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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 Oct 24. 2024

아차, 어떻게 노는지 까먹었다

낭만에 대하여




-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 저는 아무거나 잘 먹어요.

- 좋아하는 노래 틀어드릴까요?

- 다 좋아요! 보통 TOP100 들어서…


여기 무엇이든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어디에나 잘 어울리고 투정도 없고 뭐든 상관없다고 말한다. 아니, 가식적으로 양보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아무래도 좋단다. 이런 순둥이 유형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부터 더 자주 만난다. 대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별의별 특이한 취향의 소유자와 무리에 도무지 섞일 수 없는 반사회적 인간들을 꽤나 맞닥뜨리곤 했는데 죄다 졸업하고 자기네 세상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아니면 그랬던 놈들도 맨날 회사에서 치이고 섞이다가 아무래도 상관 없어진 걸지도.

좀 상관 없어지는 구석이 있다. 나이가 들면서 취향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진다. 어린애들을 보면 신발에 빨간색 좀 섞여있다는 이유 만으로도 외출도 거부하고 울고불고 바닥에 드러눕는다. 그들도 타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자신만의 확고한 취향관을 가졌던 시절이 있었을텐데. 언제부터였나. 아마 먹고 사는 일이 메인이 되면서부터? 그게 힘에 부치기 시작하면서 먹고 사는 데 지장 없는 것들부터 간소화되기 시작한 것 같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하는 식으로. 또 언뜻 어른이 되는 일은 잘 참는 일이라고 배웠던 것 같다. ‘까짓 거, 참지 뭐’ 그렇게 타협할 수 없던 기호들은 철이 들면서 하나둘씩 과묵해진다. 그렇게 쉽게 쉽게 가는 편이 피곤할 일 안 만들고 좋다.


반면 무엇이든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싫다고는 안한다. 대신 대체로 뭘 안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기 때문에 이 두 음절을 쓴다.

‘굳이?’

음. 의욕이 한번에 꺾이며 효율을 모두 챙길 수 있는 마법의 문장이다. 하긴 나이 먹고선 나가서 놀면 피곤하기만 하다. 어릴 땐 아빠는 왜 황금 같은 주말에 누워서 TV만 볼까 했는데 이젠 그게 너무 이해 되는 나이가 됐다. 아니면 그게 이해 되는 체력이 된 건가.

어느새 ‘놀다’란 ‘일을 안 한다’의 유의어가 되어버린 듯 하다. 원래는 그의 인생에도 되게 다양한 방법의 ‘놀다’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것만 노는 것이 됐다. 부지런히 고된 평일을 다 보내고 주말이 오면 더 이상 아무 에너지도 쓰고 싶지 않아진다. 뭔가를 좋아하는 마음도 다 에너지 소비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에너지는 딱 엄지손가락 정도 만큼만 남아있다. 그걸로 유튜브 숏츠 스크롤을 올린다. 이걸로 충분히 재미있다. 점점 굳이 뭘 하고 싶지 않고 할 필요도 못 느낀다.


내 주변 사람들만 봐도 이제 대부분이 아무래도 좋거나 아무래도 싫은 사람이 됐다. 그러나 그렇게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무던하게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 산통을 깨는 말을 하고 싶다. 이거 좀 위험한 거 아닌가?


나는 필사적으로 이런 유형이 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굳이’ 에너지를 써가면서 ‘좋은 걸 좋다고, 싫은 걸 싫다고‘ 말하려고 한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취향을 잃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까짓 거 잃는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뭘 ‘위험’ 씩이나 하냐고 말할 수 있는데 나는 이게 없는 사람은 좀 큰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조금 피곤하게 굴어보겠다.





어릴 적, 그러니까 우리가 겁나게 말 안 듣는 꼬맹이었을 적에는 성숙이란 ‘점잖음’이었다. 과묵하고 말을 잘 들으면 어른들이 어른스럽다고 칭찬해줬다. 그때는 또래들처럼 제 느끼는 대로 마구 내뱉거나 표현하는 것보다 절제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고 고급 스킬이었으니까. 이 기준은 딱 사회에 들어온 기점부터 반대로 역전된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 표현을 못하는 어른이 더 많아진다. 감정이 무뎌지는 것도 있지만 차라리 무던한 편이 모든 면에서 훨씬 수월하다는 걸 알게 되는 거다. 피곤하지도 않고 충돌도 피하고, 솔직했다간 손해 보는 일이 많아지기에 감정을 숨기게 된다. 때문에 성인이 되면 점잖은 것보다 자기 주관을 뚜렷하게 내보이는 게 더 보기 드문 고급 스킬이 된다.


