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6월 30일의 글
지지난 주, 파리 근교 여행을 다녀올 때까지만 해도 최저기온 13도에 최고기온 20도 남짓으로 두터운 소재의 가을 원피스와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서도 저녁때면 약간 으슬으슬한 감이 있던 날씨였는데, 며칠 사이 이곳 프랑스에 대체 무슨 일이..!
어제 한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파리의 날씨가 한국 메인뉴스에 올랐다며 연락을 받았다. 최고기온을 확인했다. 39도. 이 나라는 한여름에도 공기가 습하지 않아 그늘에만 있으면 꽤 선선하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런 통상적인 말들도 37도가 넘어가는 들끓는 열기 앞에선 무의미한가 보다. 굳이 말하자면 숯불구이냐 찜요리냐의 차이 정도라고나 할까.
채광이 좋지 않은 집에 사는 덕을 이번에라도 볼까 싶었지만 , 볕이 들지 않는 어두운 방안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숨 쉬는 것이 버거울 정도로 뜨겁게 달궈진 공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시원한 물을 연거푸 들이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 나뭇가지 사이로 빼꼼 빠져나와 눈을 찔러대는 강도 높은 햇볕, 바삭바삭한 풀잎. 그렇게 어마어마한 더위가 이곳 파리를 한껏 뒤흔들고 지나갔다.
가뜩이나 날이 더운데 바깥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일하게 되면 어떡하지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이번 한주 동안은 내부 환경이 쾌적한 브랜드 박물관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근무 첫날, 같이 일하던 남자 동생과 트러블이 생겨버렸다. 푹푹 찌는 공기보다도 숨 막히는 시간. 본래 이런 상황이 생기면 풀어지든 그렇지 않든 그냥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는 편인데 하루 네 시간 주 5일을 꼬박 같이 일하는 이 친구와는 어떤 방식으로든 시도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나에 대한 이 친구의 깊은 관심 때문에 생긴 일인 만큼 내쪽에서 먼저 화해를 시도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었다.
"불편해서 일 못하겠네. 얘기 좀 하자"
아이쿠.. 마음먹은 바와 달리 말이 조금 세게 나와 버렸네. 함께 카페로 걸어갔다. 그 친구는 아이스티 나는 뜨거운 카푸치노를 시켜놓고 다시 정적의 오 분. 어휴 더워. 대화를 시작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처음에는 빙빙 돌던 것이 어느새 중심을 찾기 시작했고, 각자 마음속에 담아둔 진짜 이야기들이 하나씩 나오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힌트들도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자리를 일어서며 그 친구의 어깨를 한번 툭툭 쳤다.
"잘 지내자."
이 친구와 나.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하나 해결하고 나니 또 하나의 트러블이 생겨버렸다. 아무래도 옛 우화가 사실인가 봐.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강렬한 폭풍우보다 뜨거운 태양. 하늘과 땅이 펄펄 끓고 있던 동안 나 역시 너무도 쉽게 끓어올랐다.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어디로든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졌다. 무더위에 갇힌 채 감정에 빠져 한참을 끙끙 앓았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기 위해선 자기 연민을 비롯한 혼자만의 감정에만 빠져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자신을 위로한 뒤 다시 추스르고 털어내는 것 까지 해야만 했다. 그러고 싶었다. 퉁퉁부은 눈을 가라앉히고 다시 길을 나섰다. 그렇게 한 걸음씩 걸음을 옮기다 보니 희미하게 보이는 길 끝에 하나의 손이 내밀어져 있었다.
긴가민가 싶으면 '민가'쪽을 택했던 나였다. 특히나 관계에 있어서는 만드는 것이든 이어나가는 것이든 내쪽에서 노력이 필요하다 싶으면 차라리 그냥 그만둬버리는 식으로 대처하던 나였다. 그런데 기존의 것이라곤 단 하나도 없는 이 새로운 땅에서 나는 그 틀을 조금씩이나마 바꿔보려 애쓰고 있다. 일, 공부, 관계 모두 마찬가지다. 내가 정성 들인 것들로부터 받게 되는 작은 기쁨들. 그걸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나 보다. 프랑스에 오기 전, 무기력하게 한참을 가라앉아있던 이유도 어쩌면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한 주가 흐르고 또다시 일요일. 일주일에 다섯 번의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다사다난한 일들을 겪어내고 보니, 열파주의보는 어느새 물러났고 18도-26도의 무난한 날씨가 돌아와 있었다.
열기가 온 땅을 지배하던 동안에도 잔디 위에 놓인 축구공 하나면 환호를 내지를 수 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토요일에는 오르세에 다녀왔다. 참으로 신기한 것이 처음 봤을 때 눈을 사로잡았던 그림은 오랜만에 마주해도 또다시 나를 끌어당긴다. 더운 여름 시원한 미술관에서 겨우 피신하고 있다 보니 원래도 좋아했던 설경이 유난히 더 좋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아프리카의 코끼리 역시 지나치기 어려울 만큼 매혹적이었다. 뜨거운 태양볕 아래 아무 물기 없이 바삭바삭한 모래도 살면서 한 번쯤은 느껴보고 싶긴 하다. (지금은 말고...)
더위를 그토록 싫어하는 내가 태양의 무차별적인 공격에도 일단은 살아남았다. 다음은 무어로 나를 또 들쑤시려나. 살아있다 보면 살아남게 되겠지. 점점 겁이 없어지고 있다. 무엇이든 와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