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만남
#16 ~ #17 에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1년 동안의 동거 끝에 우리는 이별을 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친구와 같이 갔던 여행에서 여친이 진심으로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였다.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이건 내가 놔주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당시엔 나도 너무나 지쳐있었다. 이별을 결정하고 너무나도 답답한 마음에 집을 나와, 주차되어 있는 차 조수석에 들어가 앉았다. 이럴 땐 누군가와 수다를 떠는 게 가장 좋은 법이다. 부모님한테는 내 힘든 이야기를 전할 수가 없고, 친구한테 이야기하기에는 좀 창피했다. 그래서 고향에 있는 하나뿐인 피붙이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동생은 이미 결혼하여 초등학생 딸 2명을 키우고 있는 전업주부이다. 전화를 받자마자 내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동생.
“왜?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왜 그래?”
그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내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랑을 지키지 못한 무능한 나와 내 몸 상태, 그리고 그런 날 힘들어하는 연인, 그간의 설움과 울분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다. 수화기 너머로 놀라는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꺼이꺼이 한참을 울고 나니 마음이 좀 진정되었다. 동생은 전적으로 내 편이 되어주었다. 그래, 이게 핏줄의 힘이지.
이별은 정말 쉽지 않았다. 부동산에 내놓은 집은 나가질 않았고, 나는 영화 조감독 일을 시작했다. 아침 10시에 출근해 밤 12시에 집에 들어오는 생활을 프리프로덕션 기간인 두 달 동안 계속했다. 집에서 같이 밥 먹을 시간도 없었고, 어쩌다 마주치면 서로 짜증을 내고 있었다. 여전히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었기에, 세입자가 구해져서 이사를 가지 않으면 이별은 완성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내게 다른 썸녀가 생겼다. 애초에 이성으로는 생각하지 않아서 무심하게 대하던 상대였는데, 그런 태도가 오히려 그 친구에게 어필이 되었던 것 같다. 난 그 친구에게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둘이 만난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비밀로 하자고 했고, 둘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도 거부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남친도, 썸남도 아닌 딱히 정의되지 않는 남자였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동안 여러모로 고생했던 내게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신이라는 게 있다면 말이다) 객관적으로 외모가 너무 뛰어난 친구라 사진을 본 내 친구들의 반응은 항상 똑같았다.
“얘가 널 왜 만나?”
관계가 점점 깊어지자 그 친구는 내 집에 오고 싶어 했다. 집이 청소를 못해서 엉망이라는 핑계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 거절할 수는 없었다. 내 집에 오고 싶어 한다는 것은 분명히 좋은 신호였다. 이러다간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싶어, 결국 나는 사실대로 실토했다. 의외로 그 친구는 아무렇지 않아 했다. 동거를 했다는 사실도, 아직 그 사람과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도.
난 전 여친과의 이별을 하루빨리 완성시켜야 했다. 전 여친이 이사 갈 집을 내가 알아보기 시작했다. 전 여친의 짐은 사실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전세금만 어떻게 마련해 주면 이사를 갈 것 같았다. 직방과 다방을 수시로 훔쳐보았다. 그러다가 딱 맞는 매물을 발견했다. 전 여친에게 소개를 하자, 그녀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렇게 전 여친은 바로 이사를 갔고, 우리의 이별은 끝내 완성되었다.
전 여친과 동거를 하던 집에 새로 만난 친구를 초대했다. 전 여친과 함께 쓰던 식탁에서 같이 밥을 먹고, 전 여친과 함께 쓰던 소파에서 함께 넷플릭스를 보고, 전 여친과 함께 쓰던 침대에서 같이 잠을 잤다. 그래도 우린 연인이 아니었다. 그냥 잠깐 만나는 사이였다. 이 친구와의 관계에서 가장 문제다 싶은 건 싸움이 성사가 안 된다는 거였다. 아무리 좋을 때라도 남녀 사이라면 의견이 안 맞을 때가 생긴다. 난 대화를 해가며 조율해가고 싶었지만, 그 친구의 태도는 늘 이랬다.
