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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사강 Oct 05. 2021

아이가 표현을 잘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친구에게

사실은 이제 곧 태어날 조카에게


지난 일요일, 출산 예정일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친구를 만났다. 이제는 본명보다 애칭이 더 익숙한 마오, 뚜벅이인 나와 마오를 위해 열심히 아침부터 차를 운전하고 온 삼이(역시나 애칭이다). 겨우 세 명이서 만나는데 일정 잡기는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 날은 삼이가 안 되고 이 날은 또 마오가 안 되고. 양쪽으로 번갈아 전화를 하며 나는 '나이가 들수록 반드시 만나고야 말겠다는 마음이 없다면 참 약속 잡기 힘들어진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학교를 가면 만날 수 있던 고등학생 시절을 지나, 새벽까지 취한 채 쏘다녀도 되던 대학생 시절도 지나, 하루를 나가 놀면 하루는 쉬어줘야 하는 30대들의 약속 잡기. 이제 한 명은 인천 한 명은 안양 한 명은 동탄에 살아 지도에서 접점을 찾는 것마저 어려워졌다. 하지만 반드시 만나고야 말겠다는 마음이어서인지 수고롭다거나 귀찮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특히나 코로나 때문에 올해엔 생일 파티들도 죄다 건너뛰어버렸기 때문에 간절하게 보고 싶었다.

만날 날짜를 정하고 나니 나머지 결정권은 모두 마오에게 있었다. 삼이와 나는 출산이라는 인생의 중대사를 앞둔 마오가 하자면 뭐든지 다 따를 준비가 되어있었다. 언제나 친구들에게 맞춰주는 편인 마오가 웬일로 '어디를 가고 싶다'라고 했고 우리는 마오의 집에서 멀지 않은 오이도에서 만나기로 했다. (*커버 사진은 오이도가 아니다. 아직 오이도에서 찍은 필름을 인화하지 못해서 무의도 사진으로 대체했다.)


나, 마오와 삼이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친구다. 친구들 모임은 자칭 타칭 '팔푼이'다. 여자 8명이 팔공주가 아니라 팔푼이인 것부터가 우리의 정체성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사람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이어져 온 만남, 그것도 여자 여덟 명이 아직도 우르르 만나고 카카오 뱅크로 매달 돈까지 모은다는 얘기를 들으면 신기해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있는 친구, 결혼을 한 친구, 비혼주의자인 친구가 모두 섞여있는 모임이다 보니 더더욱.

그러고 보면 여덟 명은 삶의 양상도 성격도 참 다 다르다. 직업들도 접점이 없고 사는 곳은 결혼과 직장 때문에 멀어졌으며 만나면 MC를 봐야 하는 성격부터 하루 종일 채 10분도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 친구까지. 그런데도 이 모임이 이렇게까지 오래 지속된 것은 삶의 모습은 달라도 방향성이 비슷해서라는 생각이 든다. '적당히 손해 보고 사는 게 편한' 성격과 '그냥 내가 더 하고 말지'하는 사람들의 모임. 좋게 말하면 순진하고 나쁘게 말하면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는 시시콜콜 연락을 자주 하는 편도 아니고 누가누가 더 친한지 질투를 하지도 않는다. 그때그때 8명 안에서 가장 잘 맞는 친구, 가장 자주 보는 친구가 변하면서 인연을 이어왔다. 열여덟부터 서른둘, 인생의 그래프에 웬만한 변곡점마다 함께 한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생각하면 신기한 일이다. 누군가가 행복하고 평온하기를 진심으로 빌게 되면서 좋은 인간으로 자랄 수 있는 자양분을 얻었다.


서른둘, 그것도 만삭인 임산부가 있는 우리는 오이도에서 깡통 열차를 탔다. 사실 열차라는 이름이 좀 무색한데 그냥 전동차량에 드럼통을 연결해놓은 것이다. 어른은 벨트를 맬 수도 없는 조악한 열차. 그런데 우리는 그 드럼통 열차가 달리는 내내 소리를 지르고 배가 아프게 웃어댔다. 아마 앞에 앉아있던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들은 '저 이모들 엄청 철없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차가 조금이라도 덜컹거릴 때마다 삼이와 내가 짠 듯이 맨 뒤에 앉은 마오를 돌아보며 '괜찮아?' '마오야, 꽉 잡아' 이런 뻔한 잔소리를 한 것도 지금 생각하면 좀 머쓱하다. 원래 조심성으로 따진다면 마오가 나나 삼이를 걱정하는 게 맞을 텐데.


