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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와 누 May 31. 2020

<위대한 환상>을 다시 보며

(2020년 05월 17일-05월 31일)

   사람들은 르누아르의 영화가 평등을 이야기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1년 전에 르누아르의 <위대한 환상>(1937)을 처음 보았을 때 난 이 영화가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였다. 그도 그럴게, 여기서 귀족 출신들은 평범한 사람들보다 멋지게 나온다. 그들은 명예와 자기희생을 알고,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애석함을 가지며, 고결하게 행동한다. 그에 반해 평민과 은행가 인물들은 구차하다. <위대한 환상>의 인물들은 분리되어 있으며 결코 섞이거나 한데 어울릴 수 없을 것 같다. 마레샬(장 가뱅) 중위는 귀족 출신 장교 볼디외(피에르 프레스네)가 포로생활 중에도 격식을 차리는 것을 보고 대단하다 여기지 않는가.

 말해놓고 보니 부끄러운 이유이다. 어쨌든 그 뒤로 <위대한 환상>을 다시 보지 않았기에 감상평 또한 달라지지 않았지만, 최근에 읽고 있는 책에 재미있는 구절이 있었고 그 구절에서 시작한 단상은 이 영화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대열차강도>(애드윈 포터, 1903)의 각 관객이 하는 게임 안에서 (강도의) 권총이 그(관객)를 향해 있다는 것은 허구적이지만, 권총이 동시에 모든 관객을 향해 있다는 것은 어느 게임에서도 허구적이지 않다. 이 점은 영화와 연극의 한 가지 중요한 차이를 강조한다. 그것은 무대 위의 배우는 각각의 관객에게 동시에 총을 겨누거나 눈을 맞출 수 없지만, 영화 속의 배우는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켄달 L. 월튼, 『미메시스 믿는 체하기로서의 예술』, 양민정 옮김, 북코리아, 2019, p.335, 괄호 안은 필자가 적은 것

 영화는 연극에 비해 개별적으로 다가온다. 난 지금 위 인용문에서 배우의 능력이라 여겼던 것을 영화 자체의 능력으로 확장시켜서 말하고 있다. 영화는 관객들을 일일이, 동시에 지적하며 일대일 관계를 형성한다. 관객들은 옆에 사람이 앉아있어도 사적인 인간이 된다.

 그에 반해 연극배우들은 관객들을 일일이 대하지 않고 하나의 군중으로 대하기에, 연극의 관객들은 집단적 성격이 강하다. 관객 개개인의 분리는 허용되지 않고 무대 위와 무대 아래의 분리만이 유일한 분리이다. 따라서 이러한 영화와 연극의 차이를 두 문장으로 정식화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연극은 내 옆에 앉은 그들 역시 시민인 내 이웃의 앞에 함께 그 모습을 드러내는 형식이다. 연극과는 다르게 영화는 일종의 은밀함을 허용한다.

세르쥬 다네,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 정락길 옮김, 이모션 북스, 2012, p.160


   그리고 켄달 월튼의 글을 읽자 4년 전에 읽었던 다음 구절도 떠올랐다.     

 할아버지나 죽은 아버지는 극장에 가면 으레 3층 전면의 지정석을 제자리로 삼았는데, 이러한 극장에서의 사회 계급의 구별은 그들에게 격식을 좋아하는 버릇을 길러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을 때는 그들을 전례에 따라 분리해 놓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서로 살육을 서슴지 않을 것이다. 한데 영화관은 그 반대 현상을 보여 주었다. 마구 뒤섞인 관중은 잔치 때문이라기보다 차라리 어떤 재앙이 일어나서 모인 듯한 느낌이었다. 예절이 죽어 버리면 마침내 인간들의 참된 연줄이 생기는데 그것은 곧 점착(粘着)이다. 나는 격식이 싫었고 군중을 좋아했다. 나는 온갖 종류의 군중을 보았다. 그러나 저마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꼼짝없이 느끼는 나신(裸身)의 모습을, 한 인간으로 버티는 위험에 대한 백일몽과 은연한 의식을 1940년에 제12포로수용소 D캠프에서만큼 절실하게 체험한 일은 일찍이 없었다.