‘이걸 안 맞춰 준다고? 그럼 난 맞춰줄 사람한테 가면 돼’
주변에 늘 남자가 많은 친구였기에 난 이 관계에서 철저히 ‘을’이었다. 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가 되기 마련이니까. 난 만남을 거듭할수록 우리의 관계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이 관계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관계가 한창 좋을 때 이 친구가 물었다.
“넌 언제 감독 돼?”
써놓은 시나리오가 있었기에 촬영이 끝나면 얼른 수정해서 여기저기 돌려보려고 한다. 늦지 않게 입봉 할 수 있을 거라고 억지로 거짓 희망 회로를 돌려가며 답을 했다.
“난 일찍 결혼하고 싶어”
그 말인 즉, 감독이 되지 못하면 너랑은 끝이라는 뜻이었다. 코로나 기간 동안 신규투자가 거의 없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입봉의 기회는 정말 하늘의 별따기였다. 난 이별을 예감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새로 만난 그 친구와의 달콤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전 여친을 완전히 잊을 만큼 나를 순식간에 사로잡았던 여자였기에 아쉬운 마음은 더 컸다. 점점 멀어지고 있었기에 내심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이별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컸다. 아! 언제 또 이렇게 예쁜 여자를 만나보나.
그렇게 짧고 굵었던 만남이 지나가자, 전 여친과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독서모임 모임장이었고, 전 여친은 운영진이었다. 둘 다 모임을 좋아해서 매주 하는 독서모임을 자주 참석하는 편이었는데, 난 그동안 촬영 때문에 6개월 동안 참석하지 않고 있었다. 촬영이 끝나자 다시 모임을 참석했고, 그곳에서 전 여친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근황 토크를 해보니 새로 이사 간 집에서 나름 잘 적응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 때문에 마음 정리가 다 되어서, 전 여친을 대할 때 별 사심 없이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서로 너무 싫어해서 헤어진 건 아니어서 다시 편한 사이가 되는 게 가능했다. 그러던 중 전 여친에게 남친이 생겼다. 전 여친도 이별하고 공허한 마음에 여행 동호회를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고 했다. 사진을 보여주길래 봤는데, 짜식! 괜찮게 생겼다. 키도 나보다 크고. 일반적으로 여자들에게 인기 있을 외모였다. 난 진심으로 전 여친이 좋은 사람 만나길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잘 됐다고 축하해 주었다.
몇 주 지나지 않아서 전 여친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만나보니 사람이 좀 날티가 난다는 거였다. 독서모임 사람들은 지적인 사람이 많은데, 여행 모임 사람들은 너무 외향적이고 술을 너무 좋아해서 좀 그렇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안 그런 사람들도 많겠지만 말이다) 새로 만난 남친을 진지하게 계속 만나도 될지 고민이 된다고 했다. 이런 고민을 왜 결혼을 전제로 동거까지 한 나한테 털어놓는지 의문이었지만, 그만큼 날 정말 편한 오빠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난 성심성의껏 고민 상담을 해주었다.
"다 장단점이 있는 것 아니겠어? 시간을 두고 잘 생각해 봐!"
전 여친은 얼마 되지 않아 또 나에게 전화를 했다. 이번엔 만나자고 했다. 남친 있는 여자를 이렇게 만나도 되나? 싶었지만, 전 여친이 어떻게 연애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단둘이 만나 맥주를 마셨다. 만남의 주제는 역시 현 남친이었다. 아무래도 고민이 많이 되는 듯했다. 나와는 반대 결의 사람이었기에 함부로 조언을 해줄 순 없었다. 이 정도로 고민하는 걸 보니 곧 관계가 끝날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내심 이별을 바라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지나지 않아 밤늦게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술에 취해 혀가 꼬부라지는 목소리였다.
"오빠, 나 남자친구랑 헤어졌어. 지금 나 보러 오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