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북유럽 06
호텔 예약에 조식을 반드시 포함하진 않지만 조식이 포함된 패키지를 예약했다면 반드시 한 번은 먹어야 한다. 사실 조식 포함 예약이었는지 까맣게 몰랐다가 혹시 몰라 병 때문에 예약 바우처를 미리 인쇄하다 알게 됐다. 검색을 해보니 높은 건물이 없는 스톡홀름에서 무려 13층에 있는 조식당에서 멋진 뷰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단다. 그렇다면 스톡홀름 이틀 차 아침에 제일 먼저 할 일은? 일찍 일어나 밥을 먹는 것.
일본식 된장국인 미소 수프와 김치, 흰쌀밥이 있는 조식이었다. 한국인들 후기가 꽤 많다 싶더니. 수요가 있으면 반드시 공급이 있다. 첫 접시엔 빵과 연어, 후무스를 담아와 먹었는데 두 번째 접시엔 흰쌀밥과 김치, 계란요리를 담아와 먹었다. 비교적 현지식을 즐기는 편이고, 한식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아님에도 흰쌀밥의 단 맛을 맛 보니 제대로 한 끼를 먹었다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행지에선 도착지에 빨리 도착할 수 있는 지하철보다 좀 더 늦더라도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는 트램이나 버스를 타게 된다. 거주자라면 물론 다르겠지. 그래서 오래 산 현지인보다 그곳을 짧게 여행 한 여행자가 오히려 그 도시에 대해 더 많은 설명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무제한 교통패스를 드디어 첫 개시해 트램에 탑승했다. 여러 개의 섬으로 구성된 스톡홀름. 그중 박물관이 여러 곳 위치해 일명 박물관 섬으로 불리는 유르고르덴Djurgården으로 향했다.
나는 아바ABBA 세대와 거리가 있지만, 뮤지컬 <맘마미아>만큼은 익숙한 사람이다. 2008년에 개봉한 영화 <맘마미아>는 횟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봤고, 국내 라이선스 뮤지컬 공연은 업무와 연관돼 캐스팅이 바뀔 때마다 챙겨봤었다. 한국어로 된 가사가 덕분에 조금 더 익숙하긴 하지만, 그래서 가사의 의미를 더욱 피부로 느끼며 음악을 들었다. 그런 아바가 스웨덴 국적이고 그들의 이름을 딴 박물관이 유르고르덴에 있다면? 이 화창한 아침의 첫 목적지일 수밖에 없다.
<Waterloo>가 흘러나오는 아바 뮤지엄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오픈 시간이 아직 한참 남아있는데도. 얼굴을 뚫어놓은 아바의 등신대에서 사진을 찍거나, 노래를 흥얼거리고 몸을 들썩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마치 콘서트장 입장 줄을 서는 기분이었다. 아바 티셔츠를 입은 직원이 마이크를 들고 나왔다. 이제 곧 입장을 시작하나 보다.
"여러분께 안내드립니다. 현재 뮤지엄 내 기술적인 문제가 있어 뮤지엄을 언제 오픈할 수 있을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오후에 아무 때나, 혹은 내일 같은 시간에 오늘 티켓을 가지고 오시면 바로 입장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양해 바랍니다."
혹시 계속 그대로 기다릴 거면 1층 카페에서 무료 음료를 제공해 준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내 흘러나오는 경쾌한 아바의 음악 덕분일까. 신기하게도 3~40명 정도 되어 보이는 관람객 중 어느 누구도 관련하여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1층 카페 소파에 느긋하게 앉거나 뮤지엄 샵을 구경하거나 아니면 돌아가거나 한다. 내일도 여기에 있으니 같은 시간에 다시 와야지 하며 바로 납득한 나도 마찬가지다. 일정이 꼬였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 도시의 느긋한 여름 공기에 취했나. 허허 웃는 사람들을 지나쳐 내일 같은 시간에 맞춰 다시 오면 되는지 직원에게 재차 확인받고 뮤지엄을 빠져나왔다. 아직 내부 사정을 모르는 관람객들이 속속 추가되고 있었지만, 왜인지 이들 모두 "지금은 안되나 봐. 다음에 오자" 하고 아무 일 없는 듯 일정을 수정할 거라고, 그렇게 아바 음악을 흥얼거릴 것 같다고 확신했다.
