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머무른 순간들] 06. 사진작가 비비안 마이어
몇 년 전 대학에서 예술과 미술사에 대한 교양 수업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전반적인 미술사조의 흐름과 더불어 예술과 예술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던 수업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에세이 과제는 이제껏 깊게 고민해 본 적 없는 질문들을 마주하게 했습니다. 자신을 예술가라고 생각하는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지 논리적인 답변을 요구하는 과제였는데, 글을 써내려가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예술대학에 다니고 있으면서도 예술가의 조건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나름의 몇 가지 조건을 세워 보았습니다. ‘지망생’에서 벗어나 스스로 한 사람의 예술가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을 것. 작품 활동을 통해 얼마간의 경제적 수입을 이룰 수 있을 것. 더불어 그 작업이 삶의 태도로 자리잡은 사람일 것과 같은 조건을 정립하고 스스로를 대입해보았던 것입니다.
비비안 마이어에 대해 접한 것은 에세이 과제 이후였습니다. 그 전부터 그녀와 그녀의 작품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아마 제 과제는 많은 부분에서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니, 제가 세운 조건에 부합하는 부분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마이어는 전문적인 예술가로 주목받거나 작품을 발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고, 경제적 수익이나 대중적 인지도를 얻은 적도 없으며, 심지어는 제도권의 예술교육을 받거나 스스로를 예술가로 정의내린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녀의 사진이 예술이 아니라고, 그녀가 예술가가 아니라고 감히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생각합니다. 예술가의 조건이란 애초에 허상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다만 우리는 한 사람을 예술 활동으로 이끈 원동력과 그 작품들이 우리에게 남긴 것들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라고.
경이로울 만큼 엄청난 양의 필름을 촬영하고도 이를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가족도 애인도 없이 가명을 주로 사용하던 신비로운 그녀의 삶이 더해지고 나면 우리는 이런 생각에 머물게 됩니다. 그녀로 하여금 카메라를 들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다큐멘터리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는 존 말루프의 행적을 따라갑니다. 부동산 중개업자 존 말루프는 어느 창고 경매에서 필름 뭉치들을 우연히 입수합니다. 가능성을 발견한 그는 그 필름들을 자신의 블로그에 공개하고, 그로 인해 마이어의 사진들은 새롭게 세상에 선보여지게 됩니다. 그녀의 사진들은 평단과 대중들의 극찬을 얻으며 생전에 얻지 못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말루프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녀가 남긴 유품을 정리하고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그녀의 행적을 되짚어 갑니다.
비비안 마이어에게서는 흔히 우리가 ‘예술가’라고 부르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통해 찬사와 부를 얻고 싶다는 욕망이나,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만의 가치나 사회적 의미를 작품에 담아 전하고자 하는 욕망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서, 그녀가 가지고 있던 욕망이 어떤 것이었을지 어렴풋하게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이론의 개척자로 불리는 앙드레 바쟁은 ‘미라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통해 조형예술의 역사가 죽음과 시간에 맞서 존재를 보존하기 위한 욕망에서 출발했다고 분석합니다. 회화, 사진, 영화에 이르기까지 많은 예술의 원동력이 바로 과거를 지켜내기 위함이었다는 뜻입니다. 바쟁의 이론에 근거한다면, "언젠가 과거가 되어버릴 그 모든 현재에 영원성을 부여하기 위해(<사진적 영상의 존재론>, 앙드레 바쟁)” 우리는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촬영하는 것입니다. 미라와 피라미드, 사진과 회화는 모두 죽음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욕망에서 기인하는 셈이지요.
이 이야기를 마이어의 사례에도 적용할 수 있겠지요. 실제로 그녀는 엄청난 기록광이자 수집광이었습니다. 수십만 장의 필름뿐 아니라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와 8미리, 16미리 필름 영상도 발견되었습니다. 쿠폰, 수표, 영수증, 신문 등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고, 옷이나 모자, 장신구를 모으는 일에도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남긴 그 모든 필름들이 작품에 대한 열망보다는 일종의 ‘수집욕’에 가까웠다고 본다면 지나친 해석일까요?
