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북유럽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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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고막을 강타하는 엄청난 소음에 눈을 떴다. 큰 사이렌 소리와 함께 어떤 말이 반복적으로 흘러나온다. 핸드폰 액정을 켜니 새벽 4시가 조금 지난 시간. 잠든 지 세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유튜브 영상이 잘 못 켜진 것인가 싶은데 소리의 출처가 침대 근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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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 호텔에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지금 즉시 대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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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 호텔에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지금 즉시 대피 바랍니다."
화재라고? 지금 대피해야 한다고? 어떡하지? 뭘 챙기지? 그제야 정신이 바짝 들었다. 일단 겉옷을 챙겨 입고, 핸드폰을 챙기고, 메고 온 가방 하나를 그대로 들고 -여권만은 챙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호텔 방 키를 빼어 들고 방문을 나섰다. 잠에서 막 깬 부스스한 얼굴로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내가 들은 알람이 진짜였구나. 몽유병 같은 게 아니었어. 서두르지 않고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는 사람들의 어리둥절한 행렬에 끼어들었다. 호텔 밖으로 나와 불이 켜진 호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와중에 서늘하게 추운 오슬로의 새벽이슬에 여행하러 나설 땐 챙겨 온 옷을 좀 더 두껍게 입어야 할 것 같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요란한 소음을 내며 소방차가 두 대 연달아 도착했다. 소방관이 연이어 호텔 안에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호텔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자세한 설명이 없었지만 다행히 간단한 해프닝 정도였나 보다. 계단을 내려올 땐 쳐다보지 않았던 각자의 얼굴이었는데 계단을 타고 걸어 올라갈 땐 별 거 아니라 다행이란 안도의 얼굴로 서로 눈인사를 건넸다.
소방차가 도착하는 모습을 보고 서도, 호텔을 올려다보며 서로를 껴안고 위로하는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이 상황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묵고 있는 호텔에서 화재 경보등이 울린 밤, 작은 슬리퍼에 맨발을 끼워 신은 채 몸만 급하게 빠져나온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샬롯(스칼렛 요한슨)에 대해 글을 썼던 적이 있었던 탓일까. 나는 이 모든 게 타인의 장면 같았다. 돌이켜 지금 글을 쓰며 이제야 알게 됐다. 그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정말 다행이었다는 걸.
7시 기상. 어색한 나라, 어색한 도시와의 풍경이 친해지기 위해선 아쉬운 쪽이 부지런해지는 수밖에 없다. 머리를 다 감고 샤워실을 정리하던 중에 수전 방향을 헷갈려 해바라기 샤워 수전에서 물벼락이 떨어졌다. 마른 어깨가 젖었다. 수전 방향을 무의식적으로 옳게 돌리게 되는 때가 여행이 끝나가는 시점이다.
내 것 같지 않은 경험에 긴장될 일도 없었는지 그대로 방에 들어와 바로 잠이 들었던 탓에 그리 피곤하지 않다. 새벽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SNS에 간략하게 글을 쓰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호텔 문을 나서니 맑고 서늘한 오슬로의 공기가 피부에 와닿는다. 어젯밤 호텔을 찾아오던 길도, 새벽에 겉옷을 챙겨 입고 본 길도 이 칼 요한 거리인데, 이제야 뭉크의 그림에서 닳도록 본 칼 요한 거리임이 실감 난다. 부지런히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이 이따금씩 나를 지나친다. 이른 시간이지만 분명 오슬로의 중심 거리이고, 근처에 시청과 대학교가 있음에도 거리는 한산하다. 호텔에서 5분 정도 걸어 도착한 카페는 푸글렌Fuglen 본점이었다.
푸글렌은 1963년 시작된 노르웨이의 대표 커피 브랜드지만 도쿄를 한 번쯤 여행했던 사람이라면 특히 요요기공원 지점의 푸글렌을 알고 있을 것이다. 빨간 푸글렌 심볼이 걸린 상아색 외벽의 매장을 등지고 찍는 인증샷이 한때 도쿄 여행의 필수였었다. 올해 우리나라에도 첫 매장을 오픈한다는 푸글렌의 본점이라니. 오픈 시간에 거의 맞춰 왔는데 몇몇의 관광객과 몇몇의 현지인이 벌써 앉아 있다. 크로와상 하나와 더블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를 재빨리 주문했다.
먼저 내어 준 크로와상을 받아 자리를 잡고 있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나를 부른다. 더블 에스프레소를 담은 잔에 뜨거운 물을 지금부터 붓겠다며, 원하는 양이될 때 그만을 외치란다. 이게 이곳의 아메리카노구나. 속으로 웃으며 작은 머그잔이 찰랑해질 때쯤 그만을 외쳤다. 행복이 뭐 별 건가. 아침 크로와상과 진한 커피 한 잔에 있지. 꼭 <겨울왕국>의 스벤과 똑같은 목소리로 마치 춤을 추듯 “오늘은 카푸치노.. 는 아니고, 에스프레소? 도 아니고.. 라테?”하며 주문하는 사람을 봤고, 스몰 토크와 함께 테이크아웃을 해 가는 사람들과 창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연인을 봤다.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이 아침 감상을 적기 시작했다. 주로 화재 대피 소동을 겪고도 이 도시와 친해지기 위해 일찌감치 나올 수밖에 없는 여행객의 위치에 대해.
