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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오래 마주 보는 존재

모니터

by 라이트리
8 모니터.png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요즘 제일 오래 마주 보는 존재는,

가족도, 친구도, 거울도 아니고…

모니터라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켠다.

대충 비밀번호를 누르고,

눈은 반쯤 감긴 채로

뉴스든 메일이든 뭐든 하나는 켜 놓는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일할 땐,

모니터 두 대,

심하면 태블릿까지 동원해서

정신없이 탭을 넘긴다.

회의하고, 메모하고, 검색하고,

그걸 또 정리하고, 다시 검색하고.


하루가 그렇게 지나간다.

숨 돌릴 틈도 없이.

근데 밤이 되면 또

그 앞에서 드라마를 보고,

영상을 보다가 갑자기 딴 걸 검색하고,

그러다 멍하니 앉아 있게 되는 시간들.


그러니까,

하루 중 진짜 '나'와 마주하는 순간

어쩌면 사람들 사이가 아니라

모니터 앞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도 보고,

회의도 하고,

쇼핑도 하고,

세상에 있는 거의 모든 걸

나는 이 네모난 화면을 통해 보고 있다.


그런데 가끔은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 모니터,

어쩌면 나보다 나를 더 많이 봤을지도 모른다.


기분 좋을 때,

얼굴 살짝 붉어지며 웃는 내 모습.

지칠 때,

턱을 괴고 한숨 쉬던 그 표정.

울다가 갑자기 웃음 터졌던 그 순간까지.


심지어

식은땀 흘리며 작업하던 날 밤,

"살려줘…"

중얼거리던 것도 봤을 거다.


나는 이걸 그냥 ‘도구’라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보면

모니터는 내 일상을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가까이서 바라본 존재였다.


다른 사람은 몰랐을 내 표정들을

모니터는 항상 정면에서 지켜봤을 테니까.

내가 나를 볼 때보다

더 오랫동안, 더 자주.


한 번은 그런 적도 있다.

슬퍼서 울면서 영상을 보다 말고

정지된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내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이렇게 울고 있었나?' 싶어서.


그 순간,

모니터에 비친 내 모습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위로해주고 싶을 만큼.


나는 세상을 보기 위해

모니터를 켜지만,

모니터는 그 시간 내내

나만 바라본다.

한 치의 시선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검색창에는 수많은 고민이 쌓이고,

작업창에는 미완의 문장들이 떠다니고,

재생 중인 영상보다

그걸 바라보는 내 표정이

더 많은 얘기를 한다.


가끔은 ‘꺼야지’ 하고

전원 버튼을 누른 후에도

어딘가 켜져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모니터 화면은 꺼졌지만,

그 속엔 아직도

내 하루가 깃들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 보면

세상에 나만큼 나를 오래 본 존재가 있다면

그건 아마,

이 모니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세상을 보기 위해

모니터를 켰고,

모니터는 아무 말 없이

내가 돌아올 걸 알고 있었던 듯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커서를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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