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머무른 순간들] 07. 영화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 (2)
*Part 1의 후속편입니다.
*영화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의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자 명장면을 꼽는다면 다름 아닌 크레딧 장면일 것입니다. 영화의 참여한 이들의 이름이 마우트하우센의 '실제 사진'들과 함께 지나갑니다. 그 사진 속 이미지들은 영화의 이미지와 놀랍도록 일치합니다. 그 장면을 보며 저는 이 영화를 얼마간 오해하며 보았음을 깨달았습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는 언제나 '재현의 윤리'에 사로잡히기 마련입니다. 재현의 윤리는 얼룩진 역사를, 실존하는 고통을 담아내는 모든 예술과 미디어가 숙명적으로 껴안을 수밖에 없는 딜레마입니다. 이 질문에 에둘러 대답할 수도, 직설적으로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벗어날 방법은 없습니다. 홀로코스트를 영화에 담아내기로 한 이상 연출가/작가는 이 질문들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무엇을' 재현할 것인가. 재현할 수 있는가. 그리고 모든 문제가 그렇듯이,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일 것입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영화가 재현에 거리낌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요컨대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빠져 있다고 본 것입니다. 특히 패주하는 나치가 수감자들을 가스 트럭에 태워 죽이려는 장면-트럭 내부에 갇힌 수감자들의 시점으로 촬영한 카메라 연출-은 희생자들의 죽음과 고통을 극적 서스펜스를 위해 차용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영화 내내 드러나는 폭력에 대한 묘사가 단순히 표현의 수준이나 절제의 여부를 떠나, 충분한 고민 없이 사용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마우트하우센의 사진사>는 여러 부분에서 장점이 있는 영화지만, 재현의 측면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영화의 크레딧 장면에서 우리는 알게 됩니다. 우리가 본 것들이 그저 '영화'일 뿐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경험한 일들이라는 것을. 영화는 남아 있는 기록을, 그 사진 이미지를 완전하게 존중하며 영상으로 옮겨냈다는 것을.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그럴싸한 '리얼리티(Reality)'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냄으로써 흥미를 자극하고 스펙터클한 영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사진이 가지고 있는 '리얼(Real)'을, 다시 말해 사실과 진실 자체를 추구해 왔다는 것을 말입니다. 크레딧 내내 펼쳐지는 흑백 사진들은 영화가 조금은 가공되고 극화되었을 것이라는 우리의 생각을 무참히 무너뜨립니다. 가장 끔찍했던 사형 집행 장면과 채석장의 구조, 수용소 해방 당시의 풍경 등 모든 것이 실제의 기록과 완전하게 닮아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요컨대 감독은 수용소에서 캄포가 했던 일과 같은 일을 영화가 해낼 수 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분명 재현이지만, 대상을 그저 볼거리로 소비하는 재현은 아닐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판단은 관객 각자의 몫입니다.) 그제서야 저는 이 영화가 가진 태도를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홀로코스트는 재현할/재현될 수 있는가"라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무거운 질문에 대해 나름의 대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2018년 타계한 불문학자이자 문학 평론가 황현산 선생은 이렇게 썼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 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 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라고.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라고. 선생의 글을 떠올리며 이 영화를 다시 곱씹어 봅니다.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현재를 더 두텁게 만들 수 있을까요. 캄포는 사진이 그 방법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사진을 받아든 우리는 그 믿음에 응답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세상엔 기록되지 못한 고통이, 억압과 통제에 밟혀 나가는 진실이, 서슬퍼런 탄압 아래 불태워지는 사상과 터전과 사람이 존재하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다 지난 일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이제 과거는 잊고 다음으로 나아가자."라고 말하지 않고, 필요하다면 계속해서 이 자리로 돌아와 어김없이 아찔해지고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작업을 계속 반복해야 할 것입니다. 때로 지성이란 고개를 빳빳히 쳐들고 앞을 바라보며 전진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저하고 망설이고 뒤돌아보는 데서, 무언가 사라지고 없어지고 죽어난 자리를 만지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요. 카메라는 충분히 그런 힘을 지니고 있다고, 이 영화는 힘주어 대답하고 있습니다.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