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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탐색자 Nov 28. 2020

2018년, 집은 '사는 거'라는 깨달음

2013년 그녀는 서초동의 신혼집을 떠나야 했다. 입주를 하기 전 수리를 했어도 낡은 아파트는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했다. 그럴 때마다 집주인에게 일일이 연락을 하는 것도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었다. 더구나, 2013년 재건축 사업 승인이 나자 집주인은 더 이상 개보수를 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노란 꽃무늬 벽지로 포인트를 주었던 거실벽에 물이 새기 시작했다. 거실의 꽃무늬는 더 이상 노란빛이 아니었다. 얼룩덜룩한 빛으로 바래져 시든 꽃이 되어버렸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 붙여놓은 '축 재건축 승인' 현수막을 볼 때마다 씁쓸했지만, 사람들이 새 아파트에 열광하는 이유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낡은 아파트에 산다는 건 어쩌면 그녀가 해외에서 경험한 것 같은, 삶의 추억이 묻어나는 공간에 거주하는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초동의 낡고 작은 아파트는 더 이상 '우리만의 따뜻한 공간'이 아니라 '벗어나고 싶은 공간'이 되어 버렸다.  


서초동을 떠나기로 결정한 이후, 그녀는 계동을 기웃거리며 한옥집을 알아봤지만, 역시 거주를 하기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움이 있었다. 서초동의 아파트에서 누리던 편리한 생활 인프라 - 교통, 쇼핑, 문화, 그리고 교육 등-을 포기하기가 어려웠다. 이제 막 강남에 대한 애정이 싹트기 시작한, 강북 남자였던 그녀의 남편이 오히려 강남을 굳세게 고집했다. 그녀 역시 친정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아파트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어릴 적부터 친척이 살아 자주 놀러 갔던 빌라가 많은 동네로 이사를 했다. 친정집에서도 가까웠고, 강남에서 드물게 아파트가 거의 없었다.


동네 곳곳에는 서초동 아파트 단지 안의 보물창고였던 상가 안에 수직적으로 배치되어 있던 가게들 - 수입상점, 반찬가게, 약국, 헤어드레서 등이 수평적으로  흩어져 있었다. 물론 친정어머니는 지금이라도 아파트를 장만하라고 못마땅해하셨지만, 동네 이곳저곳을 구경 다니는 재미가 쏠쏠했다. 집에서 5분 거리에 국립도서관과 잘 가꾸어진 공원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친척이 이 동네에 살아 자주 와보았던 그녀는 변하지 않는 동네 모습이 좋았다. 물론 지금은 그때 보던 단독주택들이 많이 없어지고 빌라나 다세대 주택들이 들어서기는 했지만, 아파트 단지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동네 골목길이 주는 아늑함 같은 것이 있었다.


빌라로 이사를 온 후, 그녀는 강아지 한 마리를 유기견 보호 센터에서 입양했다. 어린 시절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서 이별을 해야 했던 흰둥이를 기억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동네 이웃집에 맡기고 작별인사를 하던 날 그녀를 보던 그 초롱초롱한 까만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었다. 다크 쵸코렛 색의 코커 스페니얼을 입양했다. 이름도 지어 주었다 - Ziggy(지기)라고 - 꼬블꼬블 엉킨 털이 마치 자메이칸 출신의 음악가이자 자선가인 'Ziggy Marley'를 떠오르게 했다. 처음엔 낯설어하던 지기도 그녀에게 마음을 열어주었다. 그루밍 grooming을 하고 나니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그녀를 보고 반가워 꼬리를 치는 지기가 그녀의 눈엔 세상에서 제일 예뻐 보였다.  


그녀의 고등학교 동창인 정원이를 만난 그날도 지기와 국립도서관으로 산책을 나갔다. 주말 아침은 조금 더 여유 있게 지기와 산책을 하며 보냈다. 덕분에 새로 이사 온 동네를 구석구석까지 알게 되었다. 정원이도 카멜 색의 푸들을 키우고 있었다. 처음엔 너무 변해버린 정원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녀가 기억하는 정원이는 숏커트 헤어스타일의 다소 보이쉬한 이미지였다. 20여 년이 지난 여름에 다시 만난 정원이는 허리까지 찰랑거리는 긴 머리에 우아하게 롱드레스를 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강아지와 함께 사뿐 사뿐 걸어오고 있었다. 강아지들끼리 인사를 나누는 동안 대화가 시작되었다. 신기하게도 정원이는 그녀를 금세 알아보았다. 얼굴을 다 가리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놀라는 그녀를 보고 정원이는 낄낄 웃으며, 니 말투가 어디 가냐고 되물었다.


정원이는 어린 시절을 미국에서 보냈다. 박사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떠나신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미국에서 생활을 하다가 아버지께서 한국에 있는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시면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귀국 후, 아버지 학교 근처인 관악구 신림동에서 초등학교를 보내다가 조용한 전원생활을 원하셨던 정원이 어머니는 과천의 주공아파트로 이사를 하셨다. 정원이는 어머니가 그때 개포동 주공아파트로 이사를 할 수도 있었는데,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자식들의 미래를 망쳤다고 했다. 그때 학군이 좋은 강남의 개포동으로 이사를 했으면 자신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겠냐고 어머니를 원망했다.


