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북유럽 08
할 줄 아는 게임도 없고 좋아하는 게임도 없지만 테트리스만큼은 예외다. 최대한 빈 공간 없이 차곡차곡 예쁘게 쌓는 행위 그 자체를 좋아해서다. 마트에서 장을 보면 장 본 내용물을 박스에 담는 것은 언제나 내 몫이었고, 서랍장 정리는 내게 일종의 놀이였다. 주어진 공간의 부피를 최대한으로 활용할 때 오는 희열. "이게 다 들어갈까?" 하는 짐을 빠짐없이 넣고 딸깍 소리 나게 캐리어를 잠갔다. 미션 클리어. 역시 나는 게임 중 테트리스가 제일 재밌다. 물론 오늘 기차를 한 번 갈아타는 먼 길을 가야 하고, 벌써 조금 두려운 무게인 데다 아직 일주일 가까운 여행 기간이 남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자.
방문 옆에 잘 잠긴 캐리어를 세워두고 일찍 아침을 먹으러 갔다. 오늘은 어제와 반대편 창가에 자리를 배정받았다. 빈 병에 가득 담은 탄산수와 오렌지 주스를 먼저 가져다 놓고 와 접시를 들었다. 보통 호텔 조식이란 게 비슷비슷한 거라지만 이렇게 3일 내내 메뉴 하나 바뀌지 않는 조식은 처음인 것 같다. 3일 만에 흰쌀밥이 질려 다시 호밀빵을 담았다. 버터 대신 크림치즈를, 후무스 말고 샐러드를 곁들였더니 이 편이 훨씬 새로운 맛이었다. 13층에서 내려다보는 도심의 풍경도 익숙하고, 조식의 구성도 익숙하다. 여행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 익숙이 붙었다는 건 역시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 식사를 마치고 짐을 챙겨 체크아웃을 했다.
스톡홀름에 도착해 호텔로 걸어왔던 길을 반대로 거슬러 다시 중앙역에 왔다. 물을 하나 사서 전광판이 잘 보이는 의자에 자리 잡았다. 내가 타야 하는 건 9시 22분 말뫼행 기차. 얼마 지나자 내가 타야 할 탑승구 번호가 전광판에 표시되었다. 아직 출발 시간이 여유가 있어 조금 더 있다가 내려가야지 하는데 그새 플랫폼 번호가 바뀌었다. 출발 15분 전. 더 이상 바뀌지 않는 번호를 확인하고서야 플랫폼으로 이동했다. 이미 정차되어 있던 열차 앞에서 기다리다 문이 열리자마자 재빨리 올라타 손이 닿는 짐 칸에 캐리어 넣기를 성공했다. 무거움을 얻은 자여, 반드시 속도를 탐하라.
SNS에 글도 쓰고, 구독한 유튜브 채널의 새 영상 한 편도 다 봤는데 열차는 요지부동이다. 시간은 이미 9시 3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열차 앱에서 연착된다는 알람이 왔다. 그렇게 조금 더, 조금 더 늦는다더니 결국 1시간이 넘게 지체되어 출발을 했다. 기차 연착과 취소가 잦은 유럽이라지만 특정 시간에 특정 도시에 반드시 도착해야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특정 시간에 특정 도시에 반드시 도착해야 할 일이 별로 없는 것인가, 연착으로 늦었다고 하면 "늘 있는 일이죠"하며 봐주는 것인가. 어쨌든 그나마 1시간 연착으로 정리되어 다행이었다.
