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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Sep 19. 2024

여름, 북유럽 09

여름, 북유럽 09


여행이 좋은 건 삶에 수반되는 고통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어디에서 무엇을 먹을지가 가장 큰 고민일 수 있는, 끝이 정해진 일정. 일상에서 이따금 불필요한 것으로 분류되는 욕구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는 날들. 여행지에 와 있는 그 자체로 충족되던 시절은 이미 지났고, 여행에서 새롭다고 느끼는 역치의 기준값도 높아져버렸지만 그럼에도 여행에 면역이 도무지 생기지 않는 이유다. 나는 현재 여행 중이다라는 문장을 적었다. 이 문장에 육체를 결박시키고 빠져나온 영혼의 시선으로 문장을 바라본다. “나 지금 여행 중이구나? 나 여행 중이야!”


오슬로에 막 도착했을 땐 티켓 검사 없이 트램을 타는 방식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건물의 생김새도, 계산 시 팁을 추가하는 방식도 모두 기록의 대상이었다. 도처에 자극들이 넘쳐났다. 그러나 세 번째 도시에 온 지금은 쓰는 속도도, 쓰는 내용도 현저히 줄었다. 이미 적힌 내용 이상의 것이 있어야만 휴대폰 메모장이나 노트를 펼친다. 분량이 점점 줄어든다. 다만 쓰지 않는 동안에도 내 발은 착실하게 땅을 밟으며 걸었고, 사진첩엔 글을 대신한 사진들이 남겼다. 없앨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 분량을 채울 기록이 된다.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코펜하겐의 날씨. 비가 갑자기 내리다가 갑자기 그쳤다가, 갑자기 해가 났다가 갑자기 추워졌던 어제의 날씨와 오늘의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종일 내릴 비는 아닐 것 같다. 일단 우산을 챙겨 나왔다. 여행객은 비가 오면 더 강해진다. 비 따위, 바람 따위 오늘의 코펜하겐을 앗아갈 수 없지 하고. 비라도 그치면 당장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는 마음 자세는 덤이다.


아침 커피를 위해 도착한 곳은 코펜하겐 중앙역 건너편의 러그 베이커리Rug bakery. 쇼케이스에 담긴 윤기 넘치는 빵 중에선 뱅오쇼콜라를, 음료 중에선 반가운 이름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골라 주문하고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테이블 위엔 메뉴판이 놓여 있었는데 쇼케이스에 있던 빵 말고도 아침으로 시킬 수 있는 메뉴가 다양하게 적혀 있었다. 그러다 ‘자리를 먼저 확인한 뒤 주문 시 테이블 번호를 알려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보았다. 


좌석도, 메뉴도 먼저 확인했어야 했구나. 그럼 내가 시킨 건 어떻게 확인하지?라고 생각하던 중, 쟁반을 든 직원이 다가와 뱅오쇼콜라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 테이블에 놓아주었다. 유일한 동양인임이 테이블 번호를 대신할 수 있었나 보다. 베어 불면 바삭 효과음이 나는 달콤한 뱅오쇼콜라에 쌉싸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역시 실패가 없는 조합이다. 다른 테이블을 보니 모닝 플레이트라는 덴마크식 아침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빵에 햄, 치즈, 계란, 버터 등 재료는 별다를 게 없는데 그걸 펼쳐놓은 모양새가 예쁘다. 특히 반숙 계란을 세워놓는 저 잔 모양의 그릇. 저 계란 그릇을 반드시 사야지. 잊지 않으려 메모장을 열었다. 오늘의 첫 문장이 되었다.