당시 공공기관에서 근무를 하셨던 분들에게는 대한 주택공사에서 개포동과 과천에 개발을 하고 있던 대규모 단지의 새 아파트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녀의 친정어머니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친정아버지가 한사코 과천을 고집하는 바람에 개포동으로 이사를 못 가고 과천으로 갔노라고 이야기를 하셨었다. 정원이는 그녀의 친정어머니와 닮은 점이 많은 듯했다. 그녀의 어머니도 은근히 경기도 과천으로 이사를 고집한 아버지에 대해서 원망섞인 어조로 말씀을 하시곤 하셨다.


정원이는 남편의 직장을 따라 8년 정도 홍콩과 중국에서 생활을 하고 1년 전에 귀국했다고 했다. 부동산 투자에 관심이 많았던 정원이는 결혼 전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미 갭 투자를 해서 내방역 근처에 방 3개짜리 아파트를 장만했다. 2004년에 구입할 당시 아파트 가격 대비 2019년 현재 약 3배 정도 올랐다고 했다. 자신이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모은 돈 1억 원과 부모님께 빌린 1억 원으로 전세를 끼고 아파트를 매입했다. 좀 의외였던 건, 정원이 부모님의 반응이었다. 아버지는 정원이의 과감한 투자를 흐믓해하신 반면, 어머니는 그렇게 큰 빚을 언제 갚냐며 혀를 끌끌차시며 오히려 걱정만 하셨다고 했다. 첫째딸의 부모님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중국에 있는 동안에도 정원이는 부동산 투자를 위해 여러 차례 홍콩과 중국을 부지런히 오갔다. 중국에서 저렴한 주택을 장만하여 리노베이션을 해서 살다가 귀국 전 좋은 가격에 되팔아 쏠쏠한 이익을 남겼노라고 했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 마케팅 관련한 일을 했던 정원이는 결혼을 하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홍콩에서 MBA를 공부한 후, 명품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는 아파트보다 상가주택을 주로 보러 다니고 있다. 낡은 단층 주택을 매입해서 새롭게 증축을 하면 한 건물에서 쇼핑몰의 오프라인 샾, 사무실, 그리고 거주와 임대수익을 동시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첫째딸은 그저 입만 벌리고 '아, 정말 부지런해야 부동산 투자도 하는 거구나' 생각하며 정원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정원이가 집의 자산적 가치에 눈을 뜬 건, 30대 초반이라고 했다. 대학 때부터 집에서 독립을 하는 것이 목표였던 정원이는 직장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오피스텔을 보러 다녔다고 했다. 무엇보다 경기도 과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했다. 남들은 과천을 최고의 전원도시 운운했지만, 정원이는 어떻게 해서든 서울로 이사를 나오고 싶었다. 직장이 서대문 근처라 부모님댁에서 멀지 않은 방배동이나 반포동 쪽을 계속 알아보며, 월급을 꼬박꼬박 모았다고 했다. 직장 내 다른 여성 동료들은 옷이나 핸드백, 구두 등에 돈을 썼지만, 자신은 오로지 '집'에 대한 생각뿐이었다고. 1990년대 말 - 2000년대 초에는 레지던스 투자가 인기였는데, 자신도 아파트를 장만하기 전 단계로, 레지던스나 오피스텔을 주로 보러 다녔다고 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사무실 근처 레지던스 분양광고를 보고 모델하우스를 찾아가 그날로 레지던스 2채를 계약했다고 했다. 계약금은 각각 1,000만 원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충분히 계약금을 지불할 수 있었다고 했다. 다행히 투자했던 레지던스의 가치가 상승해서 좋은 가격에 되팔아 2004년 드디어 아파트를 매입하게 되었다.


첫째딸이 아직도 빌라에 전세를 산다고 하자 하루라도 빨리 아파트를 장만하라고 했다. 정원이는 '내 집'이 있다는 것 자체가 주는 심리적인 안정감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고 했다. 마치 그녀의 친정어머니가 앞에 앉아 있는 듯 했다. 어쩜 저렇게 비슷할까? 부동산에 관심이 있는 그네들이 보여주는 공통점은 주택의 자산적 가치에도 물론 관심이 많았지만, 내집마련을 통한 주거 불안정의 해소라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정원이는 우리 사회에서 집이 없다는 건, 남의 집에 산다는 건 -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거라며, '내 집'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더구나 요즘처럼 전세가가 요동치는 세상에 월급쟁이가 어떻게 2년 만에 그 큰돈을 마련하냐고... 부동산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정부를 비판하는 일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며, 에너지만 낭비된다고 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일에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은행이나 부지런히 쫒아다니며 적당한 주택융자가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내 앞가림은 내가 하는 거야.... 니가 살던 집에서 쫓겨난다고 정부가 뭐하나 해줄 줄 아니. 우리 사회에선 집주인이 무조건 '갑'인 거야. 얼른 아파트 하나 장만해... 아파트가 싫으면 굳이 들어가 살지 않아도 되잖아. 세주면 되지. 그래도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들어갈 집이 있다는 거랑 아예 아무것도 없는 거랑 얼마나 다른 줄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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