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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와 누 Jul 17. 2021

지옥

나루세 미키오 작가론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내 옆에 남편이 있다.
……그 남자에게 몸을 붙여, 그 남자와 함께 행복을 찾으며 사는 것이
나에게 가장 행복한 길인지도 모른다.
행복이란, 여자의 행복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밥>


1. <밥>: 남편

   오사카에서 권태로운 삶을 보내고 있는 남편 하츠노스케(우에하라 켄)와 아내 미치요(하라 세츠코)에게 하츠노스케의 조카 사토코(시마자키 유키코)가 찾아온다. 안 그래도 형편이 좋지 않은데 손님까지 오니 힘겹지만, 미치요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츠노스케와 사토코는 태평하게 지낸다. 결국 야속함에 도쿄에 있는 친정으로 가버린 미치요. 하지만 부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뭉쳐야 함을 깨닫고, 하츠노스케는 도쿄에 가 아내를 데리고 돌아온다. 이것이 <밥>(1951)의 줄거리이며, 위 인용문은 영화 말미에 오사카행 기차에 몸을 실은 미치요가 한 내레이션이다.

 몇 가지 개선점이 있으니 해피엔딩이라 할 수 있다. 영화 끝에서 하츠노스케는 아내만 보면 습관적으로 내뱉는 “배고프다”를 다시 말하지만, 이번엔 스스로 놀라 사과한다. 무신경함을 고치려 노력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미치요가 도쿄에 있는 동안 더 높은 임금을 주는 직장과 가계약해 아내를 괴롭게 하던 돈 문제를 해결했으며, 사토코는 돌아갔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미치요가 남편과 다시 뭉친 이유는, 물론 남편에 대한 사랑을 깨달아서겠지만, 영화에서 보이는 것만 놓고 생각했을 때엔 도쿄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마치 합심한 듯이 그녀를 남편에게 돌아가라는 식으로 대해서인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쿄서 아군이 없는 미치요의 “돌아가서 같은 날을 반복해야 한다니...”라는 한숨 섞인 대사는 처량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의 지인들을 욕할 수만은 없다. 그녀는 경제력, 다시 말해 돈이 없어 혼자 살 수 없다. 그러니 그렇게 도쿄에서 일자리를 구해보려 했던 것이고.

 남편과 “반복”하는 “같은 날”에서 벗어나 보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같은 날”을 “반복”하러 오사카 행 기차에 몸을 실은 여인. 그렇다면 위 내레이션은 얼마나 안타까운가. 그리고 위 내레이션 후 삽입된 부부의 집 앞 골목을 비추는 숏, 영화 도입부에 비친 골목을 다시 한번 비춰 수미상관을 만들어 미치요가 그렇게 싫어하던 “같은 날”의 “반복”을 명시하는 숏은 또 얼마나 끔찍한가. 아직까지 과한 말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반복은 미치요의 입장에서 봤을 때 지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2. <긴자화장>: 아들