이 베이커리가 있는 벽돌 건물은 빌라 코펜하겐이라는 5성급 호텔로 이 카페는 호텔의 조식당을 겸하고 있는 듯했다. 호텔 투숙객과 외부 손님이 합쳐져 이른 시간인데도 웨이팅이 생겼다. 오늘 오전에 헬싱외르를 갈 예정이라 중앙역 근처에서 아침을 먹을 만한 적당한 곳 없을까 하며 찾은 곳인데. 이렇게 인기 있는 곳을 잘도 찾은 내 검색력에 다시 한번 박수를. 한 시간이 넘게 앉아 있다가 나왔다. 코펜하겐 중앙역은 늘 누군가 떠나고 누군가 도착하는 공간답게 넓은 역사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가까운 전광판에서 헬싱외르를 찾으니 10분 뒤 출발하는 기차가 바로 있었다. 플랫폼에 내려와 빈자리를 찾아 앉으니 9시 정각에 딱 맞춰 기차가 출발했다. 기차는 약 1시간 정도 지나 북동부 항구도시 헬싱외르Helsingør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지하철 역보다 작은 규모의 종착역. 나를 포함한 몇몇의 관광객들이 내렸다. 지도를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출구를 나오니 저 멀리 크론보르Kronborg 성의 모습이 바로 보였기 때문이다.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는 정도로 빗줄기가 약해졌고 거센 바닷바람이 불어 우산을 꺼내지 않았다. 동그랗게 말린 앞머리가 비에 젖고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흩날리지만 이상한 해방감이 들었다. 자유로운 양팔을 흔들며 걸었다.


코펜하겐 도심에서 꽤 떨어진 위치지만 반드시 크론보르 성을 방문해야 했던 이유. 바로 이 크론보르 성은 셰익스피어 4대 비극 <햄릿>의 실제 배경이기 때문이다. <햄릿>의 원제는 <덴마크 왕자 햄릿의 비극>. 햄릿의 성 엘시노어elsinore는 바로 헬싱외르의 영어식 표현이다. 입구에서부터 문을 여럿 지나 성으로 들어왔더니 조용하던 헬싱외르 역과 달리 성 마당은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미음 자 모양을 띄고 있는 성 내부로 들어와 이 성이 활발히 기능했을 시절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방과, 크론보르 성을 다룬 회화 작품들을 전시해 둔 방을 지났다. 


그렇게 몇 개의 방들을 지나니 방금 전 전시물로 본 복장을 그대로 입은 직원이 관람객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직원의 복장 하나로 이 성이 확 사는구나. 사진을 찍고 이동하는데, 이번엔 과거의 복장을 입은 두 사람의 남성이 있었다. 깨진 액자를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돌아다니며 대화하는 두 사람은 단순히 과거의 복장을 입은 직원이 아니라 햄릿의 장면을 연기하고 있는 연기자들이었다.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을 위해 매년 6~8월에 배우들이 성 곳곳에서 햄릿 공연을 펼치는 <햄릿 라이브>의 일부였다. <햄릿>의 배경지로 성 내부를 구경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햄릿을 감상하게 하는 것이다. 성을 완벽하게 활용하는 방식. 명작에 대한 존중과 자부심은 오래된 궁의 바랜 역사를 관람하는 것 이상을 체험하게 했다.


햄릿의 가장 유명한 대사를 꼽으면 모두 이 문장을 말하지 않을까.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 문장이 적힌 티셔츠를 조카 선물로 구입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라면 일단 살아보면서 그 답을 확인해 보라는 이모의 마음을 담아.


성 밖으로 나와 거센 파도가 이는 바다 앞에 섰다. 멀리 건너편으로 육지가 보인다. 해안을 따라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의 저 곳은 스웨덴이었다. 이 위치 탓에 방어 시설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크론보르 성. 나라의 끝에서 나라의 끝을 바라보며 오래 서 있었다.


다시 헬싱외르 역으로 향하는 길. 여길 지나갈 때 관광객 몇 명이 사진을 찍는 부두가 있어 무얼까 했는데, 그곳에 남자 형상의 인어 조각상이 있었다. HAN이란 이름을 가진 스테인리스 스틸의 남자 인어. 안데르센의 대표 동화이자 덴마크 국가적 상징인 인어 공주의 성별을 바꾸고, 스테인리스 스틸로 된 몸의 표면이 거울이 되어 마을과 크론보르 성의 이미지를 반사, 왜곡시키길 바랐다는 작가의 인터뷰를 읽었다. 인간인 왕자와 함께 하고 싶어 목소리 대신 다리를 선택하였지만 끝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왕자의 심장을 찌르지 못해 물거품이 되어 버린 인어 공주. 성별이 바뀐 인어 왕자를 보고 있으니 그 비극이 일순 희석되어 버린다.