걷다 보니 금세 국립 박물관이 나왔다. 아케르스후스 요새가 지척에 보인다. 그렇다면 뭉크 미술관도 멀지 않다. 생각보다 더 크지 않은 도심. 비싼 값을 주고 교통 패스를 구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패스를 패스. 나는 내내 걸어 다닐 것을 스스로에게 선언했다. 곧 오픈 시간이 되는 국립 박물관 입구 앞에 사람들이 조금 줄을 서 있다. 마당으로 들어서니 벽에 마크 로스코 특별전 포스터가 붙어 있다. 국립 박물관은 뭉크의 대표작들이 전시된 곳이라 당연히 방문할 것이었고 그래서 딱히 특별전 일정을 찾아보지 않았었는데, 세상에, 이 시기에, 마크 로스코라니. 이 상상도 못 한 조우라니. 얼른 사람들 뒤에 줄을 섰다. 10시 오픈에 맞춰 문이 열렸고, 친절한 직원에게 티켓을 구입한 뒤 마크 로스코 특별전이 펼쳐진 3층으로 향했다.
다들 천천히 동선을 맞춰 관람하는지 곧장 3층으로 올라온 사람은 나 하나뿐. 맞다. 무려 마크 로스코 특별전을 오롯이 혼자 관람했다는 말이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가는 과정을 지나니 어느덧 눈이 황홀한 색의 조합이 펼쳐졌다. 한 가지 색으로 보이는 색 덩어리 밑에 숨은 이야기. 석양, 바다, 언덕 위 조망 같은 이미지들. 다른 관람객이 들어오기 전까지 같은 전시실을 몇 바퀴를 도는 호사를 누렸다.
누가 한국어로 번역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노르웨이어 스크리크skrik는 있는 힘을 다하여 부르짖는 ‘절규’보다는 너무 놀라 지르는 외마디 소리인 ‘비명’으로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하다
(중략)
신경 쇠약과 현기증을 자주 느꼈던 20대의 뭉크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생각해 보면, 이토록 강렬한 색감을 품은 거대한 자연의 모습은 뭉크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고 시각적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뭉크는 이 시각적 충격을 청각적으로 ‘자연의 비명’이라 표현했고, 그 비명을 듣는 자신의 심리 상태를 다시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절규>라는 그림이다. - 클래식 클라우드 <뭉크> 중
뭉크 전시실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작품은 <절규>였다. 빨간 석양 아래 이지러진 얼굴을 한 불안한 인간. 이걸 직접 보려고 여기까지 왔나 보다. 전시실 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았다. 보이는 것이 아닌 본 것을 그렸다는 뭉크. 그의 작품이 현대에도 사랑받는 건, 온전하지 않은 인간의 감정 그 자체를 솔직하게 표현해서 일거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함과 두려움, 무서움이 한 세기 이전에 태어난 사람도 같이 느꼈다는 데에서 묘한 동질감이 인다. <마돈나>, <아픈 아이>를 비롯한 작품들을 천천히 감상한 뒤 남은 전시실을 둘러봤다. 미술에 조예가 있진 않지만, 예술가가 평생을 걸쳐 내놓은 작품을 보고 나면 이걸 이렇게 쉽게 받아도 되나-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된다.
미슐랭 빕그루망에 이름 올린 프란세스 빈바Frances Vinbar에서 생선 요리와 샤블리 한 잔을 주문했다. 와인 한 잔에 거의 2만 원. 세계 최고의 와인을 이렇게 마셔보는구나. 혼자 하는 홀홀한 여행이 제일 아쉬울 때가 이런 식당에 혼자 올 때다. 여러 개의 음식을 시켜 다양하게 맛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좋은 풍경을 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많이 먹고 싶어 필요한 대상이라니. 나는 아직 홀홀해야 하는 사람이다.
내가 신은 게 발이 편한 여름 운동화가 아니라 빨간 구두였나. 윤슬이 넓게 반짝이는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아케르스후스 요새Akershus festning를 지나 공원Grev Wedels Park 벤치에 앉아 시티 투어 설명 듣는 관광객의 무리들을 잠깐 바라보다 또 걸었다. 보트 사우나에서 사우나를 하고 바다에 뛰어드는 사람과, 모래사장에서 모래 놀이를 하는 아이들과, 평상복으로 해를 쬐는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곳. 이들의 뒤편엔 오페라 하우스와 뭉크 미술관이 있고, 중앙역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이 정도 거리의 바다에서 이런 분위기로, 그러니까 타인의 시선이 딱히 중요하지 않고 타인의 행동을 별로 상관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곳.
