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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Sep 09. 2024

여름, 북유럽 05

여름, 북유럽 05


여행 5일 차 아침, 아니 새벽. 나갈 채비를 일찌감치 마쳤다. 오전 7시 27분에 출발하는 스톡홀름행 기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노르웨이 왕궁과 마주 보는 형태로 칼 요한 거리 끝자락에 위치한 오슬로 중앙역은 마트 장을 보거나, 기념품을 사거나, 트램을 타기 위해서 자주 왔다 갔다 한 곳이었지만 플랫폼을 찾아가는 건 다른 이야기니 조금 더 서두르기로 했다. 이미 동은 텄지만 사람들의 통행이 없는 시간. 오슬로의 마지막 모습을 사진과 눈에 열심히 담은 뒤 벌써 무거운 캐리어를 거의 긁다시피 끌어 중앙역에 도착했다.


혹시 모르니까 조금, 조금 하다 보니 열차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 버렸다. 출발 전광판에 스톡홀름행 열차명과 플랫폼 번호가 뜨는 것을 확인하고 역사 내 카페를 찾았다. 크로와상 대신 시나몬 빵kanelbolle과 커피를 시켰다. 달콤 쌉싸름한 계피향이 가미된 폭신한 빵에 진한 아메리카노 한 모금. 여행 짐을 든 사람들이 자리를 잡거나 테이크아웃 해서 사 가는 모습을 보며 흐르는 시간을 체크했다. 약속 시간보다 늘 먼저 도착해야만 하는 나는 공항이든 기차역이든 터미널이든 매번 시간을 여유롭게 계산해 항상 이렇게 일찍 도착한다. 시간에 쫓겨 허둥대는 일로 여행에 차질을 빚는 법이 없다. 커피를 다 마시고 탑승구에 미리 당도하며 이런 나라서 참 좋다고 생각했다.


이게 정말 국경을 넘는 기차인가 싶을 정도로 허름한 차체에 올라탔다. 노르웨이의 몇몇 도시를 지나 목적지인 스톡홀름 중앙역까지 약 6시간을 가야 하는데 예약한 좌석을 찾아 앉으니 아뿔싸 역방향이다. 창가 좌석인 것만 체크하고 열차 방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탓이다. 급한 성미가 또 이렇게 드러난다. 어쨌든 오슬로를 마주하고 떠나는 방향이니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위안하며. 외관과 달리 열차 내부는 생각보다 깨끗했고, 충전 콘센트도 창가 자리마다 하나씩 있는 데다 와이파이도 무척 잘 터졌다. 기차는 예정 시간에 정확히 맞춰 출발했다.


SNS에 글을 쓰고, 저장해 둔 영상을 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가, <무정형의 삶>을 꺼내 읽다가 했다. 기차는 이따금씩 다른 기차가 지나갈 때를 위해 멈춰 서기를 몇 번. 그렇게 국경을 넘었다. 사실 국경을 넘었다는 걸 안 건 지도를 열고 있어서였다. 다른 나라에 도착하려면 반드시 비행기나 배를 타야 하는 섬과 같은 나라에서 여권 심사 없이 국경을 넘는 일은 여전히 경이로워 그 순간은 확인받고 싶어서였다. 물론 지금 나라에서 나라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건 나뿐인 것 같다. 나를 제외한 모든 승객들은 그저 노트북 하고 핸드폰을 하고 잠을 잔다. 창 밖은 국경을 넘기 전과 똑같은 모양으로 자작나무들이 끊임없이 스쳐 지나가고 있다.


<무정형의 삶>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여행 중에 책을 챙겨 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책 한 권을 오롯하게 완독 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하나라도 더 보는 데에 바빠 책을 펼칠 시간이 없는 여행이 대부분이었다. 이번 일정이 13시간 걸리는 비행 두 번에 2시간 비행 두 번, 6시간 넘게 타야 하는 기차 두 번이라는 이동이 있지 않았다면, 이 책이 파리에 두 달간 머물며 쓴 산문집이 아니었다면, 이 여행에 책을 들고 올 생각은 아예 안 했을지도 모른다. 파리를 그 자체로 떠올리며 읽거나, 아니면 여행했던 그때의 도시나 지금 여행 중인 도시의 이미지를 넣어 읽었다. 여행했던 그때의 나와 지금 여행 중인 나를 넣어 읽었다. 이렇게 읽고, 쓰는 여행을 얼마나 추구했는지 모른다. 얼떨결에 이상향에 닿았다. 




기차는 착실하게 연착돼 당초 예상보다 30분 정도 늦게 종착역에 다다랐다. 사람들을 따라 플랫폼을 빠져나오니 커다란 도로와 널찍한 인도를 마주했다. 북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가 스톡홀름이라더니. 마치 대학교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기 위해 막 서울에 다다랐을 때 보았던 풍경 같다. 갑자기 넓은 도시에 떨구어진 기분. 구글 지도로 호텔까지 가는 방향을 확인하여 가방을 고쳐 메었다. 낯선 도시와 친해지려면 역시 시간이 필요하다.


