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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랑 Aug 03. 2020

산티아고 순례길 - 같은 추억을 공유한다는 것

6월 6일 - 사아군(Sahagún)

힘든 메세타 지역을 벗어났다.


세 시간을 걸어도 마을이 보이지 않던 시절은 지나고 한 시간 정도 걸으면 마을이 보인다. 황금빛 들녘을 거닐며 자연을 노래하다보면 금세 마을이다. 게다가 구름이 깔린 살짝 흐린 하늘 덕분에 모처럼 편한 걸음이다.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을 수 있고 그늘 아래에서 수다를 떨 수 있다. 새털마냥 가볍지는 않지만 들썩이는 마음처럼 가벼운 발걸음은 까미노를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메세타 평원 지대는 지나지만 여전히 황금 들녘이 펼쳐진다.

모두 메세타라는 힘겨운 길을 걸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힘든 길을 걸어봤기에 그 다음에 펼쳐진 아름답고 조금은 편한 길을(평소였다면 이 길 역시 힘들기는 매한가지인 먼 거리에 더운 날이지만) 걸으며 노래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다.     


길 위에 나 혼자 서 있는 기분, 나쁘지만은 않다.     

사아군은 프랑스길 절반 지점에 해당한다. 딱히 표지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둘이서 추억을 남긴다. 힘든 길을 함께 걸어왔다는 것,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이라는 것, 힘든 시간 동안 늘 같이 있었다는 것. 여러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꼬박 15일.


앞으로 남은 날은 걸어온 길보다 길고 더 험난할 것이며 가끔은 포기하고 싶을지도 모르고, 함께하자고 했던 것을 원망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런 시점이 올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내 곁엔 이 사람이 함께할 것이고 함께이기에 즐겁고 행복하고 이겨낼 수 있었다며 추억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까미노를 걷는 내내 내 인생을 닮은 길이라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을 미리 내어다보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추억을 만드는 길에서 또 다른 추억을 노래한다. 흘러간 노래를 부르고 어린 시절 놀이를 떠올린다. 공통적으로 떠올리는 기억도 있고 나는 모르지만 남편은 기억하는 추억이 있다.


각자 살아오며 만들고 기억하는 추억, 함께하며 만들었던 추억. 이런저런 추억을 떠올리며 남다른 신혼여행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기록해나간다. 추억 위에 추억을 남긴다. 그것이 우리의 신혼여행이자 까미노다.


지금까지 걸으면서 꽤 많은 한국인 순례자들을 스쳐 보냈는데 사아군이 나름 큰 마을이라서인지, 알베르게에서 약속이나 한 듯 한국인 순례자들과 재회했다.

사아군의 들판. 까미노에서는 다채로운 색을 만나볼 수 있다.

반가운 마음에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했는데, 각자 장을 봐온 목록을 보니 삼겹살부터 채소, 쌀, 고춧가루, 와인이 골고루 섞여있다. 어설픈 요리 실력이지만 서로서로 손을 거들고 나서며 체육볶음과 삼겹살구이라는 그럴듯한 만찬이 차려졌다. 내일이면 다시 헤어져 만나지 못할 수도 있고, 어쩌면 산티아고에 다다라서야 건너 소식을 듣게 될 수도 있고, 한국에 돌아간다면 영영 연락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이지만 절친이라도 된 것처럼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너는 내일 어디까지 가?”

“우린 기차를 타고 갈 거야.”

“메세타 지날 때 힘들지 않았어요?”


성별, 나이, 취향은 물론이고 살아온 배경도 천차만별인 사람들이 모였지만 까미노를 함께 걷고 있다는 동질감때문일까? 대화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흥이 오른다. 까미노의 밤은 유독 길고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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