    반복에 기속되는 여성. 우리는 이와 비슷한 상황을 <긴자화장>(1951)에서도 본다. 술집 벨아미의 마담 유키코(다나카 키누요)는 돈에 쪼들린다. 따라서 유키코의 지인은 그녀에게 돈 많은 남자를 소개해주지만, 막상 유키코는 돈 때문에 남자를 만나길 꺼린다. 그녀는 진정한 사랑을 꿈꾸는 것 같다. 그리고 <긴자화장>은 후반부까지 진정한 사랑을 기다리며 인고한 유키코에게 선물을 주듯 지방 유지(有志) 이시카와(호리 유지)를 등장시킨다. 그는 유키코의 마음을 순식간에 빼앗아 겄으며, 따라서 유키코는 일이 잘 풀린다면 돈 문제를 해결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아들 하루오(니시쿠보 요시히로)와의 동물원에 가자는 약속을 어기고 이시카와에게 시간을 할애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무 문제없다. 이제 이시카와와 유키코가 잘 되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긴자화장>엔 <밥>과 같이 여인과 계속 함께 살았으며, 끝에 가선 여인으로 하여금 기존의 삶을 반복하도록 만드는 남성이 있다. 바로 하루오이다. 우선 질문해보자. 흔히들 <긴자화장>을 보면 유키코와 하루오가 평범한 모자관계라 하는데, 정말로 그런가? <긴자화장>엔 모자가 한 숏 안에 담기거나, 대화를 하는 장면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만 봐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둘의 관계를 파헤쳐 보자. 하루오는 영화가 시작할 때 홀로 등장해 사거리에서 놀며, 그 후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틈틈이 계속 홀로 떠도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소년이 홀로 활보하는 신들은 유키코가 <긴자화장>의 서사를 만들기 위해 활동하는 신들과 병치된다. 따로 노는 두 사람. 이를 보고 어쩌면 하루오가 등장하는 신들은 일종의 막간 역할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이런 시각에 따르면 유키코의 이야기는 영화의 주된 이야기이고, 하루오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이야기이며, 모자 관계는 주(主)와 부수(附隨)의 관계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각이 틀렸음을 보게 된다. 유키코가 동물원에 가자는 약속을 저버리고 이시카와에게 가자, 하루오는 울다가 곧 언제나처럼 홀로 거리를 활보한다. 그리고 지나가던 청년이 “오늘 학교 안 가니?”라 묻자 “응”이라고 말하며 실종된다. 독립적인 아이는 자신의 실종도 스스로 결정하는 것 같다. 그리고 실종 소식은 유키코의 귀에 들어가고, 그녀는 황급히 이시카와 곁을 떠나며 대신 이시카와에게 벨아미의 호스티스 쿄코(카가와 쿄코)를 소개해준다. 이후 유키코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하루오는 저녁이 되어야 나타나고, 알고 보니 아이는 동네 아저씨와 낚시를 하고 왔음이 밝혀진다. 그리고 그 사이 안타깝게도 쿄코와 이시카와는 사랑에 빠졌다.

 하루오는 자신의 실종을 통해 유키코가 다른 삶을 사는 것을 저지했고, 그녀가 꾸려나가던 관객이 주(主)라 생각한 이야기의 끝을 자신을 쫓는 이야기로 마무리 짓게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영화 결말부에서 하루오는 영화 시작과 같이 사거리를 활보하며 수미상관을 만든다. 그는 유키코의 주(主) 이야기를 변질시켰으며, 반복을 만들어 그 속에 유키코를 기속시켰다.

 이제 우리는 <긴자화장> 끝에서 유키코의 “어차피 하루오만이 내가 믿을 사람”이라는 말이 모자 사이의 애틋한 관계만을 보여주는 말이 아님을 안다. 이 말은 하루오라는 남성에게서 자신이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은, 반복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체념한 자의 말이다. <밥>의 마지막 내레이션에서 느꼈던 안타까움을 우린 여기서 다시 느낄 수 있다. 반복·지옥은 여기에도 있다.

     

3.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돈

   물론 우리는 방금 <긴자화장>에 대한 논의에서 허점을 본다. <밥>을 말하며 경제력·돈이 여성으로 하여금 변화를 포기하도록 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했다고 말했고, <긴자화장>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며 유키코가 돈에 쪼들린다고도 말했건만, 하루오에 관해 말을 계속하면서 은근슬쩍 유키코의 돈 문제는 뒷전으로 빠졌지 않은가. 사실 이는 어쩔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긴자화장> 후반부에 유키코의 돈 문제는 계기 없이, 뜬금없이 알아서 해결되기 때문이다. 영화가 아직 어려 돈이 없는 하루오를 위해, 그가 문제없이 유키코를 지옥에 기속시킬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반면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1960)는 남성이 여성을 반복·지옥에 기속하는 데 돈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뿐만 아니라 나아가 돈이 자체적으로 또 다른 반복·지옥을 만든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게 무슨 말인지는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가 여인들에게 제시하는 갈림길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영화의 여인들, 즉 바에서 일하는 마담과 호스티스들은 결혼과 자신만의 바 개점이라는 두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주인공 마담 케이코(타카미네 히데코)의 손님 고다(나카무라 간지로)는 케이코가 30살이라는 말을 듣자 “그 나이면 여자로선 인생의 전환점이지. 결혼을 할까, 가게를 열까 결정해야 하는 시기거든.”라고 말하며 이를 명시한다.