장 폴 사르트르, 『말』, 정명환 옮김, 민음사, 2008, p.132-133     

   영화관은 연극극장처럼 층 별로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공간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관에서 사람들은 뒤섞여서 모여있다. 여기서 독특한 역설이 발생한다. 영화의 관객들은 앞서 말했듯이 개인적으로 분리된 자들이지만 사르트르의 말에 따르면 "점착"된 무리이기도 하다. 이 분리된 상태에서 뭉친 사람들의 모습은 참으로 이상하다. 무엇이 그들을 공동으로 묶어줄 어떤 것, 예컨대 "사회 계급의 구별"을 가지지 못한 채 극장에 모여들게 만든 것일까. 혹여나 사르트르의 말처럼 어떤 "재앙"이 있었던 것일까.


   난 이 재앙을 개별성의 재앙이라 하겠다.

 영화는 우리에게 행복을 약속한다. 그 이유는 참으로 (영화 속에서는) 우리가 부자가 된다거나 아름다워진다거나 말하고 싶은 것을 맘대로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개별성, 분리성, 비표현성이란 것들을 견딜 수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현실을 사적으로 보도록 운명 지어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산업사회의 도래에 즈음해서 인류의 세계로부터의 소외를 말한 것은 19세기 초반과 중반의 몇몇 난해한 철학자들만은 아니었다. 또 19세기 말에 유럽의 한 미친 문헌학자가 신의 죽음을 알린 것은 단순히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말한 것만은 (거의 자기 자신에게 말한 것이긴 했지만) 아니었다 - 그것에 의해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세계 전체에 대해서 그리고 자연과 사회와 우리 자신에 대해 위치하는 관계를 변경했다는 것을 기록하려고 했던 것이다. 영화의 신화라는 건 우리가 자연을 학대하는 것이 끝나고 우리에게 매력을 잃고 나서도 여전히 자연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공동체는 사회의 권위가 우리에 대해 부정된 때에도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영화는 본래적으로 무정부주의적이기 때문이다.……

스탠리 카벨, 『눈에 비치는 세계』, 이두희/박찬희 옮김, 이모션 북스, 2014, p.315

  영화는 개별성의 재앙을 견딜 수 없는 이들을 위로한다. 그런데 이 위로는 우리에게 '남들과 같은 세상 속에 살고 있다'와 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며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난 켄달 월튼의 글을 인용하며 영화가 사람을 개별적으로 만든다고 했다. 그리고 스탠리 카벨은 영화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사적으로 보도록 운명 지어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즉 개별성을 견딜 수 없는 이들은 집단성의 회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사적으로 만드는 영화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보장 받음으로써 개별성의 재앙을 극복한다.


   개별성을 죽이지 않고 모인 영화 관객들은 "무정부주의적"인 영화를 보며 집단의 규범을 이루지 못한 자신들의 상태에 안정감을 느낀다. 사르트르는 "격식"이나 "예절" 따위와는 거리가 먼 이 무정부주의적인 사람들을 수용한 영화관을 자신이 경험한 포로수용소로 이었다. 난 여기에 <위대한 환상>의 포로수용소를 덧붙이고 싶다. 수감된 인간들은 결코 뒤섞이지 않는다. 귀족은 살면서 배운 게 고결하게 행동하는 것 밖에 없으니 고결하게 행동하고, 평민도 제 나름 살면서 배운 대로 행동하며, 은행가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어쩌다 다 같은 수용소에 모였을 뿐이며 수용소 내의 인간들을 묶어줄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관이라는 수용소와 저들의 수용소는 그렇게 겹쳐진다.

   르누아르는 “인간은 수직적으로보다 수평적으로 더 나뉘어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비단 인간이 평등하다고 한 게 아니라 평등한 상태에서 “나뉘어 있다”라고, 다 같은 인간이라 평등한 게 아니라 다 다른 인간이라 평등하다고 했으며 어쩌면 영화와 영화관은 이 생각을 실현하기 위한 최적의 매체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단상을 끝낸 후 다시 한번 <위대한 환상>을 보았다. 포로수용소의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서 밖을 관찰하는 수감자들의 숏이 있었다. 그 숏들에서 얼굴들은 드러나 있었으며, 그 얼굴들은 같은 장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이 숏의 평평함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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