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북유럽 01
여행의 시작은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다. 어디서 본 사진 한 장, 어느 책에서 본 묘사 한 줄, 상상으로 자리 잡은 로망 하나. 여행은 그곳에서부터 시작된다.
불현듯 북유럽을 가야겠다- 고 생각한 계기도 그랬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스치듯 본 뉘하운 운하의 알록달록한 건물 색깔이 여상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새파란 하늘 아래 빨갛고 노랗고 초록색인 건물들이 순차적으로 늘어서 있는 거리, 닻을 접은 요트들의 행렬, 운하 쪽으로 다리를 뻗고 앉아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 그 전체의 조화가 반짝 빛을 냈다. 한 번 그 조화를 자각하고 나니 그때부터 유독 코펜하겐을 다룬 풍경이 유독 잘 포착됐고-역시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 그러면 가야 했고, 그 먼 코펜하겐을 갈 거면 주변 국가의 도시도 함께 돌아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행은 금방이었다. 낮이 길고 기온이 적당해 여행하기 더할 나위 없다는 여름의 북유럽. 에드바르트 뭉크의 이름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는 오슬로와 미지의 도시 스톡홀름과 뉘하운 운하를 품은 코펜하겐. 나의 여름휴가는 차곡차곡 준비되었다.
원래 학교에서 멀리 산 친구들이 지각을 하지 않는 법이다. 버스가 늦을까 봐, 버스를 놓칠까 봐 조금 일찍 집을 나서는 사람은 늦을 수가 없다. 집 근처 터미널에서 인천공항 제2터미널까지 이동 거리 344km. 이동 시간 4시간. 버스가 늦을까 봐, 버스를 놓칠까 봐 조금 더, 조금 더 일찍하며 이르게 출발한 덕에 비행기 출발 4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붙이기엔 조금 일러 공항 1층의 카페에 들러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비행기 탑승 시간까지 얼마, 경유지까지 이동하는 비행시간 얼마, 경유지에서 대기하는 시간 얼마, 다시 이동하는 비행시간 얼마, 도착지에서 호텔까지 이동하는 시간 얼마. 만 24시간에 가까운 이동 시간을 생각하면 한숨이 푹 나올 만도 한데 다른 생각이 끼어든다. 여행이 그만큼 길어지니 이득 같다고. 선잠 자고 새벽 1시에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2시에 집을 나선 여행은 2시에 시작되는 여행인 거니까. 더 일찍, 더 늦게 꽉 채워 여행을 끝낼 수 있는 거니까. 게다가 아직 이 정도가 피곤하거나 귀찮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빈 속에 마시는 아메리카노가 세포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깨우는 듯하다.
보통 짐을 쌀 땐 넉넉하게 일주일을 잡는다. "이걸 잊을 뻔했네", "이건 반드시 챙겨야 하지" 떠오르는 물건들을 지나가다 하나씩 담는 시간이다. 나중에 정리하더라도 일단은 담을 것. 우산이나 양말, 반창고나 머리끈, 마스크팩 등이 산처럼 쌓인다. 그러다 막상 출발 전날이 되면 "다 챙겼겠지. 여권이랑 지갑, 보조배터리만 제대로 있으면 돼",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야. 만약 안 가져온 게 있으면 가서 사면 돼" 하고 꼼꼼하지 않게 캐리어를 잠근다. 여행 일정도 마찬가지다. 호텔 예약부터 주요 동선을 부지런히 정리하다가 막상 출발 전, 될 대로 되라지 싶어 진다. “문 닫으면 다른 데 가고, 가서 발 닿는 대로 걸어 다녀 보면 돼.” 하고.
내게 있는 어떤 충동성이, 이따금 불쑥 버럭 솟구치는 무모함이, 그걸 다 에워싸는 비겁함과 회피성이 의자 옆에 세워 놓은 이 주황 캐리어에 담겨 있다. 여행이 가지는 무게감은 모두에게 다를 것이다. 그러나 내겐 이런 연유로 여행이 필요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나의 일부를 조금씩 정리해 가는 과정으로.
오며 가며 비행기도 오래 타야 하고, 6시간이 걸리는 기차 이동도 두 번이나 있어 책을 한 권 챙겨 왔다. 김민철 작가의 <무정형의 삶>. 작가의 오랜 로망이었던 도시 파리에서 두 달간 직접 살아보며 겪은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여행 한참 전에 주문한 책이었는데 프롤로그와 앞 몇 장을 읽고 나서 ‘이건 반드시 이번 여행지에서 읽고 싶다’ 하며 그대로 덮어두었었다.
