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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Jan 17. 2023

쓰는 영역 ;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을 읽고

어쩌면 보통날 10


서점에 왔다. 딱히 사고 싶은 책이 있어서는 아니다. 목적 없이 방문하기에 가장 만만한 곳이라서다. 책을 고르는 사람,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는 사람이 있는 특유의 지적인 공기가 좋다. 이 많은 책을 전부 읽는 건 불가능하니 좋아하는 책만 봐도 충분할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내 좁고 얕은 독서가 위로 되는 공간.


매번 같은 지점에 오기 때문에 동선은 간결하다. 서점 내 입점해 있는 안경점을 끼고 우회전하면 왼 편으로 자기 계발, 처세, 인문 신간, 스테디셀러 매대를 차례로 지난다. 베스트 코너를 찍고 좌회전하면 청소년, 세계명작, 유명작가선 서가가 한 줄씩 있고 직원 전용 PC를 지나치면 국내에세이, 국내에세이, 국내에세이. 도착이다. 세 번째 국내에세이 서가 가장 왼쪽 위에서 두 번째 칸. 여기서 고른 ㅁ 출판사의 ㅁ 시리즈 에세이가 꽤 괜찮았었는데. 그때 구입한 책을 확인한 뒤 그 옆에 나란히 꽂힌 알록달록한 책등의 제목을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오늘은 별로 수확이 없으려나. 국내소설 서가까지 훑었는데도 눈에 띄는 제목이며 소개글, 하물며 마음에 드는 표지도 없다. 이만 돌아갈까, 하고 지나치는데 계산대 옆 매대에 높게 쌓인 보라색 책이 눈에 들어왔다. 까맣고 긴 파마머리, 짙고 각진 눈썹, 얼굴의 4분의 1은 차지하는 듯한 큰 눈, 꽉 다문 입술을 한 여성이 책 크기만큼 큰 띠지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몸을 사선으로 살짝 비틀었지만 시선은 정확히 나를 향해 있다.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이었다. 


꼭 나를 붙잡는 것 같은 얼굴에 홀린 듯 다가갔다. 몇 페이지를 읽어보곤 모서리가 까지지 않고 표지가 제일 깨끗한 책으로 골라 계산을 마쳤다. 읽어야 할 것 같은 책을 우연히 만나면 감히 운명처럼 느껴진다. 


얇은 책이니 금방 읽을 거라 생각했는데 완독에만 일주일이 걸렸다. 저쪽(부르주아에 가까운) 세상을 경험한 사람이 느끼는 이쪽(내가 나고 자란 부르주아에서 먼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 부모를 포함한)을 향한 부끄러움을, 이쪽 태생의 사람이 담담하게 그러나 완벽히 솔직하게 꺼낸 글이자 기록이었다. 이쪽이 부끄러웠고 이쪽을 부끄러워하는 내가 부끄러웠고 그 부끄러움을 인지한 순간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부러움과 부끄러움은 한 끗 차이다. 타자를 향하는가, 자아를 향하는가. 


어떤 사람에 대해 판단할 때 그의 부모나 집안을 결부시켜 말하는 것을 경멸하고 경계해 왔는데. 그 경멸의 기저에 속한 감정이 부끄러움이었나. 엄마와 다른 삶을 살 것이라며 생활인으로서의 엄마를 부끄러워했다가 그런 감정을 느낀 내가 수치스러워지던 기억이 여럿 스쳤다. 지역과 시대를 파괴하는 보편성. 스스로의 감정을 끝까지 파헤쳐 볼 생각 없이 단순한 외면을 택했을 나를 대신하여 그가 보충해 쓴 글인 것만 같았다. 내가 영원히 꺼내지 못할 솔직함과 진솔함, 거기에 실존에의 감각을 덧붙여. 아니 에르노는 본인의 글쓰기를 일찌감치 사회적 글쓰기라 칭했다.