재작년 엄마와 파리 여행을 하던 때. 엄마는 사람들의 옷차림을 관찰하더니 내게 "소매치기가 많다더니 진짠가 봐. 너도 가방 똑바로 메"라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바닥만 한 작은 핸드백을 크로스로 메고, 한쪽엔 에코백을 들고 있더라고, 핸드폰을 그냥 막 들고 다니는 사람도 없다는 거였다. 엄마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그간 운이 좋아 물건을 잃어버린 여행이 한 번도 없었지만 한쪽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의 끈을 길게 풀어 크로스로 멨다. 엄마를 케어해야 하는 여행에서 내 몸가짐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스톡홀름 중앙역에서 내려 호텔을 찾아가던 길. 오슬로보다 훨씬 커진 도로의 크기를 확인함과 동시에 내 눈에 들어온 건 화려하고 세련된 옷차림을 한 몇몇의 사람들이 멘 명품백이었다. 시각으로 즉각 알았다. 여긴 치안이 괜찮은 곳이라는 걸.
유르고르덴은 넓은 섬이라 주요 스팟들은 트램이나 버스로 이동이 가능했지만 어느 구간은 반드시 도보 이동이 필요했다. 아바 뮤지엄 다음으로 삼은 목적지인 로젠달 정원Rosendals Trädgård은 맑은 낮에 방문할 거고 -물론 늦게 열지도 않는다-, 조깅을 하거나 산책을 하기 좋은 코스라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는 설명도 있었지만 이 섬을 여자 혼자 걸어도 괜찮은 지에 대해선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해 괜찮을까 싶었는데.
버스 정류장에서 로젠달 정원Rosendals Trädgård까지 가는 길은 학생들이 소풍을 나와 신나게 뛰놀고, 나이 든 친구와 천천히 걷는 동행이 있었으며, 정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수레를 끌고 이동하는 그야말로 오픈된 공간이었다. 최악을 생각하면 보통, 현실이 더욱 기쁘게 와닿는 법이다. 명품백이 먼저 반겨준 도시. 게다가 여긴 스웨덴 왕실의 정원인 곳. 대체 무엇을 걱정했던 걸까.
철저한 유기농법을 고수하는 정원이자 농원인 로젠달 정원은 그야말로 영화 속 장소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철제 테이블이 정원 곳곳에 놓여 있고, 정원인지 농원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밭이 군데군데 있었다. 가게에서 가위를 빌려와 원하는 만큼 자른 꽃을 무게로 사갈 수 있는 꽃밭도 있었다. 긴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허리를 숙여 고심하며 꽃을 자르는 모습을 지나쳤다.
브런치 가게, 식물 가게, 식료품 가게 등인 박공지붕 형태의 투명 건물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요리에 영 취미가 없는 사람이라는 게 다행이었다. 그저 '잼과 올리브 오일, 페이스트들이 예쁘게 진열되어 있다'라고만 보이니까. 이런 식재료가 있다니, 이런 주방 용품이 있다니 하며 흥분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다양한 요리 책과 테이블 웨어, 신선한 유기농 채소들도 함께 판매되고 있었다. 높이와 배열을 제각각 다르게 놓아둔 근사함을 맛 대신 눈으로 흡수했다.
각종 식물을 판매하는 공간을 지나쳐 브런치 음식을 판매하는 곳으로 들어왔다.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와 샐러드들이 가득했지만 아침을 지나치게 든든하게 먹어버렸다. 스웨덴식 시나몬빵 불레Bulle와 유기농으로 직접 만들었다는 슈냉 블랑 한 잔만 주문해 야외 적당한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대부분의 좌석이 금세 채워졌다.
와인에 빵을 곁들이며 가벼운 식사를 하는데 내 앞의 테이블에 각각 유모차를 끌고 온 두 명의 남성이 앉았다. 아내들은 조금 나중에 오나? 하고 생각했는데.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둘 뿐이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아이에게 각자 이유식을 먹이고 주문한 브런치를 각자 먹었다. 아빠 둘이 아닌 엄마 둘이었다면 남편들은 나중에 오나? 란 생각을 했을까. 나 스스로도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다. 한 손에는 카페라테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유모차를 미는 아버지로 육아에 적극적인 아빠를 뜻하는 라테 파파도 스웨덴에서 나온 단어다. 이게 일반적인, 그러니까 남성 두 명이 유모차를 끌고 와 각자의 아이에게 각자 이유식을 먹이는 모습이 시선을 빼앗는 일이 아니라면 우리도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을 텐데.
