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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감력 만렙 선생의 예민한 교사생활

진짜 프롤로그

by 문맹

나는 예민함과는 담을 쌓은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독일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예민함? 그런 거랑은 담을 쌓고 살았다.


일단 내 위장은 무쇠로 만들어져 있다. 유통기한 지난 우유? 한 모금 마셔보고 "음, 괜찮네~" 하며 대관령 목장에서 바로 시식하는 것 마냥 꿀꺽꿀꺽 맛있게 들이켠다. 작년 여름엔 기어이 상한 모차렐라 치즈를 먹고 데굴데굴 구르며 복통으로 몇 날 며칠을 날려먹었는데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여전히 "익으면 다 괜찮아" 정신으로 오래된 냉장고 속 음식들을 착착 클리어한다. 남편이 "이거 냄새 이상한데?" 하면 나는 "아냐, 원래 이런 향이야." 하고 꾸역꾸역 먹다가 가끔 배 아파서 죽을 뻔하지만, 대체로 멀쩡하다. (위장이 강한 건지, 바보인지는 미스터리다.)


몸을 방치하는 능력 또한 최상급이다. 애들 키울 때는 미용실 한 번 안 가고, 남편한테 미용가위를 사줘서 내 머리를 잘라달라고 시켰다. 덕분에 우리 남편은 이제 독일에서 멋쟁이가 아닌 한국인 대상으로는 미용실 차려도 될 수준이다. 미모와는 담쌓은 주제에 50살이 된 지금도 화장은커녕 선크림도 안 바르고 살아서, 얼굴엔 주근깨와 기미가 후추 뿌린 듯 퍼져 있지만 피부의 자생력을 굳게 믿으며 언젠가는 그 깨들이 주름 사이로 숨어 들어가 주길 바라고 있다. 겨울에도 가까운 곳은 후디차림으로 다니며 "적응하면 안 춥다"라고 우기다가 감기에 걸리고, 감기에 걸려도 "잠 좀 자면 나아" 하며 병원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리고 진짜 나아버려서 나도 가끔 놀란다.)


몇 년 전 미니멀리즘이 유행할 때 옷장을 거의 다 정리한 덕분에 티셔츠 몇 개 돌려 입으며 직장 생활 중이고 흰 티에 토마토 쏘쓰 튀어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종횡무진 하루 종일 잘 입고 다니고, 패딩도 몇 년째 안 빨고 입지만 "독일은 공기가 깨끗해서 겨울옷은 원래 잘 안 더러워진다"라는 철학을 고수하고 있다.


야리야리하신 엄마와 겨우 작은 것만 면하신 아빠의 유전자 조합에서 뭔가 오류가 났는지 172cm, 70kg에 육박하는 튼튼한 성인으로 성장했고, 강철 멘탈까지 덤으로 탑재하여 시험을 망쳐도 "재수강하면 되지 뭐~", 지갑을 잃어버려도 "어차피 카드 정지하면 되잖아~" 하면서 태평하게 넘기고, 소개팅에서 어색해도 "그냥 신나게 놀고 오자!" 하고 진짜 바닥을 보이며 놀았다가 상대남이 소개해준 친구한테 "저런 여자 처음 본다"라는 감상을 남긴 적도 몇 번 있다. (그래도 꾸준히 소개팅을 시켜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인간관계가 나쁘지 않았거나 소개해준 친구가 내 상대남과 인연을 끝장내 보려는 심사였겠다.)


인간관계에서도 눈치는 빠르지만 다른 사람들에 대해 신경은 별로 안 썼는데 친구가 답이 없어도 (요즘말로 카톡 읽씹해도) "바쁜가 보지~" 하고 개의치 아니하고, 누가 기분 나쁜 말을 해도 "렛댐! 그냥 스타일이 그런가 보다" 하고 신경 안 쓰는 데다 불편한 사이가 된 사람과도 "술 한잔 할래요?"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먼저 연락하는 타입이었었고 연애하다 치고받고 싸우고 헤어져도 "좋았던 기억만 남기자" 하고 바로 다음날부터 미련 청산 바닥까지 싹 끝내고 정말 잘 먹고 잘 잤다.