나는 여기에서도 나인 것처럼 거기에서도 나일 것이다. 갑자기 파리에 어울리는 근사한 나로 변모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42년간 몰랐던 자아를 거기에서 갑자기 찾을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 알면서도 떠나야만 하는 때가 있다. 공간의 형상을 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 <무정형의 삶> 중
나는 이따금 공간의 형상을 한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타인이 고민하며 정리한 글로 또 깨닫는다. 그러니까 필요했던 시간을 찾아 떠나는 나라며 남은 아메리카노를 마저 쪼록. 탑승을 위해 선 줄이 커피를 천천히 다 마실 동안 줄지 않는다. 모두 어떤 이유로 어떤 목적지를 향하는 걸까. 공간의 형상을 한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도 분명 저기에 포함되어 있을까.
체크인 수속을 마치고 라운지에 들어왔다. 가볍게 식사를 마친 뒤 <무정형의 삶>을 읽는데 브런치 스토리에서 알람이 왔다. 작가님의 소식을 기다리는 구독자들에게 새 글 알림을 보내주시겠어요? 마침 책에서 공감 가는 내용이 있어 메모를 하던 참이었다. 쓰는 것보다 사는 게 먼저니까. 살아야 쓸 것도 생기니까. 여행지에서 부지런히 쓰고 정리해 업로드할게요. 그간 제대로 덜 살아 쓸 것이 없었네요.
오래 썼더니 금방 방전되어 버린 에어팟을 아쉽게 정리해 가방에 넣었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은 커플의 대화가 들려왔다. 집 값과 대출 현황, 부동산 시세와 주변인들의 근황이 부지불식간에 쏟아진다.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한 층 아래로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창가 자리다. 비싼 캐리어, 새것 같은 캐리어, 얇은 에코백을 멘 사람, 면세점 봉투를 가득 든 사람. 다양한 짐들의 모양을 본다.
<바비>와 <지구마블 세계여행>을 챙겨보고 까무룩 잠이 들고 나니 어느덧 비행이 6시간 정도 남았다. 비행기는 열심히 중앙아시아를 지난다. 이런 강제적인 시간에 읽고 싶어 추가로 책을 주문했는데 광복절 택배 휴업을 맞아 배송받지 못한 책이 아쉽다. 벌써 반 이상을 읽어버린 책을 다시 꺼냈다. 이코노미 좌석에 앉아 있다 보면 다리를 쭉 뻗을 수 있는 몇 뼘의 공간이, 서서 걸어 다니는 행위가 얼마나 감사한지 깨닫는다. 불편함이 가져오는 소중한 앎이 있다.
내가 생애 처음으로 여행한 유럽은 파리다. 그러나 당시 암스테르담을 경유한 비행기를 탔기 때문에 정확히 따지면 내가 처음으로 밟은 유럽 땅은 스키폴 공항이었다. 아르바이트 시급을 모으고 모아 최소한의 비용으로 떠났던 첫 유럽. 파리행 환승 비행기를 타러 가며 '여행을 잘할 수 있을까, 모은 돈을 이렇게 다 쓰는 게 맞는 걸까, 별 일은 없겠지' 걸은 걸음마다 두려움이 뚝뚝 흘러넘쳤던 때. 부족한 나의 모습이 남아 있는 이곳을 모처럼 처음인 도시를 여행하는 오늘의 환승지로 선택했다. 튤립 생화 다발, 미피와 풍차 마그넷, 나막신 조형물. 여전한 것도 여전하지 않은 것도 있는 통로를 지나 탑승구에 자리 잡았다. 이제 3시간만 있으면 이 긴 이동의 끝인 오슬로에 도착한다.
이전 비행기의 짐이 제대로 도착하지 않아 수화물 벨트마다 사람들로 꽉 차 어수선하던 오슬로 가르데르모엔 공항. 밤 11시가 되어 가는 시간이라 도심까지 나가는 데에 혹여 무섭진 않을까 걱정하던 것이 완벽히 무색해졌다. 늘 상황은 걱정보다 낫다. 여러 시간에 도착한 다수의 사람들이 뒤섞인 공항철도를 타고 중앙역에 도착했다. 고속이란 이름이 붙긴 했지만 공항에서 중앙역까지 단 20분, 고작 두 정거장일 뿐인 데 한화로 3만 원이 넘는 금액. 비로소 북유럽의 공간에 도착했구나 싶다.
중앙역에서 10분 정도 걸어 칼 요한 거리 중심에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 체크인을 마치니 밤 12시가 막 넘었다. 마음이 소란했던 요 며칠이었지만 시간에 모든 걸 의탁해 떠나왔다. 어떤 날들이 남았을까. 생각은 접어두고 두 발 쭉 뻗고 침대에 눕는다. 시간대를 건너 거슬러 왔다. 마침내 이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