 하나씩 살펴보자. 첫 번째 길 결혼은 우리에게 익숙한 남성의 반복·지옥에 기속되는 길일 것이다. 그렇담 후자는 뭘까? 아마 여성이 남성에게 돈 때문에 잡히는 일 없이 돈을 벌며 자주적으로 사는 길일 것이다. 그런데 가진 돈이 없는 마담과 호스티스들은 어떻게 바 개점의 길을 갈 수 있을까? 답은 한 때 케이코의 밑에서 호스티스로 일했지만 지금은 어엿한 자기만의 바를 가지게 된 유리(이와지 케이코)가 보여준다. 그녀는 대부업자 손님 미노베(오자와 에이타로)에게 돈을 빌려 자신의 바를 열었다.

 우리는 방금 전까지 남성의 반복·지옥의 끔찍함을 보고 온 참이다. 따라서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여인들은 모두 돈을 빌려 가게를 열 것만 같다. 그런데 조금만 더 살펴본다면 돈 빌리기는 남성의 반복·지옥보다 더 위험한 반복·지옥을 만들어내는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영화 중반 유리는 케이코에게 채권자들이 주기적으로 찾아와 아주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즉 돈 빌리기를 통해 형성된 채권 채무 관계는 채무자로 하여금 주기적으로 돈을 갚게 만들며 이 주기성, 돈이 만드는 반복이 유리를 옭아매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가 돈이 만드는 반복·지옥에 짓눌려 자살하는 것을 보게 된다.

 알고 보니 두 반복·지옥 중 하나를 강요당하는 여인들. 따라서 케이코는 다른 길, 정말로 여성이 자주적으로 사는 길을 가보려 한다. 그녀는 바 손님들을 한 명씩 찾아가 투자 권유를 하며 계획을 밝힌다. 손님들이 낸 출자금을 모아 자신이 바를 차리면, 그 출자금은 출자금을 낸 손님들이 바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적립금이 되고, 손님들은 술값을 적립금에서 차감할 수 있게 될 터이니 투자하라고 말이다. 부채가 아니라 자본 위에 설립될 바. 은행가 손님 후지사키(모리 마사유키)는 이 계획을 듣고 “영리하군.”이라 말한다. 정말 그렇다.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그녀는 남성이나 돈에게 잡혀 살지 않아도 되기에.

 그렇게 시간이 지나 영화 말미에 그녀는, 비록 중간에 많은 일이 있었지만, 후지사키에게서 주식 몇 주를 받는다. 필요한 자본금 중 부족분에 상당해 보이는 주식. 계획 성공이 눈앞인 케이코. 그런데 그녀는 다음 날 후지사키에게 주식을 돌려주고, 영화 도입부와 같이 바로 출근해 당차게 웃으며 손님들에게 인사한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일단 당장의 의문을 해소해보자. 그녀는 왜 주식을 돌려준 것인가? 답은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금방 할 수 있다. 후지사키는 주식을 건네기 전 날 밤 술에 취해 케이코를 강간했다. 따라서 후지사키가 건넨 주식은 거부해야 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케이코는 남성 탓에 자주를 실패했다.

 그런데 이제 더 큰 의문이 우리를 덮친다. 어쨌든 케이코는 자주를 실패했으니 남성 아니면 돈의 반복에 기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기어코 둘 중 어느 것도 택하지 않았고, 따라서 이 영화엔 반복이 없어야 하건만, 영화는 케이코가 바에 출근하는 모습으로 반복하고 있다. 이 반복은 무엇인가?

 이렇게 말해보자.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는 케이코가 아무 반복·지옥에도 속하지 않으려 하자 스스로를 리셋한다. 이 점은 케이코가 마담으로 있던 바의 호스티스 준코(단 레이코)를 보면 분명해진다. 준코는 케이코가 투자 권유를 하러 다니는 동안 바 손님의 돈을 빌려 영화 끝에서 자신의 바를 열었다. 영화는 돈의 반복에 못 이겨 자살한 유리를 대신해 또 다른 여인을 돈의 반복에 빠트려 영화 끝을 영화 시작과 다름없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다시 시작하는 영화. 준코는 곧 자살할 것이다. 케이코는 다시 결혼과 바 개점 사이에서 곤경에 처할 것이다. 곧 다시 닥칠 지옥들을 앞둔, 지옥의 경계에 선 셈인 케이코의 미소는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동시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4. <흐트러지다>: 착취

   <흐트러지다>(1964)는 시작이 색다르다. 레이코(타카미네 히데코)는 전쟁으로 남편을 잃었지만 시댁에 머물며 시댁의 가게 모리타 상회를 부흥시켰다. 따라서 이미 스스로 경제력·돈을 가지고 있는 여성인 그녀에게 남성과 돈은 필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 번째는 근방에 수퍼마켓이 들어서서 지역 상권을 장악한 것이고, 두 번째는 레이코의 시댁 입장에서 레이코의 남편이 죽은 이상 레이코는 결국 남이기에, 그녀가 집안의 경제력을 쥐고 있는 상황이 탐탁잖다는 것이다. 