갑자기 예민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기안 84의 여전사 버전으로 (참고로 나는 기안 84 팬이다. 그 꾸미지 않은 날것의 멋짐! 거기서 그치면 내 꼴이지만 그는 아티스트 아닌가, 싸랑해요 기안) 한국 살 때에는 사람들이 함부로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지만 (이태원에 걸어 다니면 군인이냐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20대 후반이었는데 포스 작렬이었나 보다. 어흑 부끄러워라 - 군인이라 대접받는 것은 멋진 일이지만 발끝도 못 따라가는 주제에 거들먹거림과 덩치로 군인이라 칭해졌던 것이 부끄럽다. 사고 치다 어느 날 뉴스에 날 수도 있었던 인물이었다.) 미국 유학 중에 우습지 않게 차별도 받아보고, 어설픈 독일어로 20년간 이방인으로 살다 보니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고 눈치를 보는 스킬이 폭발적으로 풀가동되었다. 특히 애를 키우면서 예민함이 특정 방향으로 폭풍 성장했는데, 이름하여 '엠파티(공감력) 폭발'! 보통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는 미세한 표정 변화나 말투의 차이도 귀신같이 알아차리게 됐다. 말을 못 알아듣는 상황에서 한국인의 '눈치'라는 괴력이 빅뱅처럼 폭발하며 발전된 사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능력의 발전 덕분에 강의실에서 학생들의 작은 반응도 놓치지 않는다. 수업 중에 "이해했나?" 하고 보면, 흔들리는 눈동자만 봐도 "아,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구나." 하는 게 보인다. 질문하고 싶지만 망설이는 학생도 한눈에 알아보고 먼저 다가가 질문할 기회를 준다. 그리고 수업 중 지루해서 핸드폰 살짝 보는 학생? 이 생기기가 무섭게 바로 분위기 환기 들어간다.


학생 개개인의 감정도 지나치게 잘 읽힌다. 심각하게 수업 시작했다가 학생 중 하나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수업 분위기 바로 조정 들어가서 개그 버전으로 탈바꿈하고, 시험기간에 저주받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학생들 앞에서는 작두 타는 무당에 가까운 텐션으로 스피릿을 팍팍 끌어올려주는, 독일 대학에서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 활기찬 응원 버전 수업을 펼쳐준다 (실력과 인성 모두 출중하신 도올 선생님도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에 꾀꼬리 소리를 내시는 특이한 높낮이 화법을 쓰시지 않는가. 별거 없는 교사 주제에 감히 모노톤으로 수업하면 반칙 같아 녹 받은 값어치를 하기 위해 작두도 타야 한다).


가끔은 "이게 수업인가? 스탠드업 코미디인가?" 싶을 정도로 학생들이 내 수업에 웃느라 정신없어한다 (독일 대학생들은 진중하고 얌전해서 별로 안 웃겨도 잘 웃는다). 학생들이 문화적으로 낯설어할 만한 한국적 개념은 더 쉽게 이해시키려고, 온갖 적절한 예시를 찾아 고군분투하고 학생들 성향도 금방 파악해서 각자 맞춤형으로 접근 시도하다 보니 항상 피곤하게 산다. 이렇게 수업하면서 살이 안 빠지는 것은 정말 미스테리다. 그만큼 갱년기는 무서운 시기이다. 아무리 발버둥처도 내 몸을 뜨지 않는 팻(fat)들이여...제발 나를 놓아다오.


결국, 나는 예민함과 둔감함을 오가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한때는 “뭐든 다 괜찮아~” 하며 세상 태평하게 살았지만, 이제는 학생들의 반응을 귀신같이 캐치하는 예민한 강사가 되었다. 예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지내면 좋겠지만, 주변의 감정을 너무 세밀하게 읽어버려서 가끔은 피곤하기도 하다. 그래도 덕분에 학생들과 더 깊이 연결되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이들에게 큰 도움까지는 못 되더라도 최소한 함께 버텨주는 동지가 되어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엠파티 초능력"도 나름 괜찮은 능력 아닐까?


내 주변에는 예민해서 불안을 안고 사는 학생들이 많고, 그들은 나를 믿고 고민을 털어놓곤 한다. 이 글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녹여내면서도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각색한 크리에이티브 에세이다. 예민한 사람들에게 "예민해도 괜찮아. 그래도 잘 살아갈 수 있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너무 무겁거나 우울하지 않게, 따뜻하고 유쾌하게 풀어보려 한 엠파티 초능력자의 심리 해킹, 감정 해방을 위한 기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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