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발견한 서울의 낭만

[우리가 머무른 순간들] 05. 사진작가 한영수

by 진군





1950년대의 서울을 생각하면 여러분은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한국전쟁 직후, 지독한 가난과 전쟁의 상처로 힘들게 살아온 역사적 아픔을 먼저 떠올리시겠지만, 오늘 소개할 사진들은 그러한 고정관념을 조금 허무는 사진들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영수



한 장의 흑백 사진이 있습니다. 영화관 간판은 화려한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고 세련된 옷을 입은 젊은이들이 그 앞을 지나칩니다. 가지런하게 넘긴 포마드 머리와 평화로워 보이는 걸음걸이가 그 시대의 분위기를 짐작해보게 합니다. 분명 같은 시대의 사진이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던 서울의 모습이 한 사내의 카메라에 오롯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한영수가 기록한 서울은 사뭇 달랐습니다. 그의 사진을 본 이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그의 사진은 무언가를 역설하거나 주장하려 하지 않는다고. 카메라라는 권력을 이용하거나 무언가를 강요하는 대신 사진에 담기는 피사체와 그들의 삶을 존중하는 태도가 그대로 느껴진다고.


1933년 개성에서 태어난 사진작가 한영수는 그림과 사진을 배우며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서울로 돌아온 그는 폐허로 남은 서울에서 새롭게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는 모든 것이 준비된 상태에서 셔터를 누르는 상업사진가가 아닙니다. 물론 그의 커리어의 시작은 광고사진이었지만, 그의 작품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서울 거리와 인간 군상의 모습을 담아낸 사진집 <모던 타임즈>로 대표되는 스냅사진들입니다. 그가 한국 최초 리얼리즘 사진 연구 단체 ‘신선회’ 창립 회원 중 한 명이라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신선회에 대해 많은 자료가 남아 있지는 않지만, 창립회원들의 작업이나 남아 있는 여러 기록들을 통해 신선회가 무엇을 표방하던 단체였는지는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그린 회화처럼 감성적인 표현을 추구한 ‘살롱 사진’에서 벗어나, 역사의 증언이 될 수 있는 기록의 가치와 ‘삶의 진실성’을 포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한영수


그의 사진은 언제나 한 발짝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언제나 거리를 둔 채로 대상을 방해하거나 조작하지 않는 사진을 추구했던 것 같습니다. 카메라 뒷 편에 존재했을, 눈동자를 반짝이며 셔터를 누를 순간을 기다리던 한 사내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사진의 매력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담아냈다는 것에서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추구한 리얼리즘의 목표는 삶과 사람, 우리 사회를 여과없이 담아내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찾아내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대상을 연출하지 않는 대신, 그것을 바라보는 구도와 포착한 순간이 그만의 진실을 담을 수 있도록 작가의 시선이 더해졌을 때 보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감각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지요.


©한영수


그는 어쩌면 단렌즈, 그리고 광각렌즈를 썼던 것 같습니다. 한영수 작가의 사진들을 보다 보면, 망원렌즈 특유의 심도나 화각보다는 광각렌즈의 확대된 원근감 또는 탁 트인 시야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24mm 렌즈는 대상을 클로즈업하거나 꽉 차게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화각이지요. 대신 정확한 구도와 순간을 잡아내는 순발력이나 초점을 빠르게 맞추는 손동작이 더 요구됩니다. 대상을 포착하는 예민한 관찰력 또한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버스와 전차, 자동차와 인력거, 행인까지 저마다 다른 종류의 이동수단이 나란히 놓인 순간을 촬영한 사진을 보면, 이 순간을 필름에 기록하기 위해 작가가 얼마나 오랜 시간 기다렸을지 상상해보게 됩니다. 지금은 빌딩숲에 가려 도심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긴 그림자도 사뭇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한영수


한영수 작가의 사진을 보고 가장 처음 느낀 감정은 ‘편안함’이었습니다. 그는 사진을 통해 무언가를 역설하고 주장하고 내세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 시절 서울의 거리를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카메라에 담아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한영수 작가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니, 그 때의 서울을 한 번 걸어보고픈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한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역사이지만, 이상하게 제게는 사진이 품고 있는 정서가 ‘낭만’으로 느껴졌습니다.


흔히 우리는 ‘모던’하면 일제강점기 말, 문화통치가 자행되던 시기의 경성을 떠올립니다. 1920년대부터 시작된 도시화와 서구 생활양식으로 탄생한 모던보이-모던걸을 떠올리거나 이상으로 대표되는 문인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반면 1950년대의 서울에서 모던을 연상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전쟁 직후 폐허가 된 국토에서 우리의 윗세대는 재건이라는 임무를 떠맡아야 했습니다. 교과서와 미디어를 통해 그려진 그 시기의 대한민국은 그랬습니다. 그러나 한영수 작가의 카메라에는 한국전쟁 직후의 서울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거라고 믿었던 낭만이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단순히 패션과 스타일의 모던이 아니라,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태도로서의 모던 말입니다. 한영수 작가는 1978년 한 지면을 빌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감정 표현이 둔해서 얘기하는 도중이라도 카메라를 들이대면 표정이 굳어져 원하던 앵글을 놓치고 말지만 시장 바닥이나 청계천 군복 염색하는 곳에서 여념 없이 일하는 사람들 속의 무심함을 찍는 재미로 사진에 깊숙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디자인> 1978년 6월 1일 통권 16호)"


©한영수



같은 시대에서도 작가들은 저마다 다른 것을 발견합니다. 무엇이 작가의 마음을 움직였는가. 작가는 무엇에 다가가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무엇을 담아냈는가. 같은 시대를 살아낸 이들의 전혀 다른 시선을 살피는 일은 퍽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같은 역사를 경험했다고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듯이, 같은 시공간에 놓여 있다고 해도 카메라에 담아내는 피사체와 그 맥락은 전혀 새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코와 입을 가린 마스크로 가득한 2020년대의 대한민국을 누군가는 삭막하고 어두운 시간으로, 또 누군가는 서로를 지키려는 마음이 표현된 따뜻한 시간으로 기록할 수도 있겠지요. 이러한 다채로움이야말로, 우리에게 더 많은 카메라가 주어져야 하는 이유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카메라를 들고 걷는 것만으로, 매일 걷던 거리를 새롭게 감각할 수 있습니다. 빛과 색과 움직임에 민감해지고 사물과 사람과 풍경에 더 마음을 두면서 걷게 됩니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어떤지, 어떤 표정으로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건물의 간판과 빌딩 사이로 다가드는 햇빛들, 가로등의 모양…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어딜 걸어도 여행이 되는 것이지요. 시대는 바뀌고 이제는 같은 거리라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우리 도시의 풍경은 많이 바뀌었지만, 카메라를 멘 채로 걷는 그 시간만큼은 한영수 작가와 같은 마음으로 길을 나서고 있는 게 아닐까요.


한영수 작가는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그의 사진들은 잊혀지지 않고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한영수 작가의 딸이자 한영수문화재단의 대표를 지내고 있는 한선정 대표가 그의 작업들을 다시 사진집으로 재발간하는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포착한 여성의 사진들을 다시 엮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처럼 시대를 앞선 작업들은 다시금 새롭게 주목받고 있기도 합니다. 어떻게 선별하고 편집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사진의 매력이 아닐까요. 창고 한 켠에서 재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한영수 작가의 필름들을 기대해 봅니다.




진군

@jjinkuu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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