그녀가 남긴 필름들 중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나 자신의 그림자를 촬영한 사진이 종종 보인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물론 많은 사진가들이 자신의 모습을 촬영하고 싶어하곤 합니다. 자화상 작업으로 유명한 사진작가들도 분명 있지요. 그러나 그녀가 남긴 자화상들은 이따금씩 강박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표정이나 정서를 찾아볼 수 없는 얼굴과 경직된 자세는 마치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증명을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고정된 태도나 가치 판단 없이, 자신의 현재를 기록하는 것에 중점을 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녀의 진실된 욕망이 무엇이었을지는 영영 미궁 속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려진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그녀의 삶과 작품에서 ‘미라 콤플렉스’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바쟁의 이론에 근거해 설명한다면, 그녀가 가지고 있던 원동력이 수많은 예술가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이지요.
온통 물음표로 가득한 그녀의 삶과 다르게, 그녀의 사진은 수많은 드라마로 가득합니다. 과감하게 대상을 잘라내고 부각시키는 프레이밍과 찰나의 순간을 잡아내는 순발력, 안정적인 구도와 도시에서 발견한 다채로운 피사체들까지 다양한 매력을 보여주는 그녀의 사진들은 이제라도 주목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보는 이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그녀는 누군가 다치거나 죽어가는 사건을 포착하기도 하고, 도시의 여러 이면들을 발견하기도 하고, 어린 아이나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에게 카메라를 돌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프레임에 자신의 그림자를 넣거나 그 자리에 함께 존재하기도 하지요.
특히 그토록 비밀스럽고 조심스럽던 그녀가 촬영한 인물사진들은 정말 놀랍습니다. 낯선 이에게 카메라를 가져가 본 경험이 있으시다면 아마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주저되는 일인지 아실 겁니다. 그러나 그녀는 카메라를 매개로 어린 아이에게도, 담배를 피는 노동자에게도, 찬란하게 치장한 젊은 여성에게도 과감하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온통 신비로웠던 그녀의 삶이 전혀 엿보이지 않을 정도로 인물들은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누군가는 카메라를 노려보기도 하고, 어설프게 시선을 피하기도 하지만, 분명 그들은 그들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의 인물사진들을 보며 저는 마이어와 그들의 대화를 상상해 봅니다. 어떤 말을 건넸을까요? 어떻게 촬영에 대한 허락을 구하고 어떤 대화를 이어갔을까요? 표정이나 자세, 시선에 대해 지시를 내리기도 했을까요? 분명한 것은, 그녀는 누구보다 용기있게 거리로 나선 사진가였고, 누구보다 과감했으며 누구보다 현재에 충실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녀의 사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타인에 대한 두려움이나 강박, 조심스럽고 비밀스러운 의문들이 아닌 유머와 애틋함, 사진에 대한 열정과 애정입니다. 미라 컴플렉스가 죽음과 망각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 삶에 대한 열망에서 오는 것일 테지요. 그 열망은 결국 그녀가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했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어떤 것도 버릴 수 없던 그녀에게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는 그녀가 삶을 사랑한 증거였다고 보아도 될까요.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에는 애인과 헤어진 경찰이 등장합니다. 그는 유통기한이 자신의 생일까지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하루에 한 통씩 사는 기이한 인물입니다. 통조림의 유통기한이 다 되어도 애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그녀를 깨끗하게 잊겠다고 다짐하던 그는 끝끝내 수십 통의 통조림을 다 먹어치우지요. 저는 비비안 마이어의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영화 속 경찰이 떠오릅니다. 어쩌면 그녀는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어서’ 카메라를 들었던 게 아닐까요. 무언가를 기대해서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어서, 하루에 한 통씩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면서 실연의 상처를 달래려던 한 외로운 인간처럼 말입니다. 아직도 채 정리되지 않은 수십만 통의 필름들은 다만 카메라를 통해서, 죽음과 망각에 저항하고 조금씩 자신의 세계를 넓혀온 시간의 축적인 것이지요. 이 표현이 조금 진부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사진을 보며 저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만큼만 시간을 쏟을 수 있고, 사랑하는 만큼만 찍을 수 있다고. 그녀의 인생이 어떤 모습이었건 간에, 그녀는 누구보다 세상과 삶을 사랑한 사진가라고.
“오늘날 사진은 뭔가를 요구할 때가 많다. (…)
좋아해주고, 공유해주고, 댓글을 달아주길 원한다.
오늘날의 사진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
마이어의 작품이 그런 사진과 크게 다른 점은
오직 만들어지는 데 목적이 있는 사진이었다는 점이다.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던 천재의 삶과 사진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 ‘셀프 포트레이트 : 내가 본 비비안 마이어’, 엘리자베스 알베돈.
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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