전 두산 베어스 투수인 유희관은 느림의 미학을 담은 공을 던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정확한 제구력으로 통산 101승을 거두었지만 평균 구속은 약 130km/h. 140~150km/h을 던지는 프로의 세계에서 아주 드문 이력을 가진 투수다. 그런 유희관을 투수로 상대했던 이승엽이 유희관의 공에 대해 "공이 기다리고 기다려도 안 온다"라고 했다는 인터뷰는 이미 유명한 일화다. 잘 만큼 잤고, 이제 더 볼 새 영상도 없는데 현재 기차의 위치를 확인한 나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도착지인 말뫼가 "기다리고 기다려도 안 온다"라고. 나는 오늘 시베리아 횡단 열차나 슬리핑 기차에 대한 로망을 접었다. 중간 경유지를 들를 때마다 출발이 성실하게 늦어진 탓에 당초 예상 시간보다 거의 2시간이 지나 약 7시간 만에 말뫼에 도착했다. 움직이지 않는 땅에 서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당초 내가 예약했던 건 9시 22분 스톡홀름 중앙역 출발, 14시 33분 코펜하겐 중앙역 도착인 직행 기차였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타고 온 기차는 원래 말뫼가 아닌 코펜하겐 중앙역이 종점이었다. 말뫼 이후 이어지는 노선이 캔슬되었다는 메시지를 받아 스톡홀름에서 말뫼까지, 말뫼에서 코펜하겐 중앙역까지 기차를 두 개로 나누어 부랴부랴 재예매를 했다.
그리고 티켓을 재예매한 뒤 알았다. 당신이 코펜하겐 중앙역행 기차를 예매한 승객이며 코펜하겐 중앙역이 목적지인 것이 변함이 없다면 굳이 이 티켓을 취소할 필요 없이 종착지인 말뫼에서 내린 뒤 코펜하겐 중앙역행 외레순Öresundståg 열차를 타면 된다는 안내가 메시지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걸. '혹시 몰라 병'에 '빨리빨리 정리해야 하는 병'을 함께 가지고 있는 나는 부분 노선이 취소되었다는 내용만 확인한 거였다. 내가 부랴부랴 다시 예매했던 두 번째 티켓은 13시 52분에 말뫼를 출발하는 코펜하겐 중앙역행 열차. 그러나 2시간 연착 앞에 서두른 재예매는 그저 무소용이었다.
일단 도착해서 티켓을 알아보자, 싶었는데 이 연착으로 코펜하겐 중앙역까지 가는 열차를 놓쳤다면, 예매한 시간과 상관없이 이후 도착하는 코펜하겐 중앙역 행 기차를 타면 된다는 안내를 받았다. 말뫼에 도착해 코펜하겐 중앙역 이름을 확인하고 이동했다. 캐리어를 든 많은 사람들과 함께였다. '티켓을 다시 구입 안 해도 되고. 되게 합리적인 시스템이네' 하다가 깨달았다. 급작스런 노선 취소나 변경에 대해 합리적 매뉴얼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차 연착이나 취소가 어차피 잦으니 "그냥 다음 거 타" 하는 거구나, 그래서 처음부터 굳이 예약을 다시 할 필요도 없었던 거구나, 하고.
스웨덴 말뫼는 스톡홀름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보다 코펜하겐 여행 계획을 세운 사람들에게 더 익숙한 이름일 것이다. 코펜하겐에서 가볍게 다녀올 만한 근교 도시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말뫼는 스웨덴의 도시지만 덴마크 코펜하겐 중앙역까진 두 정거장이면 도착한다. 코펜하겐 공항은 고작 한 정거장이다. 말뫼 사람이 해외를 간다면 코펜하겐 공항을 이용할 것이다. 스톡홀름보단 코펜하겐을 지리적으로 훨씬 가깝게 느낄 것이다. 국적과 생활 반경이 전혀 상관이 없는 삶을 상상해 본다. 물론 잘 되지 않는다.
창 밖으로 흐린 하늘 아래 먹물 같은 바다가 펼쳐졌다. 바다 위를 열심히 달리는 열차. 이 바다 중간에서 나는 또 국경을 넘었다. 이 지도상의 위치를 자각하고 있는 건 역시 또 나 한 사람뿐인 것 같다.
여행지의 첫인상은 어떤 날씨의 어느 시간에 도착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점심이 훌쩍 지난 오후, 흐린 하늘, 이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 중앙역에 도착해 막 마주한 코펜하겐은 노란색 필터를 낀 듯 뿌옇고 축축해 위태롭고 서늘한 분위기를 풍겼다.