 영화엔 이 문제들을 해결할 최적의 인물로 레이코의 남편의 동생, 레이코의 도련님 코지(가야마 유조)가 있다. 혈연적으로 정당한 모리타 상회의 주인인 그는 계속해서 집안사람들의 가게 운영 권유를 거부하며 놈팡이 노릇을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모양인지 관련 업종에서 일하는 매형을 찾아가 모리타 상회가 수퍼마켓으로 업종을 변경할 수 있도록 돈과 조언을 구한다. 이 영화 중반 코지의 결단에 따라 곧 모리타 상회는 모리타 수퍼마켓이 될 것이다. 여기서 코지는 설자리를 잃어가는 레이코를 모리타 수퍼마켓의 중역으로 앉혀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 주장이 먹혀들 것 같진 않다.

 한 순간에 자신이 일군 것들과 돈을 잃을 위기에 처한 레이코. 그런데 이것도 모자라 그녀는 더 큰 곤경에 처한다. 어느 날 밤 코지는 레이코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이 사랑은 도련님의 형수를 향한 사랑이란 점에서 도덕적으로 문제지만, 우리의 논의에선 여인에게서 돈을 뺏어간 것도 모자라 여인을 반복·지옥에 기속시키려 하는 남성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문제다.

 자주성을 박탈당하고 지옥을 목전에 둔 레이코. 그렇다면 이어지는 이야기는 설상가상 속 레이코의 시련일 것 같지만, 정작 영화는 딴소리를 한다. 놈팡이 짓은 그만두고 모리타 상회 배달부 노릇을 하는 코지는 계속해서 레이코와 마주치고, 둘 사이의 섬세한 긴장을 담은 일상의 나날들이 태평하게 반복된다.

 이 반복은 곧 도래할 것 같았던 모리타 상회의 모리타 수퍼마켓으로의 전환을 지연시키고 있다. 상황의 급변과 위기의 고조를 예상했던 관객을 배신한 태평한 영화. 마땅히 연쇄되어야 할 사건의 고리를 끊고 그 자리를 차지한 어떤 반복.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이 반복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다. <밥>과 <긴자화장>에서 명목 상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남성에 기속된 여인들은 우리에게 반복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이 반복은 코지의 고백에 대한 레이코의 답변을 대신한다. 그녀는 사랑에 빠져버렸다.

 하지만 도련님과 형수는 도덕이 있기에 맺어져선 안 되고, 무엇보다 나루세 미키오의 여인은 얌전히 반복에 기속될 인물이 아니다. 따라서 영화 후반부 레이코는 떠나기로 마음을 굳히고, 이제야 영화에 위기가 고조된다. 코지는 떠나는 그녀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는 떠나는 레이코가 몸을 실은 기차에 따라 몸을 싣는다. 하염없이 가다 어느 산골 마을에서 내린 남녀. 이후 코지와 단 둘이 있게 된 레이코는 마음이 흔들리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넘어가지 않고, 코지는 레이코의 마음을 얻지 못하자 비관에 빠져 자살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흐트러지다>의 결말은 참 이상하다. 마을 남성들은 코지의 시체를 들것에 실어 황급히 갈 길을 가고, 그제야 코지가 자살했음을 안 레이코는 시체를 쫓는다. 하지만 그녀는 힘이 부친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추적을 멈추고, 그 사이 시체는 언덕 너머로 사라진다. 이런 엄청난 사건을 겪었으면 멈춰 선 자리에서 쓰러질 만도 하건만, 그녀는 버티고 서 있다. 이후 응시하는 레이코의 얼굴이 숏에 잡히고, 그녀의 표정은 한껏 격양되어 있다가, 냉정해진다. 영화는 그녀의 냉정한 얼굴 위로 종(終)을 띄운다.

