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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가계부 : 고수입과 은혜 갚기

E : 의도치 않게 N잡러가 된 대학원생, 남, 30세

by 모초록

아디다스 복싱 글러브+복싱화

268,000


금속 가구 디자인 자문 비용

1,100,000



수입 3,977,880원

지출 2,602,455원


이번 달에는 수입과 지출 모두 지난달을 상회했다. 2023년 퇴사자는 5월에 종합소득세 신고를 하고 6월에 환급을 받는 점이 한몫했다. 또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페 사장님(건축가)의 외부 일정이 잦았는데, 내 일정도 바빴지만 새로 가구 디자인할 일을 주셨기 때문에 카페를 최대한 돕기로 했다. 거의 주 2.5일을 카페에서 일해서 70만 원이 넘는 아르바이트비를 받아서 회사에 다닐 때보다 예상 외로 수입이 크게 늘어나서, 마음 가는 대로 썼다.


큰돈을 벌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받은 것을 돌려주는 일이었다. 그간 지인들은 회사원이라는 이름으로, 선배라는 이름으로 같이 식사를 할 일이 있으면 항상 먼저 계산을 해왔다. 이번 달에는 정말 운 좋게 회사에 다니던 시절보다 큰 수입을 발생시켰기에 그간 받은 걸 갚으면서 지냈다. 받은 것의 2배로 돌려주라고 배우며 자랐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일시적이지만 당분간 큰 수입을 발생시키게 되었으므로, 여행을 한 번 다녀올지 옷을 좀 살지 고민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 고민의 결과는 추이를 조금 더 지켜보고 고민한 후에 7월에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6월의 은혜 갚기 총 6건 306,675원

지난 한 학기 동안 대한민국에서 대학원생은 ‘안쓰러운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다는 것을 느꼈고, 나는 그것을 적절히 활용했다. 실제로 연초에는 어떤 수입을 만들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가난한 마음이었던 탓에 내 카드를 내밀기가 쉽지 않았다. 대학원생이 돈이 어딨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잠깐이지만 큰 수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알게 된 5월 말부터 고마운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시간이 허락하는 한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려고 했다.


6월에는 날씨가 좋아서 집에서는 거의 요리를 해먹었는데, 내가 한 달 동안 집에서 쓴 식비(약 27만 원)보다 6번의 만남에서 지불한 식비(약 30만 원)가 더 크다.


얼마 전 친구가 집에 다녀간 후 보내준 멜론 2개가 6월의 기분을 많이 바꿔주었다. 나도 언젠가 바쁘고 힘든 시기를 보내는 친구가 있으면 멜론을 보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전까지 직접 멜론을 구입해 본 적이 없는데, 덕분에 유튜브에 멜론 자르는 법을 검색하고 실행해 보았다. 보답으로 버거를 산 후에 곧바로 만두와 맥주도 사는 식으로 보답했다.


복싱 글러브+복싱화 268,000원, 6개월 등록 850,000원

6월 중순에 옆집에 사는 남자와 스파링을 할 수 있었다. 가끔 집 앞에서 마주칠 때야 인사를 나눴지만, 서로를 복싱장에서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난 달쯤에야 서로를 알아 보고 처음 인사를 나눴고, 먼저 제안해 주셔서 가볍게 스파링을 해볼 수 있었다. 스파링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가르침이었다. 아프긴 하지만 엄청나게 친절한 가르침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복싱을 하다 보면 흥분하지 않는 사람의 멋 같은 걸 알 수 있는데, 내가 무엇을 해도 차분하게 되갚아주는 게 멋졌다. 옆집에 사는 남자는 나보다 더 오래, 열심히 운동하고 나이도 어린데, 언제 어떻게 비슷하게 겨루어볼 수 있을까? 언제 이길까?


국제도서전에서 책 3권 구매 51,920원

어쩌면 올해 책을 만들게 될 수도 있으니 바쁜 와중에도 정말 딱 3시간의 틈이 생겨서 국제 도서전에 다녀왔다. 나는 책은 도서관에서 먼저 읽고, 정말 좋아하는 책만 서점을 통해 구입해오는 방식으로 살지만 도서전에 가서 각자 뽐내고 있는 책들을 보니 몇 권 살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정말 좋아하게 된 김화진 작가님의 책 2권과 내가 정말 좋아하는 김금희 작가님이 사인회도 하고 계셔서 책을 살 수밖에 없었다. 마침 이번에 식물에 관한 책을 쓰셨고 친필 사인까지 받을 수 있었기에, 식물 가구를 만들어야 하는 나에게 좋은 징조 같았다.

김화진 『동경』, 김금희 『식물적 낙관』

김화진·이희주·박솔뫼·정기현 『여름을 열어보니 이야기가 웅크리고 있었지』


생필품·화장품류 96,910원

돈이 생긴 김에 선크림, 왁스, 헤어토닉, 치약 같은 화장품과 생필품을 미리 구매했다. 치약은 여러 브랜드를 기분 따라 쓰고 싶어서 유시몰과 센소다인의 제품을 각각 샀고, 재완이가 추천했던 죽염 칫솔을 사봤다.


식물 가구 디자인을 도와줄 티셔츠 68,040원

아무래도 식물 가구라는 걸 만드는 일은 참 어렵다. 이전까지 만든 가구는 몇 개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확실한 목적과 예산과 방향성이 있었고 나는 그걸 수행하기만 하면 됐는데, 이번엔 아니다. 누군가의 필요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실험해 보고, 또 직접 만들어 설득해야 하는 과정이 있었다. 심리적 안정을 위해, 재완이가 알려준 가드닝 모티프의 의류 브랜드 sassafras의 가든 아머라는 티셔츠를 샀다. 식물 가구의 세계에서 길을 잃을 때 입으려고 한다.


금속 가구 디자인 자문 비용 1,100,000원(지출 포함X)

창업지원사업을 같이 하는 팀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가구 디자인의 자문 비용으로 110만 원을 지출했다. 다행히 팀원들이 나에게 꼭 맞는 것 같다며 응원하고 지지해 줬다. 자문을 해주실 분은 이미 철제 가구 세계에서는 유명한 분이고 도자기 선생님의 작업실의 인테리어도 하셨던 분이라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도자기 선생님이 내가 인테리어로 방향을 바꾸겠다고 했을 때 이분 작업을 봐 보라고 추천하셨었기에 내 돈을 들여서라도 꼭 하고 싶었다.


자문 계약을 하기 전날, 그간 철 작업을 의뢰해 오던 을지로의 제작자님으로부터 은퇴하신다는 연락을 받고 큰 실의에 빠져 있었다. 호기롭게 퇴사 후 이것저것 하지만 결과물을 내는 것은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어쩐지 최근 을지로를 방문했을 때, 제작자님께서 소주 회사에서 일하시다가 을지로로 오게 된 이야기를 처음 들려주시며 나의 시작에 관심을 가지고 응원해 주셨던 이유가 은퇴를 알리는 문자를 받고 나서야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첫 자문 후 장문의 피드백 중 첫 문단을 읽었을 때, 내가 상황을 탓하며 점점 수비적이고 안정적인 포지션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걱정을 중단했다.


(2024년 7월 2일 피드백 이메일 발췌)

프로젝트 경험이 있으시고 전반적으로 촘촘하고 매끄럽게 잘 진행 해오고 계신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제안 드리자면, 프로젝트 전반에서 완벽하고 좋은 결과를 만들려는 태도보다는 리스크를 감수하는 시도와 실패 확률이 높은 과정을 기꺼이 겪어 보기를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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