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북유럽 11
목소리나 말투처럼 글에도 그 사람만의 지문이 있다. 자주 반복되어 쓰이는 단어나 접속사, 쉼표나 따옴표 같은 문장 부호를 사용하는 스타일, 유독 빈번히 인용하는 문구와 문장을 구성하는 전반적인 흐름 등 각자만의 자국이 남는다고 할까. 그런 체향 같은 것이 글에도 있다.
나만 쓸 수 있는 나만의 글 같은 뻗대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조식을 먹기 위해 내려온 호텔 1층의 카페 Ø12에 앉아 있는 이른 아침. 이제 막 8시가 넘었는데 만석인 이곳에서 동화 <파랑새>의 교훈을 떠올렸고, 이런 비슷한 상황이면 늘 <파랑새>를 빗대어 글을 써왔다는 것이 생각 나서다. 그걸 알면서도 이 이상의 것을 떠올리지 못한 지금. 어쩔 수 없이 내 자국 같은 문장을 쓰고야 만다.
"진짜 파랑새를 집 안에서 발견한 치르치르와 미치르의 마음이 된다. 그렇게 맛있는 아침을 위해 밖을 헤매고 다녔는데 그 맛있는 아침이 바로 내방 밑, 이곳에 있었다니."
내가 막 카페에 들어왔을 땐 빈자리가 있어 바로 앉았는데 그 잠깐 새에 웨이팅을 감수하는 손님들과 자리가 없어 돌아가는 손님들로 문 앞이 우왕좌왕이다. 도착 첫날 호텔 체크인을 할 때 아침 식사를 하고 싶으면 전날 방 번호와 함께 예약하라는 안내를 하더라니 이래서였구나. 아침 날씨가 궂어 멀리 가고 싶진 않아 이곳으로 왔는데 그러길 잘했다. 가까이에서 파랑새를 찾았다.
모닝 플레이트에 커피, 오렌지주스를 함께 주문했다. 테이블을 가득 채우는 넓은 접시에 사워도우빵, 치즈, 햄, 버터, 잼, 계란 등이 담겨 나왔다. 역시 재료를 펼쳐놓은 모양이 먹음직스럽다. 겉바속촉의 정석인 사워도우 빵에 함께 나온 재료들을 다양하게 얹어가며 먹었다. 별 거 없는 것 같은데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나.
하필 입구를 바라보고 앉은 자리라 오래 있을 수 없었다. 빨리 일어나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이 아침을 맛보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까지는 아니고 빈자리를 찾는 그들의 시선이 매서워서다. 오전에 가려던 근교 미술관은 11시 오픈이고, 지금 시간은 겨우 9시라면 가야 할 곳은 정해졌다. 미술관을 가는 동선에 크게 어긋나지 않으면서 오픈 시간이 따로 없는 관광지. 인어공주를 향해 가자.
호텔을 나와 지하철을 탔다. 다음 목적지가 크게 쓰여 있는 우리나라 지하철과는 달라 처음엔 바로 타지 못하고 종착지 이름부터 확인했는데 지금은 방향만 확인하고 바로 탄다. "오늘 또 코펜하겐 씨와 한껏 가까워졌군요." 우리의 만남은 무르익어 가는 중이다.
노래를 들으며 멍하니 서 있는데 제복을 입은 남성이 다가왔다. 티켓 검사를 하는 직원이었다. 코펜하겐 카드 앱을 열어 교통패스를 보여주었더니 기계로 코드를 스캔한 뒤 다른 승객을 향해 갔다. 코펜하겐의 대중교통엔 개찰구가 없지만 이런 무작위 검사로 무임승차가 발각되면 높은 벌금이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양심적으로 티켓을 구매하는 듯했다. 코펜하겐 3일 차만에 처음으로 한 티켓 확인. 잘해 온 숙제를 선생님께 검사받은 기분이다.
