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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와 누 Oct 30. 2020

두 개의 애드 아스트라

<애드 아스트라>를 보고. 2020년 03월 씀

못을 넘어, 골짜기를 넘어,
산을, 숲을, 구름을, 바다를 넘어,
태양을 지나, 에테르를 지나,
별 박힌 천구(天球)의 경계를 지나……
-「상승」     
……
지옥이건 천국이건 무슨 상관이냐? 저 심연의 밑바닥에,
저 미지의 밑바닥에 우리는 잠기고 싶다, 새로운 것을
찾아서!
-「여행」
 『악의 꽃』, 샤를 보들레르, 황현산 옮김, 민음사, 2016


   <애드 아스트라>(2019) 전에 제임스 그레이가 만든 <잃어버린 도시 Z>(2016, 이하 <Z>)는 보들레르의 시와 맞닿아 있다.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남미로 떠나 Z를 찾은 퍼시 포셋(찰리 허냄)은 「상승」의 시구처럼 한계들을 넘어서며, 「여행」이 긍정했던 스스로를 불사르는 모험가가 된다. 진정한 발견은 발전한 기술에 힘입어 지리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곳을 가보는 모험가의 것이 아니라 “미지의 밑바닥에” 투신할 줄 아는 모험가의 것이다.

 그리고 <애드 아스트라>에서도 ‘한계를 넘어서려는 모험’이라는 주제가 유지된다. 로이 맥브라이드(브래드 피트)의 아버지이자 지적 생명체를 찾아 해왕성으로 떠난 클리포드(토미 리 존스)는 지구에 있는 모두가 죽은 줄 알았지만 해왕성 궤도에서 30년 동안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으며, 이제 서지라는 현상을 일으켜 인류를 멸망시키려 한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를 말리러 해왕성으로, 태양계의 한계로 모험을 떠난다.

     

   그런데 한계를 향하는 것은 이러한 서사만이 아니다. 인물과 카메라 또한 나름의 한계로 나아가며, 셋의 한계를 향하는 움직임은 기묘하게 동기화되어 있다. 인물을 먼저 보자. 로이는 자신이 우주여행에 적합한 상태임을 증명하기 위한 심리 검사와, 그의 생각을 관객에게 직접 전달하는 내레이션으로 끊임없이 혼잣말을 한다. 이러한 혼잣말이 평범하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난 여기서 후자―내레이션이 영화예술의 한계를 건드린다고 말하고 싶다. 서사와 무관하거나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제삼자가 내레이션 하는 것도, 등장인물이 영화 감상에 필요한 정보를 내레이션 하는 것도 아닌, 단순히 카메라에 잡힌 이가 그 순간 머릿속에 드는 생각을 곧장 내레이션으로 내뱉어버리는 것은 용례를 찾아보기 힘들며(굳이 따지자면 <피아니스트를 쏴라>(프랑소와 트뤼포, 1960)의 주인공도 이런 이상한 혼잣말―내레이션을 영화 내내 한다.), 이 내레이션을 인용할 때 큰따옴표를 써야 할지 작은따옴표를 써야 할지 애매하다. 보일 리 없는 인물의 내면을 적어내는 것에 능통한 문학이라면 몰라, 어쩔 수 없이 보이는 것에 집중하는 영화에서 내면을 직접 드러내는 시도는 영화와 본질적으로 맞지 않다.

     

   카메라는 중력을 이겨내려 함으로써 한계를 향한다. 영화에서 중력에 따라 낙하하거나 중력을 거슬러 상승하는 물체, 즉 수직 운동하는 물체들은 카메라의 한계를 드러냈다. 카메라는 이런 물체들을 보며 기껏해야 여러 숏으로 해당 물체를 나눠 찍는 방법 외에는 별다른 수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물론 여타 영화의 카메라는 이런 한계를 이겨내려 갖은 술수를 쓰며, <애드 아스트라>도 마찬가지다. 영화 도입부에서 로이가 우주 안테나를 수리하다 서지에 의해 지구로 추락하는 신을 생각해보자. 이 신은 로이와 똑같은 속도로 낙하하며 원경에서 로이를 촬영하는 숏과 로이의 시점 숏, 로이의 얼굴을 담은 숏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카메라는 낙하하는 신체에 가해지는 중력을 숏의 분할로 견디는 게 아니라 CG를 통한 스펙터클의 논리, 얼굴 클로즈업과 일인칭 시점 숏을 통한 심리의 논리를 사용해 능숙하게 다루어보려 한다.