예약한 호텔은 중앙역에서 도보 10분 정도 걸렸다. 이케아를 비롯한 다양한 상점과 카페가 있는 쇼핑몰 건물에 위치해 있는 데다 다리만 넘으면 스톡홀름의 구시가지인 감라스탄인 위치였다. 체크인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짐부터 맡겼다. 1층 로비 바에서 무료로 커피를 마시며 쉴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스웨덴에 오면 제일 먼저 먹을 메뉴는 미트볼이었고, 호텔 근처에 미트볼로 유명한 식당이 있다고 했다. 다 읽은 책이나 외투 등을 정리할 새 없이 곧바로 나왔다.


왕립 오페라 건물 1층의 Operabaren은 스웨덴식 미트볼을 파는 식당으로 유명하다. 오후 2시가 넘었는데도 야외 좌석은 명성답게 꽤 많은 자리가 차 있었다. 그 야외 좌석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루아르 상세르 와인과 미트볼을 주문했다. 핑거 푸드와 함께 먼저 받은 와인을 한 모금 시니 시원하고 상큼한 맛에 식욕이 돋는다. 모양 예쁘게 담긴 미트볼 플레이트가 곧 나왔다. 따뜻한 미트볼에 으깬 감자와 링곤베리, 절인 오이를 올려서 한 입 먹는데. 이거 진짜 맛있구나. 그 흔한 3분 미트볼도, 많이들 먹는 이케아 미트볼도 먹어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 맛에 미트볼을 먹는구나. 속으로 감탄하며 먹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감색 교회 앞의 초록색 벤치에 흰 블라우스에 청바지, 갈색에 가까운 빨간 미들힐 구두를 신은 여성이 앉았다. 부스스한 파마머리에 선글라스를 꼈다. 여성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한참을 앉아 있다가 일어나 지나갔다. 옷차림도, 햇볕을 즐기는 자세도 아주 인상적이라 지나가는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봤다. 맛으로서도, 장소로서도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쳤다.


스톡홀름의 이미지를 검색하면 대부분 구시가지인 감라스탄Gamla Stan이 나온다. 두 세 사람 겨우 같이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골목들과 색을 잃은 듯 빛바랜 건물들, 울퉁불퉁한 돌바닥 등. 17, 18세기의 건물들이 시절을 업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감라스탄. 배가 적당히 불러 적당히 좋은 기분을 안고 길을 나섰다. 바다를 향해 나가는 바이킹의 기개로.


웅장한 스웨덴 의회가 자리한 작은 섬을 지나 왕궁과 스톡홀름 대성당을 지나 감라스탄의 스토르토에르Stortorget 광장에 도착했다. 스웨덴 귀족들의 학살이 이루어진 장소로 '피의 우물'이라고도 불린다는 분수대를 기점으로 노벨 박물관과 레스토랑, 기념품 샵들이 자리 잡은 작은 규모의 광장이다. 특히 과자 집 같은 알록달록한 건물이 한쪽에 쪼르륵 놓여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많이 보아왔다. 이 풍경을 담고 싶어 카메라를 켰는데 역광 탓에 이 아기자기한 조합이 사진에 충분히 담기지 않았다. 


날 좋은 오후의 감라스탄은 단체 관광객들의 떠들썩함으로 가득했다. 깃발이나 우산을 든 가이드를 필두로 여러 그룹의 관광객들이 오고 가고를 반복했다. 그중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도 몇 팀 만났다. 까르르 웃는 목소리에 섞인 한국어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비슷비슷해 금방이라도 길을 잃어버릴 것 같은 골목을 마음껏 헤맸다. 지하로 연결되는 입구가 독특한 카페를 촬영하고, 스웨덴의 커피 문화를 표현하는 단어인 피카FIKA를 잔뜩 표구해 놓은 기념품 샵을 구경했다. 스토르토에르 광장을 담은 그림 포스터와 스톡홀름 전경을 담은 그림 포스터 중 어떤 것을 고를까 한참을 고민하다 후자를 선택했다. 건물을 하나라도 더 소장하는 쪽이 이득이다. 마음에 드는 마그넷도 함께 샀다. 골목을 또 돌았다. 오래된 펍과 세련된 칵테일 바가 공존하고, 수제 사탕을 만드는 가게와 이탈리안 피자를 파는 가게가 나란히 영업을 하고 있었다. 


바닷바람 탓에 전혀 덥지가 않다. 감라스탄을 반대로 다시 크게 한 바퀴를 돌아 왕의 정원을 거슬러 일부러 멀리멀리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 반짝이는 날씨 덕에 야외 체스를 두거나 분수를 뛰어다니거나 잔디에 누워 뒹굴거리는 사람들을 자주 지나쳤다. 아무래도 나는 이 순간의 이미지를 스톡홀름이라고, 별 수 없이 스톡홀름을 아주 오해하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1시간이면 주요 중심부를 다 걸어 다닐 수 있는 오슬로에서 넘어오니 스톡홀름은 너무 거대한 도시다. 방으로 들어와 들고 다녔던 책과 기념품을 내려놓고 캐리어 정리를 마쳤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핸드폰을 충전하고, 잠깐 누워 있다가 다시 호텔 밖으로 나왔다. 여기가 스톡홀름이 아니었다면 이럴 수 없었겠지. 여행을 떠나 오면 조금 더 촘촘하게 부지런해지는 내가 좋다. 그리고 오늘 여러 번 내가 좋다는 말을 하고 있는 지금의 내가 좋다.