 우리의 논의에서 처음으로 수미상관이 아닌 결말이 나타났다. 여인을 반복에 기속시키는 남성이 자살하자 여인은 반복·지옥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런데 레이코는 기뻐 보이지 않는다. 이는 사랑하던 사람이 자살했으니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슬퍼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지옥에서 벗어난 순간, 지옥의 경계에 선 나루세 미키오의 여인은 제자리에 버틴 채로 굳어버린다. 나아가 영화는 이 여인의 앞으로의 행방을 보여주지 않고 뚝 끊어 자신을 매듭짓는다. 마치 그녀에게 미래는 없다는 듯이. 그렇게 남은 냉정한 표정은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케이코가 자신의 암울한 운명을 앞두고 지은 미소와 더불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5. <흐르다>: 남자는 여자의 미래다

   우리는 지금까지 반복·지옥에 기속된 여인들(<밥>의 미치요, <긴자화장>의 유키코)과 반복·지옥의 경계에 있는 여인들(<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케이코, <흐트러지다>의 레이코)을 보았다. 그렇다면 자연히 마지막 경우의 수를 따져볼 차례가 되었다. 바로 지옥을 벗어난 나루세 미키오의 여인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것까지 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지옥에 기속된 여인들에게서는 새로운 점을,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지옥의 경계에 선 여인들에게선 나름의 납득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흐르다>(1956)에서 계속 가보자. 망해가는 게이샤 집 츠타노야의 주인 츠다야코(야마다 이스즈)는 배 다른 누이 오토요(카하라 나츠코)에게 진 빚에 시달린다. 하지만 츠타노야 게이샤들의 씀씀이는 줄 생각을 안 하고, 츠다야코도 돈을 아끼기는커녕 새로운 가정부 리카(타나카 키누코)를 고용한다. 남편은 재작년에, 아들은 작년에 죽은 남자 없는 여인 리카는 살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전전하는 여성이다.

 이렇게 먹을 입도, 급여를 줄 사람도 하나 늘었으니 돈의 반복이 여인들을 짓누르기 전에 돈의 반복에서 탈출해야 함은 당연해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이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긴자화장>에서 보았다. 돈이 많은 남자를 만나면 된다. 하지만 츠다야코는 <긴자화장>의 유키코와 같이 돈 때문에 남자를 만나길 꺼려하고, 대신 그녀는 과거엔 연인이었지만 지금은 결코 그녀를 만나러 오지 않는 하나야마의 지원을 꿈꾼다. 이름은 계속 언급되지만 영화엔 결코 등장하지 않는, 오지 않는 하나야마는 그녀에게 아닐 미(未)에 올 래(來),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미래이다.

 돈의 반복에서 벗어나 남성의 반복에 기속되어보려 하지만 남성이 오지 않아 난감한 여인. 그렇다면 그녀에겐 다른 수, 사실 우리가 볼 때는 더 바람직해 보이는 수가 있다. 츠다야코도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케이코처럼 기지를 발휘해 스스로 돈을 벌려고 노력하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츠다야코는 이상하게도 그러지 않으며, 하나야마에게 기속되는 것만을 바라는 듯하다. 그녀는 자주(主)를 추구하던 나루세 미키오의 여인들과 달라 보인다.

 그렇다면 <흐르다>는 점점 불어나는 빚을 감당 못하는 여인을 보여주는 이야기일까? 또 그렇진 않다. 이상하게도 <흐르다>는 츠타노야 사람들의 삶이 무너지고 있음이 아니라 멀쩡하게 반복되고 있음을 보인다. 몇 사람이 못살게 굴기는 하지만, 츠타노야의 사람들은 돈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태평하게 산다.

 그리고 이 이상한 반복을 체화한 듯한 인물이 있다. 츠다야코의 동생 요네코(나카키타 치에코)의 딸 후지코는 영화 초반에 몸이 아파 츠타노야 마루 한복판에 눕는다. 이후 소녀는 영화의 결말이 올 때까지 상태를 유지한다. 관객은 <흐르다>가 진행되는 와중에 틈틈이 비치는 누워있는 소녀를 보며 기시감을 느낀다. 어떤 날에서 다음 날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어떤 같은 날이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착각을 가지게 하는 모습. 저 정도로 아이가 오랫동안 아프면 큰 병원에 데려가야 할 것 같지만 아무도 데려가지 않는 기이한 상황. 소녀는 이상한 반복을 대표한다.