 지구, 달, 화성에서 출발하는 우주선은 수직운동의 다른 예인 상승을 보여준다. 여기서 카메라는 우주선을 엄청나게 먼 거리에서 촬영하거나, 로켓으로 하여금 수직이 아닌 사선으로 렌즈 앞을 가로지르도록 한다. 수직운동은 원근감으로 희석되거나 카메라가 움직이는 물체를 촬영하는 데에 익숙한 횡축운동으로 변형된다.

     

   따라서 인물의 내면을 파고듦과 동시에 현란한 카메라를 과시한 <그래비티>(알폰소 쿠아론, 2014)의 경우와 유사하게, 우주라는 공간, 고독한 공간이자 중력에서 벗어난 무중력의 공간은 한계를 이겨내려는 서사, 인물, 카메라에게 적당한 공간이다. 예컨대 화성으로 향하던 중 주인공 일행이 만난 조난선에서 카메라는 우주선 방을 수색하는 로이와 동료를 어지럽게 촬영한다. 무중력 속에선 지구에서 방을 수색한다면 볼 수 없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펼쳐지는 것이다. 여기서 카메라는 지금까지 우주로 나간 모든 카메라들이 그랬듯이 해방감을 만끽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애드 아스트라>는 단순히 한계를 넘어서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데 그치는 걸까? 물론 그렇지 않다. 우린 조난선에서 뜬금없이 등장한 사람을 습격하는 원숭이를 생각해야 한다. 이 원숭이와 <Z>의 퍼시 일행을 습격한 원주민들은 유사하다. 둘은 조난선을 발견한 주인공 무리를 습격한다. 하지만 원주민은 기적적으로 적대를 그만두는 데에 반해 원숭이는 적대를 멈추지 않다가 결국 주인공 로이에게 살해당한다.

  둘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우연의 일치라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난 원숭이가 등장하는 신이 원주민이 등장하는 신의 비판적 패러디이며 두 신의 차이로 인해 <Z>와 <애드 아스트라>, 관객으로 하여금 한 남자의 내면으로 침잠하게 만드는 두 영화는 다른 길을 가게 된다고 주장해보려 한다. 다시 원주민을 보자. 적대를 그만둔 원주민들은 Z에 대해 묻는 퍼시에게 Z 같은 건 소문으로 들었다고 말하는 상식인(?)들이지만, 이미 Z에 눈이 먼 퍼시는 그 말을 듣고도 더 깊은 정글로 나아간다. 그는 남의 의견을 듣는 척만 하지 실제론 자기 의지만 내세운다. 주인공의 압도적인 자아는 타자를 제 입맛에 맞게 재단하며 <Z>를 주인공의 내면의 여정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애드 아스트라>는 로이로 하여금 그런 행위를 하지 못하게 말이 안 통하는 원숭이를 배치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부의 존재는 주인공의 의지대로 될 리 만무하며 로이가 내면에 침잠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따라서 로이는 어쩔 수 없이 원숭이를 죽여버리고, 조난선에서 살아 돌아와 내레이션이 아니라 심리검사를 행한다. 그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내면으로의 침잠은 가로막혔다.