유럽엔 3대 허무 관광지로 일컬어지는 곳이 있다. 독일 라인강의 로렐라이 언덕, 벨기에 브뤼셀의 오줌싸개 동상, 덴마크 코펜하겐의 인어공주 동상이 그것이다. 각각이 가진 이야기로 기대감을 안고 방문했는데 실제로 보면 "애걔" 하고 실망한다는 뜻에서다. 그 악평을 익히 들었던 탓일까, 아니면 브뤼셀 오줌싸개 동상에서 매를 먼저 맞았기 때문일까. 바다를 등지고 바위에 걸터앉은 인어공주 동상에 가까워지자마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생각보다 크잖아!'였다.
일부러 그런 건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실망을 전제하고 오는 관광지는 기대를 갖고 오는 관광지보다 실망할 확률이 현저히 낮으니까. 실망할 결심을 하고 왔는데 진짜 실망스러우면 "3대 허무 관광지라더니. 정말이잖아"하고, 생각보다 괜찮으면 "훌륭하잖아?" 할 수 있으니. 세 곳을 허무란 타이틀로 묶은 최초의 사람이 있다면 마케팅 상을 꼭 받아야 한다. 유럽의 3대 허무 관광지인 이 인어공주 동상을 보기 위해 대형 관광버스 여러 대에서 단체 관광객들이 우르르 내렸다.
출판사 별로 인어공주의 결말이 조금씩 다르다지만 내가 어렸을 때 본 책의 결말은 이렇다. 인어공주는 마녀에게 목소리를 바치고 다리를 얻어 왕자를 찾아가지만, 왕자는 자신을 위험에서 구해준 이가 인어공주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오히려 왕자는 이웃 나라 공주를 그 은인으로 착각하고 그녀와 결혼하려 한다. 왕자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왕자의 심장을 찔러야 했던 인어공주는 차마 왕자의 심장을 찌르지 못하고 자신이 물거품이 되는 결말을 택한다.
결말의 충격 때문이었는지 내게 인어공주는 물거품과 동의어다. 어린 마음에도 인어공주의 사랑과 사랑을 위해 택한 결론이 마음이 들지 않았었다. 진짜 인어공주를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저런 바보 같은 왕자가 뭐가 좋다고. 그 짧은 사랑이 뭐라고 죽는 거야.
눈앞의 인어공주는 다리를 꼬리처럼 늘어뜨린 채 사선으로 시선을 내린 처연한 모습을 한 동상의 모습이다. 그 인어공주 앞에서 환하게 미소 지으며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인어공주 동상 주변엔 백조들이 유유히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다. 짙은 회색빛 바다와 미운 오리 새끼의 백조, 그리고 인어공주. 이 모든 게 한 프레임에 들어왔다. 다분 의미심장했다.
약 1시간이 걸려 도착한 오드럽Odrup역은 작고, 예쁘고, 한갓진 외곽의 동네에 있었다. 역에서 두 블록쯤 걸어 나오니 아름드리나무만 늘어서 있는 도로가 나왔다. 여기서 도보로 20분을 가면 미술관이 있는 게 맞다는 거지? 믿을 수가 없어 지도를 다시 확인하는데 지도가 가리키는 방향엔 변함이 없다.
어느새 쾌청하게 갠 하늘. 반팔 티 위에 재킷을 입었는데 재킷이 약간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공기가 따뜻해졌다. 이따금 차가 한 대 겨우 지나가는 인적 없는 도로. 가정집 담벼락을 넘어온 꽃나무의 밝은 색과 지도에 의지한 채 걸었다. 물기를 머금은 나무들의 무거운 기운이 내려앉은 아주 좁은 숲길에서 '진짜 여기 맞는 거겠지?' 의심하며 빠져나오는데 표지판 하나 없이 갑자기 거대한 유람선 같은 건물의 일부분이 보였다. 정말 이런 곳에 미술관이 있었다.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설계한 오드럽가드Ordrupgaard 미술관에 드디어 도착했다.