 돈의 반복 안에 있는 삶의 반복. 삶을 짓누르지 않는 돈의 반복. 이 상황은 희한하지만, 어쨌든 별 탈 없으면 계속해서 이어졌으면 하는 게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정해진 수순인 것일까, 끝에 가 이 상황은 무너지고 만다. 한 때 츠다야코의 언니 게이샤였고, 지금은 미즈노라는 음식점을 운영 중인 오하마(쿠리시마 스미코)는 츠다야코에게 “난 오토요처럼 자매인 너에게 돈 빌려주고 이자 받는 짓은 안 해”라고 말하며 제안한다. 츠다야코가 자신에게 게이샤 집을 팔고 대금을 받으면, 우선 그 돈으로 츠다야코는 오토요에게 진 빚을 갚고, 그다음 자신이 츠다야코에게 츠다야코가 판 집을 빌려 줄 터이니 츠타노야를 계속 운영하면 어떻겠냐고 말이다. 츠다야코는 영화 끝에서 결국은 돈의 반복이 두려웠던 모양인지 이 제안을 수용한다.

 그리고 이 제안을 수용하자 영화는 큰 변화를 겪는다. 드디어 후지코가 깨어난다. 돈의 반복에서 벗어나자 삶의 반복도 깨진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결코 좋은 변화가 아니다. 이후 오하마는 본색을 드러내어, 츠타노야에서 게이샤들을 쫓아내고 그 집을 미즈노 지점으로 바꾸려 함을 리카에게 밝힌다. 돈의 반복에서 벗어난 게이샤들은 더 이상 삶을 반복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결말을 통해 비로소 분명 해지는 게 있다. 반복한다는 것은 삶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돈의 반복 속에서 삶을 반복하던 게이샤이들이 이를 보여준다. 반복에 내일이, 미래가 있다. 따라서 반복에서 벗어나면 삶은 끝난다. 이런 점에서 왜 우리는 츠다야코가 돈의 반복에서 벗어나 자주적으로 살아보려 하지 않고 남성에게 기속되려 안간힘을 썼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돈의 반복에 서서히 짓눌려 죽거나, 반복에서 벗어나 삶을 포기하거나, 남성에게 기속되어 지옥을 살거나의 세 갈래 길에 놓여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남성의 반복에 기속되는 길은 그나마 가장 나은 길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야마는 오지 않아서 미래였지만, 오지 않은 그가 왔다면 츠다야코와 츠타노야의 삶에 미래가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정말로 여자의 미래였다. 반복에 미래가 있다. 미래는 오지 않기에 반복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어쩔 수 없이 남성의 반복에 기속된 것 같아 보였던 <밥>과 <긴자화장>의 여인들을 이제는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이 기존의 삶에서 변화를 포기하고 기존의 삶으로 복귀한 것은 불가항력이지만, 동시에 그녀들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삶을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그녀들이 마지막에 던진 대사가 체념조를 띠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 츠다야코는 애당초 이 사실을 알고 처음부터 하나야마라는 남성에게 매달렸던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흐르다>의 끝에서, 진즉에 남편과 아들을 잃은 리카, 남성이 없다는 게 뭔지 알고 있던 리카는 츠타노야의 삶이 사라질 것임을 알자 떠나기로 결심한다.     


6. <방랑기>: 남성혐오

   반복·지옥과 남성·미래. 여인들을 옭는 게 뭔지 분명해지자 저항은 무의미해 보인다. 하지만 이 절망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방랑기>(1962)의 후미코(타카미네 히데코)는 끝까지 사투를 벌인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마지막으로 이 여인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화 도입부 후미코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등장했으며,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그녀는 순식간에 성인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영화 끝에 가서는 또 순식간에 중년의 모습으로 등장해 관객을 놀라게 한다. 이처럼 <방랑기>는 과거-현재-미래를 불연속적으로 잇는다. 하지만 불연속 속에서도 연속되는 것이 있다. 미래를 제외하곤, 예나 지금이나 <방랑기>에는 돈이 없다. 즉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가난하다.

