슈퍼주니어 <환절기>, dosii <lovememore.>. 특히 슈퍼주니어의 <환절기>는 가사가 정말 좋은데 '시간은 분명히 저주를 품고 잔인하게 계속 날 헤매게 해. 내가 미래라 믿어왔던 것들 모든 게 과거 속에 있는걸요'란 부분을 들을 때마다 이 여행이 과거가 될 때, 이 도시와 그때의 나를 추후에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임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이번 여행 재생목록에도 역시 포함해 들었다. 


내내 이 곡들이었다.






영화 <비긴 어게인>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있다. 


아내와 노래를 함께 들으며 거리를 쏘다녔던 첫 데이트를 추억한 댄이 그레타의 핸드폰엔 어떤 음악이 들어있냐고 물었다. 그레타는 놀라며 "내 음악 목록엔 접근 금지예요. 창피하고 죄스러운 곡들이 많이 들었어요."라 했고, 댄은 "내 것도 그래. 듣는 걸 보면 그 사람을 알게 돼."라 답했다. 그레타는 그제야 본인의 재생목록을 건넸다. 댄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도 못한 채.


그렇기에 파리 재생목록 89곡 전부를 적을 순 없었다. 나를 지나치게 드러내는 일이므로. 지나치느니 부족한 게 나으니까. 파리 재생목록은 MP3로 쓰는 중인 아이폰에 여전히 남아있다. 방콕, 라스베이거스, 리스본 등의 재생목록과 함께 나란히. 언제고 다시 나를 그 도시로 보내게 해 줄, 무료 항공권의 자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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