빵을 먹다 보니 바닥에 흘린 부스러기 때문에 조그만 참새들이 날아들었다. 일부러 바닥에 손을 털어 빵 조각을 더했더니 참새들이 좀 더 모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와인도 다 마셨다. 남은 빵을 잘게 찢었다. 그리고 접시를 테이블 끝으로 밀어 놓았다. 그랬더니 용기 있는 한 마리를 필두로 여러 마리의 참새들이 접시로 몰려들었다. 내가 제대로 뷔페를 열어주었구나 하며 동영상을 찍다가 불현듯 알았다. 자신의 몫을 문 참새는 뒤로 물러나고 금세 다른 새가 와서 제 몫을 챙긴다는 걸. 한 번 빵 부스러기를 문 참새는 바로 다시 날아오지 않는다. 딱 먹을 만큼 챙기면 다른 새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 게 참새들의 세상인가. 부른 만큼 먹고도 습관처럼 배달 앱을 켜보는 나란 인간에 대한 반성이 뒤이었다.
정원을 등지고 나와 가까운 트램 정류장에 왔다. 유르고르덴의 끝자락엔 작은 미술관인 티엘 갤러리Thielska Galleriet가 다음 목적지였다. 스웨덴에서 가장 부유했던 사람 중 한 명이자 예술 애호가였던 티엘의 개인 저택으로 '뭉크의 작품을 여럿 소장하고 있다'는 설명에 애매한 위치임에도 반드시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곳이다. 목적지에서 내려 찾아가는데 이곳이 티엘 갤러리라고 알려주는 표시가 없었다면 누군가의 좀 좋은 집이겠거니 하고 지나쳐버렸을지도 모를 흰 저택으로 들어섰다.
어떤 공간은 그 자체로 경험이다. 삐걱거리는 바닥을 지나 방의 구조에 맞게 걸려 있는 전시 작품을 하나씩 둘러봤다. 티엘 초상화와 북유럽의 빛을 담은 작가의 작품을 지나 잘 꾸며진 가구 위에 놓인 흉상 조각들을 지나 끝자락의 방에 다다랐다. 니체의 초상화가 가운데에, <절망>, <다리 위에 여인들>, 초상화 등의 뭉크 작품들이 그 양 옆에 나란히 걸려 있었다. 유리 천장에서 새는 빛에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작품들. 이 공간에 들어서면 약간 높은 복층에 서게 되는데 그 시선에 맞춘 듯 작품들이 대부분 높게 걸려 있었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면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는 구조. 저절로 경이로움을 담아 방을 둘러보았다. 로트렉도, 고갱도, 로댕도 이 방에선 뭉크를 위한 조력자일 뿐이었다.
마리 크뢰이어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프린스 유진 갤러리Prins Eugens Waldemarsudde까지 들렀다. 유명 작가의 아내가 아닌 작가로서의 야망을 가졌던 마리 크뢰이어의 작품들과 당시 생활상 자체가 작품으로 느껴지는 화려한 방들을 구경했다. 왕자로서의 역할보다 예술가로서의 삶을 추구했던 왕자답게 저택은 '나도 부자면 이렇게 살고 싶다'하는 모든 것들이 있었다. 바다를 면해 지은 집에 내가 그린 그림과 내가 좋아하는 작가, 내가 도움이 되고 싶은 작가의 작품을 함께 전시해 놓을 수 있다니. 어쩌면 집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창의력의 원천일지도 모르겠다.
구시가지인 감라스탄에서 다리 하나를 건너면 만나는 큰 섬 쇠데르말름Södermalm. 피카FIKA를 즐기기 위해 쇠데르말름 서쪽에 있는 드롭 커피drop coffee에 왔다. 스톡홀름을 여행했던 지인들이 공통적으로 추천했던 카페였다. 플랫 화이트 한 잔을 주문해 자리를 잡았다. 노트를 꺼내려다 그대로 넣고 대신 이어폰을 꽂았다. 역시 이런 데에 들어오면 사람 구경이 제일이다. 노트북을 하거나 통화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점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지인들이 왜 이곳을 공통적으로 말했는지 알겠다. 무엇보다 커피가 무척 맛있었다.