 돈이 없는 세상에서 후미코는 무얼 해야 할까? 선례에 따른다면 결혼과 돈 빌리기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나루세 미키오의 여인으로서 그녀는 두 선택지를 거부하고 자주의 길로 나아가 보려 한다. 그녀가 택한 자주의 수단은 글쓰기다. 즉 그녀는 문필가로서의 대성을 꿈꾸는 것 같다. 그렇다면 <방랑기>는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와 같은 영화일까? 그렇지는 않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케이코가 꿋꿋하게 남성과 돈을 거부하며 자신의 목적을 추구했다면, <방랑기>의 후미코는 유연하게 남성과 돈을 이용하며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살펴보자. 후미코는 당장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근처에 사는 인쇄공 사다오카(카토 다이스케)에게 몇 번 돈을 빌린다. 후미코를 좋아하는 사다오카는 후미코에게 빌려준 돈은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그 돈이 후미코 씨에게 있는 동안은 둘 사이의 인연이 계속될 것 같”다고 한다. 확실히 그는 빌려준 돈 덕분에 그녀와 반복해서 만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남성이 돈을 가진 경우 그 돈은 남성이 여성을 반복으로 끌어당기는 매개 역할을 한다.

 하지만 후미코는 사다오카에게 넘어가지 않고, 나아가 사다오카의 말대로 정말로 돈을 안 갚는다. 사다오카의 호의를 이용하는 그녀는 남성의 반복뿐만 아니라 돈의 반복도 가지고 노는 것이다. 하물며 같은 술집에서 일하는 동생의 어머니가 동생에게 돈 좀 달라고 붙잡고 늘어지자, 통 크게 대신해서 돈을 주며 동생에게는 갚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그녀는 채권자 행세도 거부한다. 따라서 영화 중반 후미코의 “돈은 돌고 도는 것이라는데, 왜 나에겐 안 올까?”라는 한탄 섞인 물음의 답은 바로 후미코 스스로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안 그래도 돈이 없는 <방랑기>에서 주인공이 돈의 반복을 기만하고 있으니 돈이 돌지 않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녀가 문단에 등단하기 전까지 같이 살던 남성 후쿠야(타카라다 아카라)와 그녀의 관계를 보자. 혹자는 둘의 사실혼 관계를 보며 이미 여인이 남성과 맺어졌는데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있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하지만 둘 사이는 지금까지의 남녀 관계와 다르다. 먼저 둘 다 가난해서 정상적인 결혼 생활이 불가능하고, 무엇보다 후미코는 후쿠야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숏의 연결이 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온전치 못한 후쿠야는 언제나처럼 후미코를 향해 모진 말을 내뱉는다. 이때 카메라는 후쿠야를 전경에, 후미코를 후경 방구석에 배치한 투 숏으로 잡아 후미코가 후쿠야에게 수세적으로만 대응하는 모습을 찍는다. 후미코는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와 자겠다는 후쿠야의 폭언을 듣지만 그럼에도 곁에 있겠다는 모양이다. 그리고 후쿠야는 후미코의 그런 반응이 신기한지 “너 그렇게 내가 좋아?”라고 묻는다. 그러자 영화는 잠시간 투 숏을 유지하다가 갑자기 후미코의 싱글 숏을 뒤이으며, 싱글 숏을 통해 전경에 돌출된 후미코는 방금 전까지의 수세적 태도는 어디 갔는지 격양된 채 “싫어!”라 울부짖는다. 

 관객은 이를 보고 깜짝 놀란다. 급격한 숏과 감정의 전환은 남성에 대한 사랑이 후미코의 역린임을 보여준다. 그녀는 <밥>, <긴자화장>, <흐트러지다>의 여인들이 사랑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그녀가 영화 초반에 “사다오카 씨 싫어, 아버지도 싫어, 남자는 전부 다 싫어.”라고까지 말했던 여성임을 상기해야 한다. 그녀는 자포자기한 채 후쿠야와의 지옥 같은 삶을 사는 게 아니다. 그녀에게 이 생활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그녀는 지옥 속에서 글을 쓰며 기회를 노린다.

