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교활하다. 교활할 뿐만 아니라 교묘하기도 해서 우리는 너무도 자주 그리고 쉽게 자신의 감정에 속곤 한다.
나 역시 모든 것은 지나갈 찰나의 감정뿐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속지 말자고 수없이 되뇌기도 했으면서도, 막상 어두운 감정이 다가와 나를 잡아 삼킬 때면 매번 그 속에 빨려 들어가 허우적거렸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벗어날 수 없는 늪에 빠져 더 깊게 가라앉고 있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내가 어설픈 손발 짓을 저어가며 어푸어푸하고 있던 동안, 저 구석 어딘가에서는 질퍽거리던 땅이 조금씩 제 몸을 강하게 만들고 있었나 보다. 한참을 바둥거리던 와중 단단한 땅의 질감이 드디어 발 끝에 와 닿았다.
박차 보았다.
늘 제멋대로 굴던 감정 녀석이 금토일 삼일 연속으로 울다 지쳐 잠든 내게 조금은 미안해진 건지, 월요일 아침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한 주의 시작을 맞이하려던 순간, 전 날과는 뭔가 다른데? 싶은 가볍고 산뜻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드르륵- 쾅쾅. 인터넷 설치가 예정되어있던 날이라 오전 여덟 시가 되자마자 방문한 세명의 설치기사와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까 찾아와 주신 유학원 원장 선생님께 차례로 문을 열어드리고, 집 전체를 울리는 드릴 소리를 들으며 몽롱하던 잠결에서 깨어 나왔다.
설치가 끝난 후 인근 카페에 가서 오랜만에 원장 선생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얘, 나는 솔직히 너 처음 보고 여기서 칠렐레 팔렐레 프랑스 남자들 다 꼬시면서 놀러만 다닐 줄 알았다. 근데 너 엄청 열심히 살고 있구나. 의외다 정말. 잘하고 있네."
프랑스 입국 후 처음 찾아뵀을 당시 하얀색 핫팬츠에 가죽재킷을 입고 생글생글 눈웃음을 치던 내 모습을 보고 느끼셨다던 솔직한 인상을 듣고 나도 모르게 폭소가 터져버렸다. 누군가에겐 지나칠 수도 있을 만큼 학생들에 대한 관심이 많으신 분. 하지만 그 마음의 중심엔 한치의 불순물 없이 애정만이 가득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난 카푸치노, 선생님은 에스프레소. 거기에 크로와상 두 개. 커피를 홀짝이면서 갓 구워 나온 크로와상을 뜯었다.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먹으려고 했는데, 반 개쯤 먹었을 무렵 "얘 이제 다 먹었지? 일어나자!"라며 남은 크로와상을 치워버리신 탓에 눈물을 머금고 자리를 떴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른 아침을 좋은 기분으로 채워주기에는 넉넉할 만큼의 충만한 대화였다.
선생님을 지하철역까지 배웅해드리고, 집까지 살랑살랑 걷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새파란 하늘, 그리고 그 위를 동동 떠다니는 몽글몽글한 구름에 나는 어느덧 무뎌지고 있었다. 내가 떠나온 나의 고국에서는 어쩌다 한번 마주쳐도 하루 종일 기분이 방방 뜰 정도로 깨끗하고 선명한 새하얀 구름. 하얀색이 선명하다는 게 말이 되는가? 논리적으로 혹은 미학적으로 설명한다면 어려울 것도 같지만 내 눈에 담긴 이 아름다움은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 그 자체였다.
13호선 Duroc 역 혹은 6호선 Sèvres-Lecourbe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한다. 요즘엔 이따금씩 연주하는 사람들을 마주한다. 이 곳에 온 뒤로 거의 매일 잠을 푹 잘 자는 편이라 사실 아침에도 그리 피곤하진 않지만, 그래도 일하러 가는 길 듣는 경쾌한 음악소리는 하루의 시작을 북돋을 만큼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사진을 찍고 싶은데 그냥 찍기는 죄송하니 1유로짜리 동전 한 개를 Chanteur(Chanteuse)에게 드리고 카메라에 그들의 모습을 담았다.
