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 동그라미, 그냥 그린 거 아니지

낙서

by 라이트리
7 낙서_썸네일.png





누군가가 종이에 조용히 낙서를 시작할 때면,

나는 슬쩍 그 손끝을 바라본다.


동그라미.

그 안에 또 동그라미.

아무 말 없이 종이에 작게, 천천히, 반복되는 그 원들.

누군가는 ‘심심해서 그렸나 보다’ 하고 넘기겠지만,

나는 안다.

그건 그냥 그린 게 아니라

마음속 무언가가 삐죽 튀어나온 거라는 걸.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끄적였어”라고 말하지만,

진짜 아무 생각 없을 땐

사실 손도 안 움직인다.

아무 문제없는 사람은

낙서 대신 딴짓을 하지.


회의 시간, 수업 중, 전화 통화하면서

종이 한 귀퉁이에 조용히 그려지는 모양들.

그건 종이 위의 말 없는 신호다.

특히 동그라미는,

그 안에서 무언가를 감추려는 몸짓처럼 느껴진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마음이 복잡했던 날,

누가 볼까 봐 아무렇지 않은 척,

손만 움직였다.

글은 쓰지 않고 모양만 그렸던 순간들.

직선, 점, 삼각형, 그 사이 어딘가에

무의식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숨겼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낙서는 말보다 솔직했다.

말은 돌려 말할 수도 있지만

손은 거의 반사처럼 움직이니까.

마음이 쓱 하고 흘러나오면

펜은 그걸 따라가고,

나는 그제야 내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누군가가 낙서를 시작하면

나는 그 그림보다 그 마음을 본다.


“지금 이 사람, 괜찮은가?”

“뭔가 말하지 못한 게 있지는 않나?”


모양은 엉성해도

그 안의 감정은 꽤 단단히 얽혀있다.

지워도 흔적이 남는 게 낙서고,

말하지 못한 마음의 사본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누군가가

말없이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으면

나는 조심스레 묻고 싶어진다.


“지금… 괜찮은 거 맞아?”


혹시 모른다.

그 동그라미 속에

숨겨놓은 마음이

그 말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keyword
이전 07화난 묵묵히 널 버티고만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