다양한 잡지와 디자인 서적을 파는 서점에서 읽을 수 없는 제목들 앞을 아득하게 산책했고, 사람 없는 골목에선 셀카를 찍었다. 그리고 전망대로 향했다. 주소를 보고 걷는데 여기가 맞나 싶은 곳이 목적지란다. 문이 잠긴 입구를 확인하고 잠깐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데 누군가가 잠금쇠를 열어 바깥으로 나오는 걸 보고서야 여기가 입구 구나 했다.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일부러 풍경을 향해 사선으로 깎은 듯한 각도. 놀이터와 몇몇의 벤치. 잔디에 누운 커플과 도시락을 나누어 먹는 친구들. 그리고 스톡홀름 시청, 리다르홀멘교회, 스톡홀름 대성당이 한눈에 들어오는 시야. 게다가 이런 풍경을 가진 곳임에도 아주 한적한 분위기. 빈 벤치에 앉아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곳을 찍은 사진을 엄마에게 보냈더니 금세 메신저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다.
이바로 공원Ivar Lo’s park에서 Mariaberget 전망대로 이어지는 길, 그렇게 감라스탄으로 걸어가는 길은 그 자체로 산책이었다.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처럼 파란 하늘에 뭉게 구름이 떠 있어 꼭 르네 마그리트 그림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여행이 초현실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짙은 물결 위로 길고 좁게 반짝이는 윤슬의 반사 빛. 곁을 지나치는 지하철의 소음. 공존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들이 이 도시에서 하나가 된다.
스웨덴에 오면 꼭 먹어 보고 싶었던 음식은 미트볼이었지만, 도전해 보고 식재료는 청어였다. 생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데다 홍어에 버금가는 악취 음식인 절인 청어 수르스트뢰밍에 대한 악명을 익히 들어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도전해 볼 수 있을만한 청어 요리가 없을까 했고, 그중 맛있다는 후기가 많은 푸드 트럭 Strömmingsvagnen을 찾아냈다.
커다란 나무 테이블이 하나 놓인 푸드 트럭에 도착했다. 이곳은 튀긴 청어를 활용한 메뉴들을 선보이는 곳. 햄버거나 샌드위치를 시키기엔 조금 자존심이 상하니 감자와 양파가 곁들여진 청어 플레이트로 결정했다. 기존에 구워놓은 청어가 다 떨어졌는지 직원이 새 청어를 꺼내 굽기 시작했다. 내 차례에 이제 막 구운 청어를 먹을 수 있다니. 세상에, 이게 바로 럭키비키. 완전 럭키제이인 상황이잖아!
청어를 처음 접하는 내겐 이 정도도 도전이었지만 생각보다 우리의 생선구이와 굉장히 비슷한 맛이었다. 꽤 맛있구나, 싶어 콜라와 함께 즐겁게 먹던 중 옆자리에 앉은 중년 부부가 내 에코백이 아주 훌륭하다며 말을 걸어왔다. 한 면엔 셰익스피어 얼굴이, 다른 한 면엔 윌리엄 블레이크의 The imagination is not a state : It is the human existence itself (상상은 어떤 상태가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는 에코백이었다. 알고 보니 영문학에 정통한 미국인 부부라 내가 푸드트럭을 향해 걸어올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단다.
파리 여행 중 영어서적 전문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산 가방이라 하니 "한국인이 영어로 적힌 이 가방을 프랑스에서 샀군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 말을 스웨덴에서 미국인에게 듣는 저도 참 재미있네요. 이미 식사를 마친 상태였던 두 사람은 좋은 여행을 하라는 인사와 함께 떠났고, 나는 청어를 남기지 않고 마지막까지 다 먹었다. 콜라까지 다 마시곤 쓰레기를 정리했다. 청어 먹기 도전은 대성공이었다.
기분 좋게 부른 배를 안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 이 충분한 행복에 대해 생각하다 '나는 그래서 이곳에 살고 싶나?'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답은 바로 나왔다. 아니, 살고 싶지 않다. 특정 도시에서 한 달 살기나 일 년 살기 를 계획하곤 있지만 그곳에서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나는 영원히 여행자의 지위를 잃고 싶지 않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즐겨하고, 재미있어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인 여행은 여행인 채로 두고 싶다. 하루가 기대 돼 아침 일찍 눈을 뜨고 하루가 지나가는 게 아쉬워 자고 싶지 않았던 그때처럼. 삶에 희망만 가득했던 그 시절처럼. 나는 평생 낭만만 헤아릴 수 있는 여행 추구자로 살 것이다. 순수한 기쁨 그 자체의.
호텔에 도착했으나 방으로 곧장 향하지 않고 또 로비 바에 들렀다. 이번엔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의 IPA 생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이 한 잔을 다 마시고 방으로 들어가야지. 바닥에 닿지 않는 다리를 마음껏 흔들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