헬싱외르 역에서 코펜하겐으로 오는 길. 코펜하겐 중앙역이 아닌 그 중간의 훔뢰백Humlebaek역에서 내렸다. 작은 상점 몇 곳을 지나면 곧바로 가정집들로 이어지는 아주 작은 동네지만 헬싱외르 역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함께 내렸다. 나를 포함해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걷는 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이란 수식어가 붙은 루이지애나 미술관이 우리의 목적지였다.


잘 정돈된 작은 마당을 끼고 있는 집들을 구경하며 10분 넘게 걸으니 미술관 주차장이 나왔다. 동네는 이렇게 작고 조용한데 주차장엔 빈자리가 없었다. 미술관도 마찬가지였다. 전시실은 공간마다 사람들로 가득하고, 북토크가 예정된 미술관 정원의 텐트들에는 대기하는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미술관 카페에서 점심을 하려고 했는데 빈자리가 나려면 족히 1시간은 걸릴 것 같았다. 접근성만이 최고의 가치는 아니다. 전시가 훌륭하거나 공간이 지닌 분위기가 좋거나 전시가 훌륭한데 공간이 지닌 분위기까지 좋으면 사람들은 저절로 모인다.


사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회화인, 그 놀라운 디테일 앞에 연신 감탄했던 프란츠 게리치Franz Gertsch 작품들이 있었고, 창 밖 호수를 든든한 뒷 배경으로 삼아 배에 품은 알을 보호하는 루이스 브루주아의 엄마maman 거미가 있었다. 위태로운 자코메티의 인간도, 이브 클랭의 파랑도 만났다. 바다를 향해 디귿 자로 세워진 단층의 미술관이지만 중간중간 정원으로 빠질 수 있는 문들이 많아 금세 방향과 길을 잃었다. 그 잃음이 기꺼웠다. 미리 확인하지 않은 동선 탓에 어떤 공간이 나올지, 어떤 작품이 나올지 예측할 수 없이 돌아다녔다.


미술관 정원엔 조각들도, 북토크를 위한 몽골 텐트도 있었지만, 와인과 맥주를 파는 간이 매대도 있었다. 그곳에서 생맥주 한 잔을 사서 알렉산더 칼더의 조형물과 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계단에 앉았다. 언제 이 풍경을 안주 삼아볼 수 있겠는가.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잔디를 뛰어다니고, 힘 있게 부딪히는 거센 파도 소리가 배경음처럼 들린다. 북토크가 곧 시작되는지 사람들이 천천히 텐트 내부로 입장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통째로 들어 가지고 가고 싶다.


루이지애나 미술관은 전시 포스터가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 뮤지엄 샵 한쪽은 그런 사람들의 수요를 알고 있다는 듯 한 면을 둥글게 말린 포스터를 가득 채워 놓고 있었다. 전용 모니터를 통해 전체 포스터 이미지를 확인한 뒤 그 번호를 찾아 고르면 되었다. 더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손은 착착 모니터 화면을 넘겼다. 결국 88년도 뭉크 특별전 포스터와 데이비드 호크니 특별전 포스터를 고르고 말았다. 이건 안 사는 게 손해 맞다. 왜 이곳이 그 수많은 미술관들을 제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이란 수식어를 얻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체험했다. 이곳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최고의 조합이었다.




호텔로 돌아와 사 온 포스터와 기념품들을 정리하고 잠깐 누워 있다가 알았다. 아침에 뱅오쇼콜라 하나와 커피를, 점심엔 생맥주 한 잔만 먹었다는 걸. 눈에 많은 걸 담느라 배가 고픈 줄도 몰랐었나 보다. 뭘 많이 먹지 않았다는 걸 자각하고 나니 갑자기 허기가 밀물처럼 밀려와 벌떡 일어났다. 


코펜하겐을 걷다 보면 자주 마주치는 것은 다양한 핫도그 트럭이다. 핫도그를 처음 만든 나라가 덴마크 -전 세계에 체인을 둔 스테프 핫도그도 덴마크 태생이다- 라서다. 그러므로 코펜하겐에서 반드시 먹어야 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핫도그였고, 이 허기를 달래줄 음식으로 핫도그는 아주 적합한 메뉴였다. 찜해둔 스트뢰에의 DØP 핫도그 트럭에서 가장 기본 핫도그로 주문해 거리 공연을 향한 벤치에 앉았다. 바삭하게 구운 빵과 소시지, 소스를 베어 무니 말해 뭐 해. 맛이 없을 수가 없다. 말 그대로 게 눈 감추듯이 먹었다.