좀 갸우뚱할 수 있다. 드물면 드물었지 그게 왜 고급 스킬이냐. 이건 반대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만나본 적 있다. 점잖지만 성숙치 못한 어른들을. 돈 얘기, 골프 얘기, 직장 이야기… 술자리를 비롯한 친목 자리에서 소비적인 대화로 텁텁했던 경험. 표면적인 대화를 겉돌다 집에 돌아가는 길 허무함에 빠졌던 기억이 있는가? 내내 정제된 대화들로 정서적 포만감을 전혀 채울 수 없어서 허기진 마음으로 ‘이럴 거면 아무도 안 만나는 편이 낫겠어’하고 다짐했던 날. 그건 단순히 당신의 삐뚤어진 염세 때문은 아니다. 그 저변에 취향의 결여가 있다.


성숙한 어른은 자기만의 세계가 뚜렷하다. 마치 아이들처럼 자기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분명히 안다. 대화를 해보면 느껴진다. 자기 세계관이 뚜렷한 어른과의 대화 후 느끼는 포만감! 지식이 아닌 지혜가 전이되는 기분. ‘아차, 내가 되고 싶었던 건 저런 어른이었지.’ 때때로 그런 대화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고 삶을 흔드는 영감을 주기도 한다. 이건 그냥 그 사람이 그런 어른으로 태어난 게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전부, 결코 타협하지 않고 견고하게 갈고 닦은 그 사람의 고집스런 취향이다.





취향이란 다시 말하면 삶을 향유하는 방법이다. 겨우 내가 좋아하는 걸 더 좋아하고, 비슷한 좋아하는 것들을 모으고, 왜 좋아하는지 집요하게 알아내는 일 같은 게 내 삶을 성숙하게 만들 수 있다. 비록 그런 것들이 전혀 비생산적일지 몰라도 생산적인 일 만큼이나 내 삶을 단단하게 지탱한다. 회복탄력성이 망가지고 인생에 허무함이 찾아왔을 때 당신을 지켜내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취향이다. 안정이 아니라 의미다. 물질은 만능이 아니라는 뻔한 말은, 인간은 무의미 앞에서 쉽게 무능해진다는 뜻이었다.


그런 취향은 닳는 성질이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아무래도 상관 없어진다. 점점 무취향으로 수렴하다가 남들이 대부분 좋아하는 거나 부러워하는 것 위주로 기준이 변한다. 적어도 그러면 실패가 적다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사실 실패 확률을 줄이는 것은 취향을 분명히 알게 되는 쪽이다. 좋고 싫음에 대한 경계가 흐릿하면 알고리즘에 잡아먹히는 세상이다. 흐릿한 당신에게는 알고리즘도 남들이 좋아하는 거 아무거나 줄 거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걸 어떻게 하는지 까먹어 버린다. ’아무거나‘를 남발하다가는 아무개 노인으로 늙고 만다. 그런 사람은 나이 드는 것이 두려울 수 밖에 없다.





아, 이런 글일수록 쉽게 써야하는데 너무 엄근진이 됐나. 사실 경고하듯 적었지만 이 글의 내용은 ‘좀 낭만 있게 살자’ 정도로 봐도 무방하다. 나는 문상훈의 유튜브 <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며>를 좋아하는데,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잔나비 최정훈이 나와서 내가 좋아하는 말을 한다.


"오늘의 가위바위보가 재밌는지 재미없는지가 너의 청춘, 너의 젊음, 너가 얼마나 뜨거운가를 가르는 거야"


가위바위보 같은 건 죄 쓸데없는 시간 낭비일지라도 거기에 몰입할 뜨거운 가슴이 있다는 게 살아있다는 거고 젊다는 거고 낭만 아니겠나. 원래 ‘놀이’란 비생산적인 거다. 낭만이란 낭비를 포함한다. 얼마나 잘 낭비했는지가 내 취향을 정하고 인생의 색깔을 결정하기도 한다. 세상에는 이따금씩 먹고 사는 일만큼 중요한 것들이 있다니까.




그러니까 무용한 취향을 잔뜩 달고 사는 사람보다는 굳이’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훨씬 해롭다. 어디에 해롭냐면 내 재미에 해롭다. 그런 사람은 좀 노잼이다. 그리고 ‘굳이’를 말하면서 군더더기 없는 삶을 지향한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그런 사람들이 대게 더 피곤하게 군다.


나는 좀 우리 사회에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취향이 확고한 사람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아, 골프든 주식이든 돈 모으는 이야기든, 정답이 있는 이야기는 굳이 술자리에서 듣고 싶지 않고 필요하면 내가 알아서 유튜브에 찾아볼게. 나는 순전히 내 재미를 위해서 정답 없는 이야기를 주구장창 나누고 술을 퍼마시고 시간 낭비하고 싶다. 나는 굳이 그렇게 노는 사람이다. 이게 낭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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