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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 Oct 25. 2024

돌체 파 니엔테

달콤한 게으름에 대하여




돌체 파 니엔테(Dolce far niente)

제법 있어보이는 이 문장은 이탈리안들의 생활 신조다. 세계적으로 꽤나 인지도가 있는 문장이라 이 이름으로 된 유명한 와인도 있고 호텔이나 레스토랑도 이 이름을 달고 세계 곳곳에 세워져 있다. 그럼 무슨 뜻인가 하면, ‘돌체’란 달콤하다는 뜻이고 ‘파 니엔테’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우리말로 의역하면 ‘휴식 개꿀’ 쯤 된다. 아니 그럼 휴식이 개꿀이지, 이탈리아 애들은 뭐 이런 뻔한 말을 슬로건으로 삼았담.




이 문장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 나오면서부터다. 영화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면 일단 주인공이 줄리아 로버츠인데 딱 그 이미지에 맞게 엄청 바쁜 미국 커리어우먼으로 나온다. 그러다 어느날 번아웃이 와서 다 때려치우고 세계여행을 훌쩍 떠나게 되고 거기서 제목처럼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다가 깨달음을 얻는다… 뭐 그런 내용이다. 여기서 ‘먹고’에 해당하는 여행지가 이탈리아인데, 거기서 만난 이탈리아 남자가 줄리아 로버츠한테 이렇게 말한다. ‘미국인들은 죽도록 일하다가 집 가서 TV 보는 게 삶을 즐기는 거냐? 그건 즐기는 게 아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대사가 ’돌체 파 니엔테‘다. 엥, 이게 뭔 영화냐 할 수 있는데 이거 엄청 잘 간추린 거다. 진짜 저게 거의 내용의 전부다. 저걸 보고 실제로 전세계 사람들이 감동 먹어서 저 문장으로 막 페이스북 상태 메세지 바꾸고 자기 팔에 타투 박고 그랬다.


왜 저 이탈리안이 미국인을 싸잡아 욕했는지 그의 서사가 나오지는 않지만 감독이 미국인인 걸 보니 저 대사는 아마 감독의 ‘셀프 디스’ 쯤 됐을 거다. 꼭 미국인이 아니라도 바쁘게 사느라 휴식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현대인 모두에게 경종을 울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제대로 즐기는 휴식은 무엇인가. 그걸 딱히 이 영화에서 정해주진 않는다. ’니엔테‘가 비록 ’아무 것도 안 함‘이라는 뜻이지만 작중 내용을 보면 꼭 쉴 때 가만히 있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줄리아 로버츠는 작중에서 뭘 되게 열심히 한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한다. 여기 나오는 다른 인물들도 휴식할 때 각자만의 방법으로 뭔가에 열중하고 있다. 내 생각에 돌체 파 니엔테란, 휴식을 위해선 뭘 해도 좋지만 ’이것’만큼은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다. 바로 ‘쓸모에 대한 계산’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강박적일 만큼 쓸모에 대한 계산을 놓지 못한다. 뭔가 만드는 취미는 좀 잘 된다 싶으면 여지없이 ‘이거 팔아도 되겠는데?’라는 생각이 올라오고, 맛있는 걸 먹는 동안에도 ‘맛집 리뷰 써야지’하며 연신 폰 카메라를 찰칵거린다. 심지어는 쉬는 중에도 ‘이거 브이로그로 찍어야겠다’ 같은 생각을 하니, 이게 쓸모에 대한 강박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하루종일 생산에 시달려서 취미로 도망쳐놓고선 그 와중에 다시 또 뭔가 만들어낼 생각을 한다. 물론 그런 생산적인 아이디어들이 취미를 존속하게 만드는 동기부여가 된다든지 일상에 활력을 재충전한다는 점에서 절대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심신을 달래는 휴식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쉬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쓸모를 증명하는 인생이라니, 혀끝이 씁쓸해진다. 이러니 만성피로 같은 게 생기지.


쓸모를 놓으면 달콤해지는 것들이 있다. 사실 대부분이 그렇다. 나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FC온라인(축구 게임이다)을 즐겨하는데 순위를 결정하는 경기를 할 때면 대단히 필사적이게 된다. 경기의 승패에 따라 다른 유저들에게 내 순위가 노출되고 실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나는 좁밥처럼 보이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욕망이 있다. 이런 경기를 몇 판 하고 나면 상당히 지쳐서 게임하기 전보다 훨씬 피곤해지고 만다.

그러나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인 친선 경기에서는 별 부담없이 즐겜할 수 있다. 그냥 선수와 선수 사이의 패스나 쏠 슛의 커맨드를 고르는 그 자체만으로도 꿀잼이다. 이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인 것이, 여태껏 친선경기 하면서 쌍욕하는 유저 못 봤다. 순위경기에서는 그렇게 부모님 안부를 묻던 날카로운 양반들이… 어쨌든 이런 식으로 어떤 취미든 성과와 성취에 대한 고집만 버리면 다시금 예전의 순수한 꿀잼을 되찾을 수 있게 된다.


아마 돌체 파 니엔테의 달콤함이란 영양가는 하나도 없고 허기도 크게 달래지지 않는, 그렇지만 골라 먹는 재미가 있는 배스킨라빈스의 아이스크림 맛이 아닐까. 뭘 골라도 딱히 상관없는 소박한 고민과 즐거움만 있는 원초적인 맛. 아, 군것질이 몸에 안 좋다는 걸 누가 모르나. 그러나 그런 득실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맛있으니까 먹는 거지’처럼 1차원적인 생각에 몸을 맡길 수 있는 휴식. 무용한 것들로 채워진 시간을 보내는 게 진정한 휴식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토록 뻔하게 치부했던 ‘힐링’이라고 불렀던 거 말이다. 그렇게 이탈리안들은 쓸모로 가득찬 일상 속에서 틈틈이 쓸모가 아예 없는 진짜 휴식을 지켜내고자 ‘달콤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칭송하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총합을 '삶'이라고 부른다는 말이 있다. 돌이켜 보면 내가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했던 것들은 전부 무용한 것들이었다. 남들이 이해할 수 없고 아무 쓰잘 데 없다 해도 애정을 쏟았던 순수한 즐거움. 찻잔과 덖음차, 책장에 낙서, 불꽃놀이, 외국 동전, 포켓몬스터 띠부띠부씰, 지브리, 나만 아는 산책길과 인센스 냄새, LP와 턴테이블, 냉동실 얼음 얼리기… 그런 것들이 모여서 나를 구성한다. 결국 나다움을 결정하는 건 나의 생산력이 아니라 그런 나의 순수한 취향들이다. 나는 생애에 그런 무용한 것들을 주우려고 애쓰는 것이 또한 인생의 애틋한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아, 이 만화도 책으로 내려고 하지만 않았어도 훨씬 달달했을텐데 굳이 한 권 만들어 보겠다고 이 고생하면서 머리 싸매고 있다. 아니 그래서 싫다는 게 아니라~ 그래서 낙서 같은 걸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지. 힘들면 당 떨어진다지 않나. 이런 걸로 당 채우는 거다. 달달하게. 원고 작업 다 끝나고 나면 어디 좋은 데 여행 가서 하루종일 아이패드에 낙서만 할 거다. 끄적끄적. 책아, 대박 나서 나 좀 이탈리아에 데려다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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