유튜브 채널 <뜬뜬>의 핑계고에 나온 배우 이동욱이 그랬다. 혼자 있는 게 너무 편해져 연애를 하려면 일단 상대와 친해져야 하는데 그것조차 너무 까마득하다고. 나도 그렇다. 나와 평생을 모르고 살던 어떤 이와 연애를 위한 과정을 밟는 걸 생각하면 일단 까마득히 귀찮다. 언제 만나서, 언제 친해지고, 그러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며, 말줄임표.
그런데 '어떤 이' 대신 '여행지'를 넣으면 얘기는 달라진다. 나와 평생을 모르고 살던 여행지와 연애를 위한 과정을 밟는 걸 생각하면 일단 설레기부터 한다. 첫인상은 차가웠는데 조금 알고 나니 실제론 장난스러운 얼굴을 할 줄 안다던가, 바다를 품은 큰 도시의 포부만 있는 줄 알았는데 골목이 촘촘하게 이어지는 아기자기함을 함께 갖고 있다던가. 만나서, 친해지고, 시간을 들일 때 발견하게 되는 모습들. 여행지와 여행를 시작하는 건 도무지 질리지가 않는다. 이 축축하고 위태롭고 서늘한 첫인상이 코펜하겐 전부의 모습이 아닐 것임을 안다. 우린 아직 처음 만났으니까. 시간이 필요하니까.
방향을 가늠해 캐리어를 끌어 중앙역을 나섰다. 약 일주일간 코펜하겐에서 묵기 위해 선택한 호텔은 호텔 알렉산드라Hotel Alexandra. 가구부터 조명, 포스터 등 5, 60년대의 덴마크 오리지널 빈티지를 경험할 수 있는 호텔이란 설명에 더 검색할 필요도 없이 바로 예약을 마친 곳이었다.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마치니 묵직한 열쇠를 건네받았다. 카드키가 아닌 호텔은 정말 오랜만이다. 지니고 다니긴 힘들 테니 외출할 땐 카운터에 맡기면 된단다. 호텔 로비엔 핀 율, 베르너 팬톤, 아르네 야콥센 등 이름만 들어도 어마어마한 가구와 소품들이 가득했다.
열쇠로 문을 열어 방에 들어왔다. 삐걱이는 나무 바닥, 1층 카페 안뜰 정원이 내려다 보이는 커다란 창문, 너른 화장실, 빈티지한 수전. 거기에 핀 율의 소파와 미니멀한 목재 가구, 은은한 톤의 조명들까지. 50년대의 덴마크 집을 느껴보라는 설명서가 책상 위에 놓여있었다. 빈틈없이 들어찬 캐리어를 풀어 짐을 정리했다. 이 방에 내 흔적이 곳곳에 스며들었다.
큰 이동을 마치고 나니 이제야 허기가 느껴졌다. 얼른 밥부터 먹어야겠다. 넷플릭스 <필이 좋은 여행, 한입만> 시리즈 중 코펜하겐 편에 나왔던 가솔린 그릴Gasoline Grill의 수제 햄버거가 너무 맛있게 보여 코펜하겐에 가면 제일 먼저 먹을 곳으로 일찌감치 정해놓았다. 코펜하겐 시청 옆의 호텔로 예약을 했다는 건 이곳이 중심가란 뜻이고, 중심가에는 가솔린 그릴이 없을 수 없다는 것. 맛있게 먹을 준비를 하고 호텔을 나섰다.
코펜하겐 시청에서부터 코펜하겐의 대표 명소 뉘하운 운하까지는 보행자 거리인 스트뢰에Strøget가 길게 이어져 있다. 거리 양 쪽으로 기념품 샵과 옷 가게, 덴마크 디자인 상점, 카페 및 레스토랑이 즐비해 가솔린 그릴로 곧장 향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그중 에코백만 전문으로 파는 상점에서 기가 막힌 문장을 찾았다. I only drink CHAMPAGNE on two occasions. When I'm in love and when I'm not. 나의 때로 치환하자면 전자엔 덕질, 후자엔 일상에 해당된다. 그래서 내가 매일 그렇게 샴페인을 마셨었나.