아르바이트는 파리 시내의 대형 백화점 또는 마트를 옮겨 다니며 시장조사를 하고 있는데 이번 한 주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갤러리 라파예트에서 보냈다. 집에서 거리가 아주 가까운 것은 아니지만, 인근에 루브르도 있고 눈을 즐겁게 할 건축물들이 듬성듬성 있어, 근무가 끝난 뒤 살랑살랑 걸으며 주변을 구경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회사에서도 알고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일을 무척 열심히 하고 있다. 해외생활을 할 때는 대개 돈을 쓰는 일들이 즐겁고 버는 일은 괴롭다고들 하던데 사실 나는 버는 쪽에서도 상당히 큰 에너지를 얻고 있는 편이다. 아무리 내가 개인주의자라고 부르짖어봤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다고 느낄 때 받는 힘은 무기력을 털어낼 수 있는 좋은 원동력이 된다.
Trotinette(킥보드)에 완전히 재미를 붙여버렸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면 다들 기억하고 있는 내 모습은 킥보드를 타고 유유히 지나가다 "얘들아 안녕?"이라고 손을 흔들던 모습이라고 하던데, 급경사를 타다 팔이 부러진 적이 있을 정도로 매우 좋아하던 킥보드와 오랜만에 재회한 뒤 잔뜩 애정을 나누고 있다.
아참. 중요한 이야기. 월-화 이틀에 걸쳐 학원에서 필기/구술 테스트를 치렀다. 다행히 시험에선 그리 나쁘지 않은 성적을 받아 강등당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그전까지는 공부를 설렁설렁하고 있던 내가 시험이 끝난 뒤에서야 의욕이 붙어 매일 두어 시간씩 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원래 누가 시키면 하기 싫어하고 스스로 계획 잡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뭔가를 해야 될 때는 하지 않다가 뒤늦게 갑자기 하고 싶어 지면 돌진하는 스타일이다. 좋게 말하면 청개구리 나쁘게 말하면 바보.
또 한 가지. 학원에 처음 본 날부터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쿠웨이트에서 온 여자 친구 Zainab이랑 친구가 된 거 같다. 의사소통이 백 프로 원활하지는 않음에도 마음이 통하는 친구임을 강렬하게 느낀다. 이 친구의 말투와 통쾌한 웃음소리가 좋다. 수업시간에 내가 꾸벅꾸벅 졸고 있으면 그 친구가 내 등을 툭툭 치고는 커피를 마시고 오자고 한다. 하교 후 자신의 나라에 대해 소개하는 프로그램 링크를 보내주기도 했다. 이런 걸 재잘재잘 말하고 있는 자신이 유치하다고도 생각하지만, 어찌 보면 다시 꿈 많은 초등학생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싫지 않다.
같이 일하는 나보다 네 살 어린 동생이 자꾸 나보고 철딱서니 없는 막내 여동생 같다고 한다. (이 자식이?) 사실 철이 들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 친구는 내게 욕(?)으로 했던 말일지 몰라도 나는 칭찬으로 받아버렸다.
잊고 있었다. 파리는 밤, 그리고 해 질 녘이 아름답다. 피곤 혹은 위험을 핑계로 몸을 사리면서 놓쳤던 물들어가는 하늘을 오랜만에 만끽하고선 이 도시를 내가 사랑했던 이유를 다시 한번 찾기도 했다.
금요일 밤. La fête de la musique(음악축제). 안 그래도 음악과 공연을 좋아하는 내가 일 년에 한 번 열린다는 이 축제를 알게 된 이상. 아무리 혼자라고 할 지라도 놓칠 리 없다. 배터리가 방전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날이 완전히 저문 뒤까지 한참을 음악 속에 파묻혀있었다. 제대로 말 듣지 않는 몸뚱이를 들썩들썩 움직이며 흥을 내던 중 꽤 커리어가 있으신 사진작가분께 사진이 찍히기도 했다. 무료로 사진을 보내줄 테니 메일로 연락 달라고 하신 한 마디에 말도 안 되는 십 년 치 상상(혹은 공상)을 머릿속에 펼쳐보기도 했다.
기껏 바닥을 박차고 올라왔지만 또다시 가라앉아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맞닥뜨리지 않은 침잠을 걱정하느라 눈앞에 주어진 시간을 걱정으로 허비하기에는 이 도시가 너무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