 하지만 후미코의 삶이 너무나 고되고, 냉정하게 보았을 때 문필가로서 성공하기란 힘든 것이기에, 우리는 그녀에게서 밝은 미래를 보지 못한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녀가 자전적 소설 『방랑기』로 등단한 후, 그녀는 단 한 컷 만에 엄청난 성공을 한 채 관객 앞에 나타난다. 어마어마한 집에 살고 있는 후미코는 이제 중년이 되었다.

 차라리 꿈이라고 하는 게 더 그럴듯한 성공. 그도 그럴 것이, 그 어렵다던 문필가로서의 성공을 이룩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녀가 이룩한 것은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케이코가 꿈꿨던 남자와 돈의 반복에서 벗어난 삶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반복·지옥과의 사투에서 승리한 여인을 보게 된 관객. 그런데 승리의 기쁨도 잠시, <방랑기>의 비극이 시작된다. 이제는 인쇄공장 사장이 된 사다오카와 찬구로서 소회를 나눈 후미코는 며칠간 잠을 못 잤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를 보낸 뒤, 그녀는 신음하며 책상에 엎드린다. 고통스러운 얼굴로 눈을 감은 후미코. 영화는 그녀의 얼굴 위로 영화 초반 이후 다시는 볼 일이 없었던 그녀의 어린 시절을 포갠다. 우리는 그렇게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어린 시절 후미코가 먼 곳을 응시하는 것을 본다. <방랑기>는 수미상관을 통해 모두 다 꿈이었다는 일장춘몽의 형식을 만든다.

 과거-현재-미래-과거로 직조된 영화. 우리는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와 같이 여인이 남자와 돈 중 어떤 것에도 기속되지 않자 영화가 스스로를 리셋한 것을 본다. 심지어 <방랑기>의 결말은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결말보다 잔혹하다고 볼 수 있다. <방랑기>는 여성이 남성·미래 없이 스스로 성취한 미래를 과거로 변질시켜 무마한다. 그리고 일장춘몽의 형식을 통해 영화 전반의 내용을 꿈으로 만들어버려 성인의 후미코가 성공을 위해 했던 생고생을 헛고생으로 만든다. 꿈같던 미래는 정말 꿈이 돼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지옥에서 멀어져 잠시나마 누렸던 성취한 것들, 자주적 삶과 미래를 수미상관으로 잃은 후미코는 고통 속에서 눈을 감는다.
 
    우리는 지옥에 기속된 여인들, 지옥의 경계에 선 여인들, 지옥에서 벗어난 여인들을 순서대로 보았다. 그 결과 나루세 미키오의 여인들이 처한 하나의 역설을 발견했다. 반복에 기속되면 지옥 같지만, 그렇다고 반복에서 벗어나면 살 수 없다. 왜냐하면 반복에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인들은 자주적으로 살기를 체념하고 지옥에 기속되거나, 아니면 그럼에도 지옥에서 벗어나 삶을 끝냈다.
  그렇다면 결국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은 이 역설에 묶여 비참한 여인들을 보여주는 데에 족한 영화들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언급한 여섯 편의 영화에서 네 편이 그런 영화니.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비로소 여기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었던 지옥의 경계에 선 여인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케이코와 <흐트러지다>의 레이코를 다시 볼 여지가 생긴다. 그녀들은 이 역설로 비참에 빠지지 않은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한 명씩 다시 보자. 케이코는 다시 닥쳐올 두 지옥들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당차게 바로 출근한다. 레이코는 남성의 자살로 지옥에서 벗어났고, 영화가 그녀에게서 미래를 뺏으려는 듯이 거칠게 종(終)을 띄웠지만 그럼에도 버티고 서 있다. 케이코는 포기하고 기속되지 않는다. 레이코는 휘모는 감정 속에 스스로 삶을 끝낸 남성을 따르지 않는다. 케이코는 당당하게 맞서고, 레이코는 숨을 가다듬으며 정신을 바짝 차린다.
  그녀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지옥에 굴복하거나 지옥에서 도망칠 수 없다면 해야 하는 것은 지옥 속 절망이나 지옥 밖으로의 투신이 아니라 경계에서의 맞서기나 버티기라고. 남성에게 기속 당하기나 삶을 끝내기가 아니라, 맞서기나 버티기가 진정으로 지옥을, 남성이 미래인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행위라고. 이 말이 맞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케이코의 미소 속 굳셈, 레이코의 응시 속 냉정일 것이다.




<흐트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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