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신론자라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 죽으면 끝이지.
죽음은 남겨진 자의 몫.
망자의 가족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할 슬픔을 생각하면 그제서야 죽음의 무게가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다.
이게 죽음에 대한 그간의 나의 생각이었다.
48세의 젊은 나이의 큰집 사촌언니가 이틀 전 세상을 떴다.
담도암 선고를 받은 지 딱 일 년 만이다.
형을 아버지처럼 생각했던 아빠덕에 어릴 적 사촌들과의 교류가 무척 잦았다.
큰집은 충남 대천이다. 대천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그 대천.
중풍에 걸린 친할머니를 십여 년 간 모셨던 큰엄마의 모습은 일곱 살 여덟 살이었던 내 눈에도 때론 대단하게 때론 짜증스러운 모습으로 기억되었다.
말단 공무원으로 지낸 큰아버지 댁은 나의 왜곡된 기억 속엔 초가집이었다. 사실 그 시절에 초가집은 없었을게 분명한데 내 기억은 그렇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한겨울 추운 날에도 종을 울리며 새벽마다 돌아다니던 두부장수.
그 뜨끈하고 고소한 하얀 두부의 맛과 냄새가 지금도 코끝에 맴도는 듯하다.
그 집엔 딸이 셋이 있었다. 큰딸은 나보다 한살이 많은 언니, 둘째 딸은 나와 나이가 같았는데 친척간이다 보니 모두들 그 애더러 나를 언니라고 부르라 했다. 지금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나와 나이가 같은 사촌은 나에게 언니라고 부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나 같아도 그랬을 거 같다. 나이도 같은데 언니는 무슨… 그러더니 얘가 성인이 되어 친척 누군가의 결혼식장에서 마주쳤는데 날 보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너무나 살갑게 언니라고 부르는 거다. 그 상황이 재밌고 멋쩍었다. 배포도 큰 녀석! ‘야~ 무슨 언니야.. 그냥 이름 불러’라고 했지만 나와 나이가 같은 그 동생은 그 후로도 계속 나를 언니라고 부른다.
이렇게 셋, 나보다 한 살 많은 소영언니, 나 혜영 그리고 나이 같은 동생 선영.
우리는 명절 때 차례가 끝나면 대천 읍내에 영화를 보러 득달같이 달려 나갔다. 큰집 막내딸과 우리 집 내 동생은 나이차이가 나서 감히 우리 셋과 함께 놀지 못했다. 걔네들을 떼어놓고 읍내로 도망 나오느라고 온갖 속임수를 다 썼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내 동생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더라.
이런 기억도 중학생 때 까지가 전부였던 거 같다.
고등학생이 되어 학업이 바빠지면서 큰집에는 아마 아빠만 갔던가… 우리 집도 각종 사건사고들로 바람 잘날 없었기 때문에 솔직히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뭐 더 말할 것도 없이 자연스레 교류가 끊겼고 일가친척 결혼식이나 있어야 간간히 얼굴을 볼 수 있는 정도였다. 어느 집이나 비슷할 것이다.
소영언니가 우리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수학 공부방을 하며 지내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그럼에도 서로 먹고살기가 바빠 한번을 만나지 못했다. 짬을 내어 점심 한 번 먹을 법도 한데 나도 참 무심하다.
작년 12월…
소영언니가 담도암에 걸렸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담도암 이란 게 치료가 꽤나 어려운 암이라는 것도 언니 소식을 듣고 인터넷을 찾아보며 알게 되었다.
엄마로부터 종종 소식이 들려온다. 수술도 못한다더라… 딱 맞는 치료제도 없다더라…
다행히도 지난 6월에 병원으로 찾아가 언니를 보고 왔다. 마르긴 했지만 얼굴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병원 뒤 작은 언덕도 종종 산책한다고 했다.
언니의 큰 아이가 재수를 한다는 것도, 둘째는 중3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형부와는 대학1학년 씨씨로 만나 부부의 연으로 이어졌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장례식 장에서도 비교적 평정심을 잘 유지하던 형부는 함께 학창 시절을 보냈을 대학 친구들 조문을 오면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르며 오열을 했다.
두 달을 선고받았단 얘기를 들은 게 약 이주 전인데 그 두 달을 채우지 못하고 언니는 이틀 전에 세상을 떴다. 마지막엔 마약도 듣지 않아 고통 속에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고,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큰엄마가 함께 했다는 얘기를 또 엄마에게 전해 들었다.
부인을 잃은 남편의 고통, 엄마를 잃은 어린 자식들의 슬픔, 그리고 무엇보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그동안 생각했던 죽음의 의미이다.
죽음은 남겨진 자의 고통.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 년간 힘들게 재수한 딸이 갈 대학을 마지막 순간까지 챙긴 죽음을 앞둔 한 인간.
이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 고등학교 생활을 맞이한 딸을 끝까지 돌보지 못하는 엄마의 죄책감.
스무 살, 찬란한 그 시절을 오롯이 함께 한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뜨는 자의 불효.
죽음이 별 건가. 세상에 대한 이런 미련이 죽음의 고통이 아닐까.
언니의 고통이 남겨진 자들의 고통보다 더 크지 않았을까?
고통의 경중을 따지는 게 의미 없긴 하겠지만 언니의 죽음으로 나는 내가 그동안 가졌던 죽음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힘겹게 눈을 감았을 언니의 발인이 오늘이다. 지금 이 시각 언니의 차가운 육신은 뜨거운 불길 속에 활활 타올라 한 줌의 재가 되고 있을 것이다.
그 불길과 함께 모든 고통이 사라지길…
죽은 자의 고통도.. 남겨진 자의 고통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