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최선의 세계.

[우리가 머무른 순간들] 08. 조세희 <침묵의 뿌리> (2)

by 진군


*Part 1의 후속편입니다.



©조세희




그의 사진은 정직합니다. 표현주의적인 야심보다는, 사건과 사람을 직시하고 정직하게 기록하려는 의도가 묻어납니다. 그의 사진에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진이 종종 등장합니다. 그들의 눈빛이 페이지 너머로 우리에게 닿을 때, 우리는 조금 무력해지기도 할 것입니다. 슬픈 것 같기도, 분노한 것 같기도, 체념한 것 같기도 한 그들의 표정이 30여년 전 그 순간에 정지해 있듯이, 우리의 사회도, 그들이 바라 마지않던 꿈들도 얼마간 정지해 있기 때문입니다.


미처 지나치기 쉬운 마지막 챕터에는 부록처럼 사진에 대한 기록들이 담겨 있습니다. 사진만 본다면 다소 멀거나 어렵게 느껴지기 쉬웠을 이야기가 훨씬 선명하고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이 때의 '생생함'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실감, 다시 말해 감탄과 몰입을 자아내는 그것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일하고 생활하고 서로에게 어깨를 내주며 살아가는 삶에 대한 실감, 한 아이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느꼈을 불평등과 가난에 대한 실감, 이 사회의 불합리함과 부조리함을 어려서부터 뼈저리게 배울 수밖에 없었던, 그리하여 일찍 철이 들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삶에 대한 먹먹하고 무거운 실감입니다. 그것은 우리 현대사의 아픈 발자국들을 하나씩 돌아보는 일이 되겠지요. <침묵의 뿌리>는 분명 30년도 넘은 책이지만(1985년 초판 발행), 책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분명 유효합니다. 30년 전의 그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글을 쓰고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달려갔습니다. 그 시절의 그가 가슴 아파하며 글과 사진으로 옮겨내려던 일들이 이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고, 초고속 성장과 산업화,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다 해결되었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을까요.


©조세희



초현실주의 영화사조를 이끈 감독 루이스 브뉴엘은 "왜 영화를 만드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지금의 세계가 가능한 모든 세계 중 최고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앞으로도 우리의 세계는 '최고의 세계'일 수 없을 것입니다. 조세희 작가의 말마따나 "지구 전체가 낙원은 아닌" 것입니다. 언제나 낙원은 소수에게만 허락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최악의 세계'를 직시하고 꼬집을 수는 있습니다. 동시에 '가능한 최선의 세계'를 상상하고 그려낼 수는 있습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세태를 추궁하고 있어선 안 될 일을 벌여온 이들을 비판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때, 최선의 세계는 그렇게 조금씩 가까워질 것입니다.


조세희 작가도 같은 마음으로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달려가고 글을 써내려갔습니다. '세상이 이럴 수가 있느냐'고 가슴을 치면서 묵묵히 작업을 이어나갔습니다. 불과 몇 년 전의 인터뷰를 살펴보더라도 조세희 작가는 카메라를 들고 집회 현장의 최전방에 나서며 그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왔습니다. 책의 말미에 조세희 작가는 생물학자 찰스 버치의 말을 인용합니다. "인간의 구제에는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의 구제가 포함된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세계를 함께 구해야만 합니다. 어떤 작가는 황홀하고 멋진 가상의 세계, 다시 말해 가짜 최고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브뉴엘의 말을 따릅니다. 반면에 또 어떤 작가들은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마음으로 세계를 대합니다. 작품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세계'를 바꾸려고 노력합니다. 무엇이 더 훌륭하다 말할 수는 없지만, 읽는 이의 염려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현장의 가까이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기록하는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또 그들과 함께 싸울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행운일 것입니다. 조세희 작가의 책은 <침묵의 뿌리>를 마지막으로 출간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연재소설 <하얀 저고리>가 있었지만 아직까지 책의 형태로 묶여 나오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언젠가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될 그의 새로운 작품을 계속해서 기다리고 싶어집니다.



©조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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