호텔에서 왼쪽으로 꺾어 다리를 건너면 구시가지인 감라 스탄이었는데, 오른쪽으로 꺾으면 쇼핑하기 좋은 노르말름Norrmalm으로 이어졌다. 보행자 전용 도로는 여행자의 지갑을 노리는 상점들로 가득했다. 특히 인테리어 소품들을 파는 전문 상점들이 무척 많아 보이는 곳곳마다 들어가 구경을 했다. 마음에 들면 너무 무겁거나, 너무 비싸거나, 너무 커서 아쉽게 내려놓았다. 나중에 집 꾸밀 때 참조해야지 하며 열심히 사진 찍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미슐랭 3 스타 식당인 프란젠Frantzén도 지나쳤다. 내 생애 가장 비싼 한 끼 식사를 했던 곳이 홍콩의 프란젠의 키친Frantzén's Kitchen -지금은 폐업했다- 이었는데, 바로 이 프란젠Frantzén의 유일한 분점이었던 곳이다. 


모 코미디언이 방송에서 말했다. "'여행을 다녀와서 좋은 경험이야' 하는 건 경험이 아니"라고. "그건 단지 놀러 간 것"이며 "경험은 피땀 흘려 노력하며 얻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경험했다고 말한 것에 대해 그것은 경험이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누군가 여행이 좋은 경험이라 느껴 또 다른 여행을 위해 지금을 더 의미 있게 살아보겠다고 결심했다면, 그것이 경험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맞다. 홍콩의 프란젠의 키친에서 2시간의 식사를 하며 좋은 재료, 좋은 분위기가 선사하는 맛있는 식사가 주는 기쁨이 무한할 수 있다는 걸 경험했던 나의 변명이다. 



 

스톡홀름 내 교통수단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교통패스를 구매했는데도 종일 걸었다. 점심을 늦게 먹어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시원한 알코올 한 잔은 필요했다. 호텔 1층 로비 바의 분위기가 좋던 것이 떠올라 이곳으로 왔다. 생소한 이름이 가득한 메뉴판에서 처음 보는 이름의 생맥주를 주문해 야외 좌석에 앉았다. 높은 의자 덕에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다. 두 다리를 마음껏 흔들었다.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나니 도시가 한층 어두워졌다. 내내 걸었지만 이대로 방에 들어갈 수는 없다. 해가 지고 밤이 되면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도시. 이래서 도시 여행을 한다. 이 간극을 좋아해서. 오후 8시가 넘은 시간. 핑크빛으로 물드는 하늘이 조금씩 멀어진다. 이번엔 또다시 반대로. 노르스트롬 위를 지나, 스웨덴 의회를 지나 다시 감라스탄으로.


단체 관광객들로 가득했던 스토르토에르 광장은 열기가 한 풀 꺾였다. 야외 좌석을 가득 채우던 사람들은 사라졌고 소규모의 사람들이 짝을 이뤄 이따금씩 오고 갔다. 이래서 특정 시간의 특정 모습만 보고 장소의 이미지를 규정하면 안 된다. 그걸 알지만 여행객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없다. 어쩌겠는가. 그렇게 오해로 남는 거다. 오해의 영역, 그것조차 여행의 영역이니. 


짙푸른 하늘을 배경 삼아 1시간을 넘게 걸어만 다니다 호텔로 돌아왔다. 이상하게도 다리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중략) '름'이라는 글자는 미세한 어지러움을 품고 있다. 름, 이라고 말할 때 혀가 입천장을 부드럽게 스친 후 입술이 닫히며 마무리되는 일련의 움직임, 입술이 닫히기 이전과 닫힌 이후의 음성이 함께 울리며 발생시키는 민감한 파동, (중량) - <미지를 위한 루바토> 중


<미지를 위한 루바토>에서 작가 김선오는 여름이란 단어를 구성하는 '름'의 발음에 대해 위와 같이 썼다. 그리고 무릎을 쳤다. 내가 스톡홀름을 마음으로 발음할 때 느꼈던 아득함이, 그 이상한 파동이 발음 그 자체에 녹아 있었던 거구나 하고. 나는 메모장에 고작 '톡에서 홀로 넘어갈 때의 리듬, 그 맛이 있다'라고 써 놨는데. 


학창 시절 가장 좋아했던 가수의 대표 색을 국기에 품고, 미세한 어지러움을 품고 있는 글자를 가진 도시. 스톡홀름의 첫날이 이렇게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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