높은 건물이 많지 않은 오슬로에서 눈에 띄는 거대한 위용의 13층짜리 건물. 단 한 사람의 화가를 위해 지어진 세계 최대의 미술관인 뭉크 미술관에 도착했다. 로비에 들어가니 뮤지엄 샵이 벌써부터 눈길을 빼앗는다. 감각적인 예술 서적에 아기자기한 기념품들. 그러나 일단 로비 가운데에 위치한 카페로 가 홈메이드 레모네이드를 주문했다. 바다를 면한 미술관답게 꼭 전시를 관람하지 않더라도 야외 좌석에 앉아 햇빛을 받으며 식사를 하거나 음료를 마실 수 있다. 현재의 뭉크 미술관은 2021년 코로나 시기에 새롭게 개관되었다. 두 번의 굵직한 도난 사건을 겪은 이전의 뭉크 미술관보다 보다 안전하고 규모 있는 미술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 최적의 위치를 결정하였다. 상큼한 레모네이드 한 잔을 마시니 충분한 리프레시가 되었다. 티켓을 구입한 뒤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뭉크 일생을 다룬 책을 여행 전 다시 읽고 오길 잘했다. 죽음과 아픔을 자주 목격해야 했던 삶, 떨렸던 첫사랑과 변해가는 사랑들, 고독과 스쳐간 일상, 그러나 결국 꿈꾸게 되는 빛까지. 나는 특히 밤바다를 배경으로 한 그림들에 자주 걸음을 멈췄다. 뭉크의 밤바다엔 길지 않은 여름의 아쉬움을 메우기라고 하듯 밤은 희붐하게 찾아오고, 그 옅은 밤바다에 내려앉은 달 기둥을 오래 바라보고 있는 어떤 이의 풍경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밝지만 밝지 않은 오묘한 색감 앞에 서서, 그 어떤 이의 뒷모습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뭉크의 여러 작품엔 죽음의 기운이 도사린다. 그림 속 두 사람이 밟고 서 있는 땅엔 인간의 뼈가 묻혀있거나, 바다에 서 있는 여인의 뒤엔 검은 옷을 뒤집어쓴 형체가 바짝 붙어 있기도 한다. 인간에겐 반드시 죽음이 온다. 그러나 죽음은 반드시 생명이 전제되어야 한다. 인생은 너무나 아이러니하다.
오슬로 도심 전경이 내려다 보이는 소파에 한참을 앉아 있다 나왔다. 전시를 쾌적하게 보려면 이 정도 규모는 되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딱 적당한 숫자의 관람객이 있었는데 거리를 파악하려고 켠 구글 지도엔 현재 뭉크 미술관이 매우 붐빔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역시 기준은 상대적이다. 그걸 보고 결국 조금 웃었다.
호텔 근처에서 샌드위치로 저녁을 먹고 맥주 한 캔을 사서 방으로 들어왔다. 밤을 향해 가는 시간인데 아직도 바깥이 환하다. 미술관에서 사 온 기념품을 정리하고 내일 입을 옷을 챙겨두고 일찍 침대에 누우려는데 퍼뜩 떠오른 게 있다. SNS 앱을 켜 스크롤을 한참 내렸다.
업로드 날짜 2023년 12월 17일. 타셴에서 발간한 에드바르트 뭉크와 마크 로스코 두 권의 책을 손에 쥐고 찍은 사진. 그 아래엔 내년 여행을 위한 필독서로 두 권의 책을 구입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래, 이때 두 권의 책을 같이 샀었지. 당시 북유럽 여행에 대해 막연히 생각은 하고 있었으니 뭉크는 여행 필독서에 해당된다지만 대체 마크 로스코는 무슨 연관이었나. 그런데 오늘 뭉크를 만나러 온 오슬로에서 마크 로스코를 함께 만났다. 창 밖으로 노르웨이 국기 두 개가 펄럭이는 맞은편 호텔이 보인다. 뭉크가 자주 찾았다는 그랑 카페가 1층에 자리한 그랜드 호텔이다. 이런 확실한 우연. 어느 책의 제목처럼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아니, 이상하게 맞게 흐른다. 나는 여길 오늘 반드시 와야 했던 것이다.
여행을 하는 동안 상념이 끼어들지 않는다. 돌아가서의 일상조차. 단지 오늘에 집중하는 것. 그것 외엔 여기서 내가 하는 건 없다. 그러니 나중의 나에 대해 생각을 할 수가 있나. 그저 미래의 나도 이런 확실한 우연이 있는 사람이기를, 여행을 언제나 추구하는 사람이기를,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귀찮아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다만 그렇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