높은 첨탑을 가진 갤러리와 핫도그 트럭, SPA 브랜드를 지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오니 건물 크게 가솔린 그릴이란 초록 네온사인이 보였다. 그릴에 고기가 구워지는 소리와 냄새가 도착 전부터 나고 있었다. 가장 기본인 햄버거와 감자튀김, 콜라를 고르고 수제로 만든다는 감자튀김 소스도 별도로 주문했다. 매장은 서서 먹을 수 있는 테이블만 있을 정도로 소담한 크기였는데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임에도 손님은 끊이지 않고 들어왔다. 내 이름이 불리고 과장 보태 내 얼굴만 한 사이즈의 햄버거가 나왔다. 매콤한 소스에 감자튀김을 찍어먹은 뒤 입 운동을 하고 햄버거를 베어 물었다. 한 입만에 이곳의 인기가 이해가 되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전 세계로 먹으러 다니는 직업이라니. 백종원 아저씨와 더불어 필 아저씨가 완벽히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가솔린 그릴 바로 옆에 재밌는 곳이 있었다. 포스터 앤 프레임Poster & Frame. 말 그대로 포스터를 전문으로 파는 상점이었다. 2층으로 된 작은 가게로 들어가니 예쁜 포스터가 벽에도, 바닥에도, 서랍에도 가득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걸린 명화가 아닌, 지역 작가나 아마추어 작가 혹은 떠오르는 신예 작가들이 작업한 작품들로 만든 포스터인 듯했다. 특색 있고 개성 있는 그림들이 많았다. 구석구석 구경하니 사고 싶은 포스터가 수 십 개다. 그러나 내 좁은 집은 이렇게 사 온 포스터들로 이미 포화 상태고, 이번 여행에서도 포스터를 벌써 2개나 구입했으니. VINO란 글자 아래 와인을 마시는 두 사람의 얼굴, 그 아래 Lovers라 적힌 포스터 하나만 최종적으로 골랐다. 나중에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면 많은 포스터로 꼭 집을 꾸밀 거라고, 이 VINO Lovers 그림은 바처럼 꾸민 주방의 중심에 걸 것이라는 원대한 꿈을 품은 채.
구매하고 싶은 포스터의 크기를 바꾸고 싶거나 그에 맞춰 액자를 구입하고 싶다면 커스터마이징도 가능했다. 포스터 전문점이라는 게 운영이 가능할까 싶은데 일단 나부터 구입을 마쳤고 -포스터 한 장당 아주 비싼 값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렴하지도 않다-, 나 뒤에 들어온 몇 손님들도 꽤나 고심하여 포스터를 고르고 있다. 이런 가게들이 힘을 얻고 오래 운영을 해나갈 수 있는 도시인 거겠지. 동그랗게 말린 포스터를 가방에 넣고 나왔다. 가방 끝에 비쭉 삐져나온 모습이 꼭 바게트 같다. 몸이든 마음이든 배부르게 하는 데에 같은 역할을 하니 그렇게 보임 직하다. 다시 골목을 나와 왼쪽으로 꺾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광장이 나왔고 그 광장을 앞마당 삼은 건물이 보였다. 헤이하우스HAY house였다.
모던한 디자인에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의 리빙 아이템을 파는 헤이HAY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브랜드다. 건물 입구부터 "내 디자인 좀 보세요"하는 키치 한 그림들로 층별 안내가 되어 있었다. 헤이하우스는 복층 구조의 넓은 매장에 가구부터 조명, 패브릭과 주방 도구들까지 마치 쇼룸처럼 상품들이 진열해 놓고 있었다. 꼭 인테리어 잡지를 3D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코펜하겐 첫날인데. 하지만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바로 사는 게 맞아. 그래도 짐이 벌써 무거운데. 아주 놀랄만한 가격은 아니잖아. 그렇게 몇 번의 설득과 위안 과정을 거쳐 가운데가 살짝 옴폭하게 들어간 접시 세트를 골랐다. 당연한 결론이었다.