코펜하겐 카드를 확인받고 미술관 내부로 입장했다. 들어가자마자 본 건 너른 벽 하나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수련이었다. 뭔가 입체감이 느껴진다 싶어 가까이 다가가 보니 작은 레고 조각이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딱딱하고 몰개성한 레고 조각 하나 하난데 그걸 멀리서 바라보면 하나의 회화였다. 모네의 수련을 레고로 오마주한 아이 웨이웨이Ai Weiwei의 대형 작품이었다.
수련을 지나니 르누아르, 고갱, 피사로, 드가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작가들의 그림으로 가득한 전시실이 나왔다. 하나씩 들여다보다 어느 배 그림 앞에 멈춰 섰다. 짧은 붓질로 나누어 그린 바닷물 색 때문이었다. 흰색, 연두색, 주홍색, 갈색, 하늘색, 파란색. 물 위에 뜬 배의 그림자와 태양 빛에 반사되는 바다 표면을 이토록 다양한 색으로 표현하다니. 와인을 한참 공부하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 자연을 경험한 폭이 아주 좁은 탓에 와인을 구분하는 나무의 차이, 열매의 차이, 땅의 차이, 물의 차이를 끝까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화가와 같은 장소에 있었더라도 나는 아마 이 색들을 절대 포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위대한 화가의 눈을 빌어 나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한다.
사실 오드럽가드 미술관보다 더 기대했던 곳은 따로 있었다. 덴마크 디자인하면 떠오르는 핀 율의 집이 바로 이 오드럽가드 미술관과 함께 있었다. 미술관 뒷마당으로 나와 분수대를 끼고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왔더니 아주 작은 규모의 흰 주택이 나타났다. 이곳의 땅을 사고, 집을 짓고, 내부를 꾸미는 그 모든 일을 직접 했다는 핀 율의 집, 핀 율 하우스Finn Juhl House. 오드럽가드 미술관 티켓을 확인받고 내부로 들어갔다.
1940년대의 집이란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곳곳이 세련되었다. 너른 창을 낀 메인 거실은 파란 천의 소파와 비슷한 색의 카펫으로 꾸며두었고, 서재는 벽 전체를 높낮이 다른 선반의 책장과 테이블로, 작업실은 창 아래 긴 테이블이 벽과 벽을 잇고 있었다. 집 전체엔 포인트 되는 조명과 곳곳의 오브제, 그림들로 가득했는데 그 모든 게 어지럽지 않고 조화로웠다. 눈으로 본 걸 그대로 설명할 재간이 없는 내 짧은 글이 아쉽기만 하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런웨이>의 편집장인 미란다는 화보의 드레스에 어울리는 벨트를 고심하며 회의하는 자신들을 향해 마치 비웃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비서 앤디에게 말한다. "네가 입고 있는 스웨터가 단순한 블루가 아니란 것"을. 디자이너 오스카 드 라 렌타가 셀루리언색 가운을 처음 발표한 이후 다른 디자이너로, 백화점으로, 캐주얼 코너로 넘어가 그렇게 네가 입은 스웨터가 된 것이라고.
가구 운명도 같지 않나. 한 명의 디자이너가 선보이는 최초의 최고의 가구. 그걸 다른 디자이너가 차용하고, 조금 더 대중적인 백화점으로, 중저가 매장으로, 온라인 숍으로 넘어가 건너 건너 각자의 집으로 도착하는.
핀 율의 가구가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걸 보면 디자인의 다양한 세계 중 가구 디자인이 가장 수명이 긴 것 같다. 집에서 생활하는 인간의 동선, 반경이란 게 크게 변하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변하지 않은 인간 동선과 반경의 핵심을 핀 율이 정확히 간파한 것일까. 넓지 않은 집인데도 한참을 구경하다가 나왔다. 여행은 결국 아름다운을 탐구하는 행위의 연속이며 내가 보기에 좋은 것들을 눈에 많이 담는 일이라고, 일상이란 변명으로 미뤄둔 그 일들을 짧은 기간 안에 단숨에 채우는 것이구나 싶었다.