인생네컷도 제대로 콘셉트를 잡고 찍지 못해서 그 좁은 곳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한참을 웃었고, 사람 많은 아웃렛에 기가 빨린다며 툴툴거리다가 또 맛있는 걸 먹고는 금세 '아 이게 주말이지, 사람이 좀 있어야 주말 느낌이야'라며 태세 전환을 하고, 좀 오래 걷다가 마오를 돌아보며 또 지레 걱정을 했다. 생각 없이 자주 웃고 또 생각 없이 행복해지는 느낌과 생생한 즐거움의 시간들이었다.


그러다가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았다. 사실 그 카페도 원래 가려던 카페가 문을 닫아 차선책으로 선택한 곳이었다. 그런데 놀러 나오면 좀처럼 불만이 없는 '뭐 어쩌겠냐'형 인간 셋은 그저 앉아서 또 수다를 떨기 바빴다. 주식도 부동산도 모르는, 공모주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대화가 여기저기로 튀었다. 고등학생 때 얘기를 했다가, 회사 이야기를 했다가, 또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까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가. 좀처럼 30대의 감각이 없어서 우리의 대화는 10대 같거나 60대 같거나 했다.

 

그러다 내가 마오에게 '아이가 어떤 아이로 컸으면 좋겠냐'라고 물었다. 요즘 세상에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엄청난 결심이고 그렇다면 아이에게 바라는 것쯤 있게 되기 마련이니까. 물론 마오의 입에서 돈을 잘 벌었으면 좋겠다거나 좋은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다. 마오는 조금 고민을 하더니 '오빠(남편)처럼 컸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마오의 남편은 자상한 사람이고 어떤 면에서는 30대의 감각을 갖춘 훌륭한 어른이다. 당연히 그런 사람을 닮으면 좋을 일이지만 마오를 사랑하는 나와 삼이는 '왜? 너 닮으면 안 돼?'라고 곧장 응수했다. 마오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성격을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구체적으로는 표현을 잘하지 못하는 면을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마오는 대개 사람들에게 맞춰준다. 음식도, 장소도, 시간도 언제나 '좋아!'라고 대답하는 '무엇이든 다 좋아'형의 인간. 마오를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마오가 사람들 간의 관계에 큰 관심이 없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마오는 '될 대로 돼라'형이 아닌 '무엇이든 다 좋아'형이다. '될 대로 돼라'형이 썩 내키지 않는 만남에 억지로 참석하는 유형이라면 '무엇이든 다 좋아'형은 그 만남 자체가 좋기 때문에 그 만남에 수반되는 부수적인 모든 것들은 다 감수하고 좋아할 준비가 되어있는 유형이다. 8명이 다 시간을 맞추기가 아주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어떤 사건, 여행, 만남들에 꼭 한두 명씩은 빠져있는 경우가 있는데 마오는 거의 모든 이야기 목격자다. 야야 그때, 로 시작하는 이야기에서 사건의 디테일이 막히면 마오를 쳐다보면 된다. 출석률로는 아마 우리 중에 1등이지 않을까.


1년 전 여름, 마오가 술에 취해 나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은 우리를 정말 좋아하는데 그런 표현을 잘 못해서 너무 속상하다고. 마오가 왜 그런 속상함을 느끼는지는 잘 알 것 같았다. 마오는 누구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거나 '오늘 저 너무 우울한데 술 한 잔 하실 분' 하는 등의 만남을 주선하는 편이 아니었다. 또 나처럼 '친구들아 나 지금 너무 행복하다'하며 만남의 감동을 입 밖으로 잘 내뱉는 편도 아닌 데다 삼이처럼 '너 ㅇㅇ일에 시간 되면 내가 송도까지 갈게'하는 만남에 적극적인 성격도 아니기 때문에 그럴 것이었다.