매장이 한산해 여유롭게 구경을 했다 싶었는데 내가 마지막 손님이라서였다. 별생각 없이 들어와 마음에 드는 상품을 고르고 계산을 했는데 이곳의 폐점 시간은 오후 6시였고, 내가 폐점 시간에 거의 다다라 들어왔던 것이었다. 전부 마음에 드는 색깔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최종적으로 흰색으로 골랐을 때 "마음에 드는 걸 찾은 거냐"라고 묻던 점원이 진짜 말하지 못한 속내는 "빨리 결정해. 문 닫아야 해"였을까. 하늘은 아직도 훤하고, 사람들이 한창 붐비는 오후 6시지만 헤이 하우스는 굳건히 문을 닫았다. 식당을 제외하면 스트뢰에의 대부분의 상점이 오후 6, 7시면 문을 닫는다. 저녁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소중한 권리라는 듯.
물가가 전반적으로 높은 북유럽이지만 오슬로와 스톡홀름은 코펜하겐에 비하면 선녀인 도시였다. 여행 기간이 아직 많이 남아 마지막 도시인 코펜하겐에서 구입하려고 미뤄둔 것들이 많았는데. 어쩔 수 없지. 다음에 오면 코펜하겐을 제일 첫 도시로 선택하는 수밖에.
"나는 여행할 때 계획을 세우지 않아. 발 길 닿는 대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하는 편이라도 코펜하겐만큼은 '나는 코펜하겐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가'에 대해 반드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발 길 닿는 대로 다니다간 아주 비싼 비용을 치를 수 있기 때문이다.
코펜하겐에서 가고 싶은 곳을 추리고, 그에 맞춰 전체적인 동선을 짜고 나니 나는 반드시 코펜하겐 카드를 구입해야 했다. 코펜하겐 카드는 유효 기간 내 대중교통 무제한 이용 및 80개 이상의 어트랙션 방문이 가능한 관광 전용 패스다. 있는 동안 최대한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을 방문하고 싶었기에 가장 긴 120시간짜리로 구입했다. 120시간 한정 코펜하겐 프리패스가 생겼다.
점심 겸 저녁이 되어버린 식사도 했고, 쇼핑도 마쳤고, 어차피 구경할 상점들도 대부분 문을 닫은 목요일 저녁. 그렇다면 향할 곳은 여기였다. 목요일에 밤 9시까지 오픈을 하는 뉘 칼스버그 글립토테크Ny Carlsberg Glyptotek 미술관.
뉘 칼스버그 글립토테크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덴마크 맥주회사 칼스버스의 창립자 아들이자 2대 회장인 칼 야콥센이 설립한 미술관으로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의 조각상에서부터 오귀스트 로댕, 인상주의 회화, 덴마크 황금기의 예술품에 이르기까지 1만 여점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지하에 짐을 맡기고 가벼운 몸으로 올라와 코펜하겐 카드 앱에서 발급받은 QR 코드를 제시해 입장했다. 정면의 전시실로 들어서니 입이 떡 벌어졌다. 대규모의 온실이 나타난 까닭이다. 내가 미술관이 아니라 식물원에 들어왔나. 눈부신 빛을 투영하는 유리돔 아래 짙은 녹색의 기다란 이파리를 늘어뜨린 열대 식물이 빼곡하다. 각 나무들의 이름은 전혀 몰라도 확실한 건 여름이 짧은 이 나라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는 것, 이 나무들을 관리하려면 엄청난 손길이 필요하리라는 것이다. 이 공간을 겨울정원이라 부른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한여름의 빛과 색을 머금어 생명력이 넘실대는 이곳에서 긴 겨울의 황량함을 버티어내 보라는 의미에서 일까. 계절도 국적도 일순 모호해져 버린 곳에서 잠시 목적지를 잃었다.