충분해진 마음을 담았으니 이젠 다시 코펜하겐 도심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보조배터리를 꺼내는데 응? 으응? 충전 선이 없다. 에이, 설마. 가방 안을 샅샅이 뒤져봐도 역시다. 아침에 나올 때 충전이 끝난 보조배터리만 챙기고 선을 깜빡했나 보다. 내가 이런 실수를 했다고?
어느 여행 유튜버가 그랬다. 여행지에서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 핸드폰이라고. 여권은 재발급받으면 되지만 핸드폰을 잃어버리면 그냥 방법이 없다고. 현재 내 핸드폰 배터리는 20%도 남지 않았고, 나는 지금 지도를 보지 않으면 길을 찾을 수 없는 곳에 와 있고, 이 도시는 교통 패스조차 핸드폰 앱으로 확인한다. 일단 저전력 모드로 바꾼 뒤 목적지에 호텔을 넣고 지도를 캡처했다. 나와 오랜 여행을 함께 한 우리의 의리에 모든 걸 맡긴다. 배터리야,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만 제발 버텨줘.
걸을 여유가 사라져 버스에 탑승했다. Odrup 역에 내려 호텔과 가장 가까운 역에서 내리는 기차를 탔고, 골목을 약간 헤맨 끝에 호텔에 도착했다. 언제 티켓 검사를 할지 몰라 내내 들고 있던 핸드폰의 배터리가 막 12%로 떨어졌다. 휴. 십년감수했다.
핸드폰 배터리를 절반쯤 충전하고, 충전 선과 보조배터리를 잘 넣었는지 재차 확인한 뒤 다시 호텔을 나섰다. 엄마의 첫 유럽 여행 도시로 에펠탑과 빅벤 등의 랜드마크가 확실한 파리와 런던을 선택했지만, 여름의 코펜하겐도 괜찮았겠다 싶다. 내가 지금 향하는 곳은 너른 정원을 낀 로젠보르Rosenborg 성. 공간 자체로 외국이란 자각이 시각적으로 단박에 오는 이런 성이 도심 곳곳에 있는 데다 부모님 프로필 사진 찍어주기도 딱 좋게 어딜 가나 꽃이 넘실대기 때문이다. 미술관을 가는 것은 본인과 어울리지 않는 일로 스스로를 규정짓던 엄마를 생각하면 뭔가를 알지 않아도 되는 볼거리가 도처에 있는 코펜하겐을 다음 여행지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이 동선으론 무리겠지만.
로젠보르 성에 도착했더니 가장 가까운 입장 시간이 1시간 뒤라고 한다. 날씨가 좋아 많은 관람객들이 몰린 듯했다. 그 관람객에 나도 포함되는 거니까 어쩔 수 없다. 1시간 뒤 입장 티켓으로 일단 받아 나왔다. 로젠보르 성을 둘러싼 형태의 왕의 정원에서 장미 향을 맡으며 시간을 보낼까 했는데, 바로 근처에 SMK 국립미술관이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미술관에서의 대기를 선택해야지.
여행지에서 1만큼 부지런하면 1이 아닌 2나 3이 남는다. SMK 국립미술관은 사실 이번 일정에 포함해 놓았던 미술관이 아니었다. 주요 소장품이 무엇인지 잘 몰랐고, 루이지애나나 오드럽가드처럼 확실한 의미가 있거나, 뉘 칼스버그 글립토테크처럼 명확한 특징이 있거나 하는 미술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시간 정도 가볍게 둘러볼 예정이라 목가적이고 정적인 분위기의 덴마크 작품들과 종교를 다른 중세 시대 작품들은 패스하고 도착한 프랑스 전시실에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야수파로 분류되는 작품들로 전시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앙리 마티스의 작품이 특히 많아 입이 떡 벌어졌다.