     

   실제로 우리는 <애드 아스트라>가 태양계 밖으로 나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해왕성에 갔다가 다시 지구로 돌아오는 이야기임을 안다. 클리포드가 “One way voyage, son.”이라 말하며 아들을 부추겨도, 이 영화는 한계를 넘어서는 이야기가 아니라 차라리 한계에서 아슬아슬한 유희를 벌이다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한계인 해왕성 궤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이제 유일하게 한계를 넘어서려는 행위를 막는 것은 자신을 보내달라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붙잡으려는 아들 사이의 줄에서 나타나는 인력(引力)이다. 그리고 카메라는 엄청난 원경에서 인물들을 잡거나 태양계 바깥으로 한 점이 되어 멀어지는 클리포드를 길게 잡는 등, <그래비티>에서 보았던 것 같은 과장되고 어지러운 이미지를 흉내 낸다. 마지막으로 클리포드를 떠나보낸 로이는 화성의 녹음실보다 더 완벽한 적막 속에서 ‘Why go on? Why keep trying?’이라 내레이션 한다. 태양계의 한계에서 서사, 카메라, 인물은 그에 걸맞은 절정에 치달으며 화면은 암흑에 잠긴다.

 그렇다면 이제 한계 내로, 지구로 돌아갈 시간이다. 어두워진 화면에 로이의 우주선 세피우스 호의 빛이 잡힌다. 이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 나온다. 로이는 얼마 남지 않은 세피우스 호를 향해 추진기의 힘을 빌어 돌진한다. 이때 카메라는 로이를 화면 모서리에 고정하고, 로이가 세피우스 호에 다가간다기보다 배경으로서의 세피우스 호가 로이를 덮치는 것처럼 촬영한다. 달리-줌 효과를 모방한 듯한 이 촬영 방식을 우리는 영화 초반 달을 향해 낙하하던 우주선을 촬영한 숏에서도 보았다. 그렇게 세피우스 호에 충돌한 로이는 세피우스 호에서 굴러 떨어지다 간신히 함선 끝에 매달린다.

 낙하와 매달림. 중력과 연관된 두 행위를 보고 인물과 카메라가 서사보다 먼저 한계 내로 돌아왔다고 말해도 될까. 이 장면은 근사하다. 이 장면의 근사함엔 거만하게 카메라로 우주를 휘저으며 한계를 이겨낸 듯이 굴다가 끝에 가선 더 이상 어쩌지 못해 서사의 힘을 빌려 한계 내로 돌아오는 길을 택한, “시각적으로는 우주를 복권시킨 다음, 서사에선 우주를 제거하고 지구를 복권시킨”(「무중력의 카메라, 외설적 카메라」, 『보이지 않는 영화』, 허문영, 강, 2014, p.220) <그래비티>의 치사함이 비길 수 없다. 심지어 <그래비티>의 주인공이 온갖 괴성을 지르며 지구로의 추락을 대단한 것인 양 포장한 것과 달리 로이는 지구로 추락할 때 얌전히 자다가 깨지 않는가. 그는 이미 돌아와 있던 것이다.

     

   어쨌든 서사, 인물, 카메라는 지구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드 아스트라>가 한계에 복속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영화로 보이진 않는다. 영화 끝에서 로이가 행한 것이 심리검사이고, 심리검사를 이룬 말들이 어떤 깨달음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로이는 체념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영화 내내 로이의 심리검사에 “승인”이라 말해주던 기계 소리는 이 마지막 심리검사에선 들리지 않고 영화는 끝나버린다.

 사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개인적인 이유는 해왕성에서 태양계 바깥으로 멀어지는 클리포드, 기어코 한계를 넘은 그를 담은 숏이 마찬가지로 태양계의 한계를 넘은 보이저호의 움직임을 상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탐사선엔 보들레르의 「상승」이 기록된 황금 레코드가 들어 있다.

 그렇다면 <애드 아스트라>는 오래전부터 인간이 한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두 태도, 한계를 넘어서려는 태도와 한계에 복속하는 태도 사이에서 어떤 것도 긍정하지 못한 채 판단을 유보한 영화라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세피우스 호와 보이저 호, 해왕성을 기점으로 갈라진 두 개의 애드 아스트라(별을 향해서) 사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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