스트뢰에를 조금 걷다 보니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조금 모습을 보이더니 정말 거짓말처럼 하늘이 맑게 개었다. 이럴 때 향해야 할 곳이 있었다. 이 여름, 북유럽을 여행지로 선택하게 한 그 풍경이 있는 곳. 새로운 운하, 뉘 하운으로.


이 글의 첫 편, 두 번째 문장은 아래와 같다.


불현듯 북유럽을 가야겠다- 고 생각한 계기도 그랬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스치듯 본 뉘하운 운하의 알록달록한 건물 색깔이 여상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새파란 하늘 아래 빨갛고 노랗고 초록색인 건물들이 순차적으로 늘어서 있는 거리, 닻을 접은 요트들의 행렬, 운하 쪽으로 다리를 뻗고 앉아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 그 전체의 조화가 반짝 빛을 냈다. 한 번 그 조화를 자각하고 나니 그때부터 유독 코펜하겐을 다룬 풍경이 유독 잘 포착됐고-역시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 그러면 가야 했고, 그 먼 코펜하겐을 갈 거면 주변 국가의 도시도 함께 돌아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트뢰에의 끝자락에 다다르니 사람들의 인파가 달라짐이 느껴졌다. 다 왔구나. 이 여행을 하게 한 최초의 자리에.


영상과 사진으로 미리 너무 많이 봐 온 탓에 ‘이곳이다’ 하는 느낌이 덜 하면 어쩌지 했는데. 모든 걱정이 무색했다. 뉘하운 운하는 뉘하운 운하였다. 길게 늘어선 1층 식당의 테라스, 그 테라스를 가득 채 운 사람들, 식기가 달그락거리고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 빨갛고 노랗고 파란 건물 색의 조합, 지나가는 투어 보트를 가득 채운 관광객들의 손인사. 다리엔 운하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사람들의 웃음 사이를 걸었다. 걸음마다 눈에 담기는 각도가 달라졌다. 걸음걸음마다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시인지 가늠이 안 되는 여름의 빛. 이 여름의 긴 낮을 만끽하는 데엔 역시 뉘하운 운하구나.


다시 호텔로 돌아오는 길. 일룸 쇼핑몰로 들어왔다. 이곳의 옥상에 루프탑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다. 지도에 표시한 대로 걸으니 인테리어 소품을 파는 가게들을 지나 이탈리안 식당이 나왔다. 와인 한 잔만 하기엔 너무 식사 시간인 데다 야외 좌석은 그마저도 대부분 예약석이었다. 이대로 그냥 돌아갈까, 하며 나오는데 손님이 없는 카페 한 곳이 보였다. 슬쩍 내부를 둘러보니 야외 좌석도 마련되어 있고 와인 메뉴도 있다. 카운터에 있는 직원에게 와인 한 잔만 시켜 야외 좌석에 앉을 수 있냐 물었더니, 안 될 이유가 대체 어디 있냐는 표정이 답을 대신했다.


쇼비뇽 블랑으로 주문해 잔을 받아 든 뒤 야외 좌석으로 나왔다. 어제 간 헤이 하우스와 분수대 광장, 니콜라이 갤러리의 첨탑이 보이는 위치였다. 이렇게 좋은 뷰를 가진 곳인데 손님이 하나도 없다니, 여길 발견 했다니. 여행에서 만나는 작은 우연은 사람을 쉽게 감동시킨다. 풍경을 안주 삼아 와인 한 잔을 금세 비웠다. 오늘 너무 좋은 안주만 챙겨 마셨네. 빈 잔을 정리하고 나오니 아주 다행히 손님들이 하나 둘 들어오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와 씻고 핀 율 소파에 앉았다. 어제 절반 남겨 놓은 리슬링 와인을 꺼냈다. 오늘 메모엔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었는지에 대한 내용만 적혔다. 역시, 이 이외의 고민이 파고들 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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