핸드폰 충전 선을 놓고 와 어쩔 수 없이 돌아와야 했던 호텔, 오후 일정이 비게 돼 찾아온 로젠보르 성, 입장까지 시간이 남아 찾은 SMK 국립미술관. 이 정도면 아침에 핸드폰 충전 선을 실수로 놓은 게 아니라, 반드시 놓고 왔어야 했던 것이다. 이곳이 나를 부른 것임에 틀림없다. 콧잔등을 풀색으로, 얼굴의 그늘을 청록색으로. 있지 않아야 할 곳에 자리 잡은 색들. 오늘은 내내 이 색에 대해 생각하는구나. 앙리 마티스, 모딜리아니, 키스 반 동겐, 라울 뒤피 등의 작품이 있는 전시실을 몇 번이고 다시 돌았다.
미술관을 나오기 전 1층 본관 안쪽으로 들어오니 갑자기 다른 건물로 건너 뛴 것 같이 다른 분위기의 공간이 나왔다. 꼭 온실에 들어온 것같다. 유리 천장에선 밝은 빛이 들어오고, 그 빛으로 희게 반사된 대리석 복도엔 한껏 몸을 뒤틀린 남성, 아이를 안은 엄마, 키스를 하는 연인 등 다양한 형태의 조각들이 자유롭게 놓여있었다. 작가의 이름과 작품 제목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조각이 공간에 어떻게 녹아드는가만 보였다.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작품의 의미는 완벽히 달라질 수 있다.
시간이 다 되어 도착한 로젠보르 성은 짧게 구경하고 나왔다. 사실 크리스티안보르 궁전이나 크론보르 성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해서기도 했고, 늦은 오후에 예약해 놓은 칼스버그 양조장 투어 시간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서둘러서 이동해야겠다 하고 나오는데 낯익은 에코백을 멘 한 여성을 마주쳤다. 방금 전 SMK 국립미술관에서 나와 비슷한 동선으로 전시를 관람하던 여성이었다. 이 시간에 크론보르 성에 입장했다는 건 미리 티켓을 받았다는 것이고, 그럼 이곳에 먼저 왔다가 대기 시간을 확인하고 미술관을 찾았던 것일까.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웃음이 났다. 우리 각자, 우리 스타일대로 마지막까지 여행 잘합시다.
덴마크에서 반드시 먹어야 하는 게 핫도그였다면, 반드시 마셔야 할 것도 있다. 바로 덴마크 맥주 칼스버그다. 코펜하겐엔 칼스버그 양조장 투어를 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칼스버그 비지터 센터란 이름으로 운영하다 몇 년간의 리뉴얼 끝에 새롭게 오픈한 홈 오브 칼스버그Home of Carlsberg가 그곳이다. 홈 오브 칼스버그는 시간대별로 입장객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어 방문 전 사전 예약이 필수였다. 맥주 시음은 필수였기 때문에 늦은 오후로 예약을 마쳐두었다.
이름도 칼스버그인 역에서 내려 조금 걸으니 포르투의 동 루이스 다리와 비슷한 모양의 아치형 다리가 나왔다. 그곳을 기점으로 오른쪽으로 꺾자 커다란 굴뚝이 달린 벽돌 건물이 나타났다. 칼스버그 양조장이었다. 비어가르텐 같은 마당에서 맥주를 마시는 사람이 몇몇, 대기하는 사람이 몇몇 있는 아주 한적한 모양새였다. 키오스크에 예매한 내역을 입력하니 입장 팔찌가 나왔다. 손목에 입장 팔찌를 두르고 오픈을 기다렸다. 같은 시간대에 약 10명 남짓의 사람들이 관람하는 듯했는데 그중 한국인 부부가 있어 내심 반가웠다.
