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며
나는 게으르다. 이것은 32년을 살아오며 기정사실이 된 명백한 팩트다. 어서 나한테 ‘에이, 게으른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책을 써’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나는 그럼 ‘그러게 말입니다, 헤헤’ 하며 뒤통수를 긁적이고 싶다. 에필로그를 쓰는 지금 나는 꽤나 성취감에 도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처럼 게으른 사람도 이따금씩 속에서 알 수 없는 불꽃이 일면 이렇게 제법 그럴싸한 결과물을 내곤 한다. 이제 나도 이 책을 가지고 게으름을 해명할 수도 있겠지. 봤지? 나 게으른 거 아니라고. 그러나 이왕 변론을 할 거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게으른 게 꼭 나쁘지 만은 않다’ 이 책은 그런 걸 잔뜩 써놓은 책이다.
그 말을 싫어했다. 자신을 한계 짓고 순응하는 힘 빠지는 운명론자 같아서. 내가 게으른 것은 꼭 불가피한 나의 정체성인 것처럼 무력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쥔 패가 똥 패라고 해서 게임을 접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짜 운명이란 게 존재한다면, 게으름뱅이의 운명의 모양이란 이왕 게으른 마당에 죄 자빠져있는 모양보다는 게으른 와중에도 뭔가를 이룩하기 위해 생애 내내 애쓰는 모양일 거다. 그 편이 훨씬 인간답다.
이것이 내가 게으름에 대해 말할 때 하고 싶은 이야기다. ‘노동’과 ‘꾸준함’이 너무 올려치기 된 이 나라에서 게으름이란 절대악처럼 터부시 되곤 한다. 그러나 게으른 것을 다른 악질의 죄들과 나란히 놓을 순 없고, 기질이 게으름으로 정해진 사람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더더욱 없다.
모든 기질에는 장단과 양면이 있다. 나는 우리가 성실의 장점에 집중하느라 놓친 게으름의 잠재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완벽주의로부터 장인정신을,
합리화로부터 당위를,
권태로부터 꾀를,
무기력으로부터 여유를,
산만함으로부터 다재다능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단지 그걸 잘 조절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 뿐이다. 상상해보라. 자기통제력이 생긴 게으름뱅이라니, 그건 최강의 어른 아닐까? 그리고 그건 ‘여유를 아는 부지런뱅이’가 되는 것보다 명백히 더 쉬울 거다. 아니다. 사실 내가 부지런뱅이가 아니라서 정말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때로는 산만해서, 때로는 쉽게 싫증이 나서, 무기력해서, 자기합리화가 심해서, 강박적인 완벽주의에 사로잡혀서 게으름에 빠진다. 일에 제동이 걸린다. 그러나 그런 기질로 인해 다재다능을 얻기도, 여유를 알기도, 꾀를 잘 꾸며내거나 남다른 통찰력과 장인정신을 가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결국 게으른 나도 또한 부정할 수 없는 나의 정체성이다. 절대 미루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보다 중요할 리 없다. 우리가 이왕 게으름과 운명공동체로 살아가야 한다면 즐거운 쪽, 슬기로운 쪽이면 좋겠다. 장담하는데, 게으른 당신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큼 똑똑할 거라 본다. 빌게이츠도 그러지 않았던가, 게으른 사람은 남들보다 쉬운 방법을 잘 찾아내는 능력이 있다고. 우리는 게으른 채로도 꽤 괜찮은 어른이 될 수 있다.
운명 한가지를 더 끼워넣자면, 나는 어릴 때부터 창작을 하도록 정해진 모양이다. 그래서 부지런한 회사에서 튕겨나와 게으르게 이 책을 써낸다. 나의 애증의 게으름에게 이 영광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