그래서 이중섭이나 반고흐의 엽서와 편지를 떠올리면 복잡한 심경이 된다. 떨어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담긴 이중섭의 수많은 엽서와, 현실에 대한 고민과 돈을 구하는 간절함과 그림을 위한 다짐과 걱정 등을 담아 동생 테오에게 전달한 반고흐의 편지가 각각 책으로 묶여 마치 고전처럼 읽히는 지금. 이중섭과 반고흐는 본인들이 아주 개인적으로 썼을 엽서와 편지가 이토록 대중적으로 읽히는 걸 과연 반겼을까 싶어져서. 어떤 글은 분명 감추고 싶었을 것 같은데. 나의 손을 떠난 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이 남의 것이 되어 버린 기록.


글을 쓴다는 건 대체 뭘까. 글은 한 번 쓰이고 누군가에게 보인 이상 개인적일 수 없나. 어디까지가 개인적인 글쓰기이고 어디까지가 사회적 글쓰기일까. 


결국 돌고 돌아 이 결론에 닿는다. 왜 나는 쓰는 사람이고 싶을까, 왜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런 공개적인 플랫폼을 통해 글을 쓰며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남기지 않으면 잊힌다. 기억을 소환할 매개체가 없다면 기억은 보이지 않는 곳에 소멸을 가장한 채 잠복해 있을 수 있다. 매개체가 있다 해도 완벽하지 않다. 글이나 사진도 단편만을 기록할 뿐이다. 기억은 불분명하고 매개체도 불확실하다. 그렇다면 있었던 일을 있었던 일로 남겨놓는 것도 괜찮을 텐데. 쓰지 않아도 괜찮을 텐데.


지난해 말,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대상인 직업 및 글쓰기 강연 요청이 들어왔다. 주어진 시간이 두 시간이라 강연이 너무 빨리 끝나버리면 어떡하지란 걱정이 무색하게 학생들의 질의응답이 1시간 넘게 이어졌다. 오히려 중간에 정리를 해야 할 정도였다. 여러 질문 중 글쓰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질문에 나는 일단 지금 당장 쓰라고 강권했다. 오늘 있었던 강연, 들으며 떠오르던 물음, 질문했던 내용, 지금 드는 생각들을 휘발되기 전에 한 문장이라도 바로 쓰라고. 글은 거기서부터 시작될 거라고. 글쓰기는 결국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이전에 나를 위해 쓰는 것이라고도 했다.


나는 독자를 설정해 두고 글을 쓴 적이 없다. 내가 읽기 위해 썼다. 이걸 학생들에게 말로 뱉으면서 깨달았고, 그때 뱉은 말을 지금 복기하며 확신했다.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그게 어떤 의미를 갖든, 나라는 독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쓴다. 이걸로 쓰는 동기는 충분한 것이었다.


<부끄러움>은 다음과 같은 아니 에르노의 말로 시작한다. '나는 글을 쓰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글쓰기가 없다면, 실존은 공허하다. 만일 책을 쓰지 않았다면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쓰는 행위는 의외로 위로를 동반한다. 이중섭과 반고흐도 나중에 어떻게 읽힐지언정 그때는 그저 써야만 했을 것이다. 아니 에르노가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던 6월의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부끄러움>을 써야 했듯이.


아니 에르노의 글은 은유와 상징을 배제한, 소위 밋밋한 글쓰기를 통해 소외계층이 영위하는 일상적 삶의 장면을 파편적으로 나열하는 형식을 취했다는 옮긴이의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일상적 삶의 장면을 밋밋하고 파편적으로 나열하는 것. 나는 그를 따르고 있었구나. 적어도 나는 나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읽어야 할 것 같은 책을 우연히 만나면 감히 운명처럼 느껴진다. 이래서 아니 에르노의 책이 나를 붙잡았나 보다. 나는 아니 에르노가 아니고, 아니 에르노가 될 수 없다. 그래도 아니 에르노처럼 쓰겠다. 독자인 내가 있는 한, 솔직하지 못하더라도 거짓은 없이.


<부끄러움>을 비롯해 이제 겨우 몇 권 그의 책을 읽었을 뿐이다. 그가 쓴 남은 책들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정답을 몰라 머리를 싸매며 보고 있던 시험지 위로 불현듯 답을 유추할만한 힌트가 떠오른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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