시간에 맞춰 입장을 하니 조도를 낮춘 공간 가운데에 놓인 바가 보였다. 그곳을 관람객이 둘러싸자 소주잔보다 조금 큰 잔에 맥주를 따라 한 잔씩 나누어주었다. 내부는 자유롭게 관람이 가능하며, 체험형 기계에 손목 팔찌를 태그 하면 큐알 코드에 사진과 영상이 저장된다는 설명이 이어진 뒤 다 같이 모여 건배를 했다. 치얼스. 시작을 알리는 인사였다.
홈 오브 칼스버그에서 주요 양조 과정을 설명하는 동선 이상으로 공들여 놓은 곳이 창업자 부자(父子)가 얼마나 미술을 사랑했는지, 그 결실로 어떻게 뉘 칼스버그 글립토테크를 탄생시켰는지 설명하는 공간이었다. 오전에 보고 온 인어공주 동상도 바로 이 칼스버그 창업자의 아들 카를 야콥슨이 제작을 의뢰해 코펜하겐에 기증한 것이다. 코펜하겐을 예술의 도시로 한 층 도약시킨 데에 일조한 기업이라는 굉장한 자부심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2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맥주 회사답게 양조 과정에서부터 로고와 포스터 이미지의 변천사, 아스널 축구팀 후원 내역 등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있었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나오니 넓은 펍이 나왔다. 양조장 투어를 마치고 나면 생맥주 한 잔을 더 무료로 마실 수 있었다. 네 개의 탭 중 가장 기본인 라거를 주문해 시원하게 마셨다. 칼스버그 병 모양의 병따개 마그넷을 기념품으로 구입했다. 생각해 보니 또 점심을 건너뛰고 맥주를 마셔버렸다. 맥주가 허기를 느끼게 하는 건가, 감춰있던 허기를 불러일으키는 건가. 어쨌든 이런 허기엔 역시 핫도그를 먹어야 했다.
코펜하겐 시청 앞에 있는 두 개의 핫도그 트럭 중 한 곳에서 핫도그를 샀다. 부드러운 빵에 매콤한 붉은 소시지와 재료, 그 위에 바삭한 칩 토핑을 올린 핫도그였다. 먹으면서 알았다. 각 핫도그 트럭마다 핫도그는 전부 다르게 맛있겠다는 걸. 핫도그 트럭을 도장 깨기 하듯 다니며 먹어봐도 좋겠다. 배가 고픈 줄 몰랐는데 순식간에 핫도그 하나를 해치웠다.
마트에 들러 와인, 샐러드, 치즈 등을 구입해 돌아왔다. 잘 모르는 와인으로 일부러 구입했는데 한 입을 마셔보니 영 취향이 아니라 그대로 캡을 닫았다. 입맛에 맞지 않아도 아까워서 억지로 다 먹던 여행은 지나왔다.
와인을 마시며 하루를 정리하려고 했는데 하는 수 없지. 창가 옆 핀 율 소파에 앉았다. 핀 율 하우스에 다녀온 이후라 그런지 소파가 더 예쁘고, 편하고 그런 것 같다. 수첩을 꺼내 첫 줄을 적었다.
여행 11일 차, 2024년 8월 25일.
회사원의 삶에 익숙해진 이후부턴 하루의 단위를 날짜가 아닌 요일로 셈했다. 출근을 해야 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토요일과 일요일. 내 일주일은 주중과 주말, 두 종류로만 구성되었다.
여행지에선 주중과 주말의 차이가 없다. 모두 여행하는 하루의 연속일 뿐이다. 대신 매일의 날짜는 정확히 체크해야 한다. 도착하고 떠나는 날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이 출근하는 요일인지 출근하지 않는 요일인지가 아닌, 오늘이 호텔을 체크아웃하는 날짜인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하루의 단위를 요일이 아닌 날짜로 셈한다. 여행이란 수단 하나를 꿰찼더니, 이런 다름이 나타났다.
오늘이 며칠인지, 날짜를 상기하는 하루를 살았다. 때론 이런 사소한 이유로도 떠나 올 이유가 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