하지만 마오는 내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충동적으로 건 전화를 아주 다정하게 잘 받아주었고 단톡방에 어떤 친구가 '오늘 저 너무 우울한데 술 한 잔 하실 분'하는 소리를 하면 '저욥!'이라고 대답을 했다. 내가 '친구들아 나 지금 너무 행복하다'라고 하면 네가 행복해서 나도 아주 행복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삼이가 마오가 시간 될 때 마오의 집으로 가겠다고 하면 '언제든 와'라고 대답하는 사람이었다.


아마 마오는 우리가 마오를 착하다고 얘기할 때마다 속으로 자신은 착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부당한 일에도 한 번 꾹 참고 마는 자신의 성격을 착한 것이 아니라 답답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이라고 느끼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아이가 자신의 성격을 닮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겠지. 나는 마오가 아니니까 마오가 겪는 내적인 갈등이나 억울함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그래도 단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마오는 정말로 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무언가를 잘 참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 '나는 착하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적의 때문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런 적의로 남의 마음을 베어버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베어버리는 것이 착한 게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마오를 보면 표정과 행동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친구들에게 선물을 하려고 컵받침과 거울을 손뜨개질로 떠오는 사람, 인형을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인형의 모자를 두 개나 떠서 갖다 주는 사람, 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항상 찻잎이며 과자며 주전부리를 7명의 몫으로 사 오는 사람, 자기가 잘 못하는 게임을 해도 '나 이거 하기 싫다'라고 말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보는 사람, 내가 울 때 입바른 위로를 하기보다는 본인도 그냥 같이 울어버리는 사람, 배 찢어지게 웃을 때 눈을 마주하고 같이 웃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마오다.


물론 나는 나의 사랑하는 친구가 타인에게 뱉어야 할 나쁜 말도 속으로 삼켜버려 자신의 속을 상하게 하는 걸 보는 일은 기분이 좋지 않다. 자신이 겪고 있는 불운이나 스트레스에 대해서도 시간이 조금 지나서 이야기를 하거나 혹은 다른 친구들의 고민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야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속상할 때도 있다. 나나 삼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가 죽을 바에야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게 낫지 않냐'란 소리를 할 때 파하하 웃으면서도 맞다고는 안 해주는 은근히 확고한 마오. 마오가 자신의 아이가 그런 성격을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은 자신이 자라면서 삼켜버린 말들로 체하는 아픔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리라. 나는 그런 마음마저 '마오답다'라는 생각을 한다.


나에게 무슨 자격이 있나 싶지만 그래도 나는 마오의 아이가, 그러니까 나의 조카가 마오를 닮았으면 좋겠다. 마오를 닮으면 하얗고 보드라운 사람이 되겠지, 외면도 성격도 모두. 음식으로 치자면 심심한 사람, 그림으로 치자면 물을 많이 적신 수채화 같은 사람. 그래서 마오를 닮는다면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사람은 아니지만 자꾸 돌아보고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으로 클 것이고 오래 끓일수록 깊은 향이 나는 찻잎 같은 사람이 될 것 같다.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걸 속상해하는 속이 따뜻한 사람.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사람들이 갖는 따뜻함이 얼마나 중요한 세상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차갑거나 뜨거운 사람들 사이에서 은은한 따뜻함이 주는 신뢰와 안정이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마오가 걱정하는 마오의 '아닌 것도 참아버리는 면'은 어릴 때부터 호전적이었던 이모 둘, 그러니까 나와 삼이가 어릴 때부터 잘 교육을 시켜볼 예정이다. (물론 삼이와 합의되지는 않았다) 마오를 닮았다면 마오의 아이도 틀림없이 삼이와 나를 좋아하고 잘 따라줄 테니까 '그런 건 싫다고 해야지!' 하면서 열심히. 그리고 아이가 조금 더 자라고 나면 이 글을 읽어주면서 엄마가 얼마나 사랑으로 넘치는 사람인지도 가르쳐주고 싶다. 말로 표현을 많이 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사랑으로 넘실거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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