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머무른 순간들] 07. 영화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 (1)
*영화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사용된 모든 이미지의 출처는 넷플릭스입니다.
사진의 가장 크고 주요한 특징은 아마 '기록'일 것입니다. 사진은 '때때로' 예술이 될 수 있을 뿐이지만, 그 순간에도 기록이기를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한 장의 사진은 그 자체로 한 사건에 대한 증명이자 증거가 되어 줍니다. 그렇기에 수많은 권력자들은 사진 이미지의 폭발력과 위험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말년의 그들은 가능한 모든 기록을 훼손하고 말살해 버리려 했지요. 영화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는 혹독하고 잔인한 나치 수용소에서 그 악행의 기록을 지키려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입니다. 수용소의 잔혹한 진실을 담은 필름을 빼돌리며 홀로코스트가 역사에 기록되는데 일조한 프란세스크 보시 캄포의 실화를 영화에 담았습니다.
마우트하우센 수용소는 잔혹하고 무자비했습니다. 유대인부터 전쟁 포로, 흑인 등 온갖 사람들이 갖가지 명목으로 붙잡혀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재판도 없이 수감되어 끝없는 노역에 시달렸고, 심지어는 이유도 없이 죽어야만 했습니다. 유럽 곳곳에 위치한 수용소들 중 마우트하우센은 그중에서도 악명이 높았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의 전황이 기울어 패전이 임박하게 되자 나치는 모든 기록을 없애려 합니다. 필름, 서류, 사진 등 모든 기록을 닥치는 대로 소각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기록들을 실은 수레가 향한 곳이 시신들을 불태우는 소각로였다는 점이 제게는 마음 깊이 남았습니다. 독일의 한 광장에는 이런 글귀가 남겨져 있다고 합니다. "책을 불태우는 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결국엔 사람도 불태우게 된다." 불온하다는 낙인을 찍으며 책과 예술 작품을 불태우던 파시스트들은 기어이 사람을 불태우더니, 그 기록들까지 흔적도 없이 지우려 했습니다. 그렇게 둘 수는 없다고 느낀 주인공이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며 숨긴 필름들을 수용소 밖으로 반출하려 하는 것이 영화의 주된 플롯입니다.
여기까지 소개하고 보면, 어딘가 기시감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나치의 악행과 수용소의 지옥도는 그간의 수많은 홀로코스트 영화가 표현해 온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는 그저 '역사 영화'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진과 카메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주제를 던집니다.
이야기에는 또 다른 인물이 있습니다. 나치의 수용소 식별부 책임자 '파울 리켄'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수감자들의 사진을 찍으면서도 인물의 배치와 구도, 의상과 소품에 대해 집요하게 신경을 쓰며 '완벽한' 사진을 추구하는 편집증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수감자들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대상을 그저 흥미로운 볼거리로 치부할 뿐입니다. 그에게 수감자들은 예술의 오브제이자 재료일 뿐, 찌르면 피가 나오고 때리면 비명을 지르는, 자신과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가 수감자들을 때리거나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이유는 특별히 선한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베토벤과 고상한 예술 작품들, 혐오와 이기로 가득 찬 시선을 사진의 이름으로 포장하려는 욕망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절멸'해 가는 수용소에서조차 예술을 찬미하는 그는 영화 속에서 특별히 소시오패스적이고 무감각한 악인으로 표현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시대와 문화를 뛰어넘어 분명히 존재하는 예술의 어두운 면을 상징합니다. 모든 예술은, 대상의 개성과 아픔, 독자성을 지우고 타자화/도구화하게 될 위험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또 영화의 초반부는 나치가 수용소 수감자들의 죽음을 어떻게 조작하고 은폐하는가를 중요하게 다룹니다. 카메라와 사진이 언제나 진실에 복무하는 것은 아닙니다. 카메라는 누구의 손에 쥐여지느냐에 따라, 또 어디에서 누구의 눈으로 읽히느냐에 따라 수없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수감자들이 지켜 내려던 사진들은 원래부터 진실을 알리기 위해 촬영된 것이 아닙니다. 대상을 착취하는 편견 어린 시선에서 출발한 사진들이었습니다. 영화의 중반부까지 카메라와 필름들은 철저히 나치의 시선에서 활용되고 조작됩니다. 살해된 자의 시신이 자살한 자의 시신으로 둔갑하고, 끌려가 죽음을 맞이한 시신들이 수용소를 탈출하다 사살된 시신으로 조작되는 데 도움을 주는 것 또한 바로 카메라입니다. 서류상으로 그들의 죽음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명백한 이미지로 기록된 필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감자들이 그렇게도 치열한 노력을 통해 지키려던 사진들은 그런 사진들입니다. 영화는 카메라가 '잘못' 사용되었던 역사의 현실을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옴으로써 찍는 쪽에서의 윤리와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합니다. 대상을 존중할 것, 진실을 포착할 것. 피사체와 촬영되는 맥락을 잊은 채 이미지만을 부르짖는 사진은 철저하게 파시즘에 복무하거나 기껏해야 나르시시즘을 충족시킬 뿐이라는 것.
그럼에도 이 영화가 끝까지 사진의 힘을 의심치 않는 것은 역사가 그렇게 말해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수용소의 해방이 이루어진 후, 그는 총 대신 카메라를 목에 걸고 길을 나섭니다. 총기를 내려놓고 카메라를 챙기는 그의 선택이 자못 상징적입니다. 총과 칼 대신에 카메라를 선택함으로써, 한 발의 총알보다 한 장의 필름이 훨씬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음을 스스로 증명해 냈기 때문입니다. 캄포는 그 모든 일이 지나간 후의 풍경을 겸허하고 결연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기록합니다. 수용소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셔터를 누릅니다. 그가 손에 든 카메라는 같은 것이지만,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그제야 그는 그저 남겨진 필름을 숨기고 빼돌리는 일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진실을 기록하는 '사진가'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친위대와 간수들의 몽둥이질 없이 자유롭게 걸으며 촬영할 수 있는 날을 그는 얼마나 기다려 왔을까요. 영화의 말미에 다함께 모여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은 보는 우리의 마음 한쪽을 아리게 합니다. 카메라가 그 웃음만을, 기념사진만을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Part 2] 에서 계속됩니다.
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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