책이나 매체를 통해 자주 접해 온 회화와 달리 나는 조각엔 완벽히 문외환이다. 시대나 국가의 차이도 구분할 수 없고, 이들의 섬세한 차이도 발견해내지 못한다. 그저 이 넓은 전시실에 빼곡히 들어찬 다양한 조각들을 보며 정교하다거나, 진짜 사람 같다거나, 어떻게 그 시기에 이렇게 만들었지 하는 생각만 하며 지나쳤는데, 동굴 벽화에서 만큼은 걸음을 멈추었다. 작품이기 전에 수 세기 전의 기록물이다. 인간은 그것의 형태나 종류와 상관없이 언제나 항상 무엇을 만들고 결국 남겼다. 그리거나 썼다. 그려오고 써 왔다. 기록하려는 의지와 그걸 예술로 표현하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일까. 평면으로 박제된 그림을 처음 새겨 넣은 이의 손 끝을 생각한다.
프랑스 회화를 모아놓은 전시실까지 빼먹지 않고 관람한 뒤 미술관을 빠져나왔다. 미술관 루프탑에 올라갔을 때 세찬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그 잠깐 사이에 빗줄기가 줄었나 보다. 유독 다양한 색의 꽃과 모양 다른 풀로 예쁘게 꾸민 화단을 지나니 관광객들이 연이어 사진을 찍는 동상이 보였다. 덴마크를 대표하는 동화작가 안데르센이었다. 정면에서 사진을 찍으러 다가갔더니 안데르센의 얼굴은 정면이 아닌 오른쪽을 향해 고개를 튼 모습이었다. 안데르센의 시선을 따라가니 도심 속 놀이공원인 티볼리 공원의 간판이 보였다. 이 작은 디테일은 결국 이야기의 유무에서 비롯된다. 코펜하겐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정까지 오픈하는 곳. 궂은 날씨에도 놀이기구를 즐기는 이들의 비명이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다.
여행지에 도착한 첫날. 나는 스타벅스에 간다. 나라와 도시의 이름이 적힌 컵을 사기 위해서다. 기념품 샵에서 파는 모양도, 크기도, 질도, 가격도 제각각인 기념잔 대신 비슷한 규격을 가진 스타벅스 시티 머그를 여행 전리품으로 모은 지 꽤 되었다. '사야 하는데' 하며 안달하거나 '샀어야 했는데' 후회하지 않기 위해 보통 여행지 도착 첫날 구입한다.
마침 코펜하겐 시청 앞에 스타벅스 매장이 있어 호텔로 돌아가기 전에 들렀다. 그런데 세상에. 1층 스타벅스의 지하가 슈퍼마켓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호텔에서 도보 5분 이내에 마트가 있는 곳에 왔구나. 포스터에 접시에 시티머그에 기념품에. 양손에 짐이 한가득이지만 이 편리한 동선을 포기할 순 없다. 미국 리슬링 와인 한 병-드디어 마트에서 와인을 판다-과 간단한 안주 거리까지 사고 나서야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냉장고가 없어 세면대에 찬물을 받아 와인 병을 담아두었다. 샤워를 마치고 기념품을 정리한 뒤 와인을 따랐다. 비가 그친 하늘이 짙게 물들어가는 저녁. 창문을 활짝 열었다. 비가 그렇게 내렸는데도 물기 없는 바람이 슬쩍 방 안에 무단침입한다.
오늘 처음, 코펜하겐 씨와 만났다. 첫인상은 꽤 쌀쌀해 보이고 살짝 어두운 것도 같은데. 어색하게 내 소개를 했더니, 코펜하겐 씨도 무뚝뚝하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시간을 같이 보내보니 첫인상과 조금 다른 것 같다. 의외로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것도 같고, 아직 안 보여준 모습도 많은 것 같고. 조금 섣부르나? 하지만 와인 한 잔 했으니 먼저 용기 내어 말해볼까. "코펜하겐 씨. 저 원래 이런 말 먼저 하는 사람 아닌데요. 우리 내일도 볼래요? 저는 당신이 좀 더 궁금해요"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