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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랑 Aug 01. 2020

산티아고 순례길 - 고난 끝에 낙이 온다

6월 2일~5일 메세타 평원

온따나스(Hontanas), 이떼로 데 라 베가(Itero de ka Vega), 비얄까사르 데 시르가(Villalcazar de Sirga), 깔사디야 델 라 꾸에사(Cakzadilla de la Cueza). 메세타 평원을 지날 때 머물렀던 마을들이다.


부르고스의 달콤한 휴식의 추억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메세타를 지나는 동안 말끔이 잊혀졌다.


메세타 지역을 표현하기에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

‘힘들다.’

이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 말을 잃게 만들고 사고를 정지시킨다. 가벼웠던 걸음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고 가방의 무게는 어깨만이 아니라 허리를 지나 발바닥까지 짓누른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아름답다, 평온하다, 조용하다 등의 수많은 말들이 숨어있기도 하다.

메세타 평원은 어디를 보아도 넓고 아름답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맑은 하늘 아래, 나무 한 그루 없는 쭉 뻗은 길이 이어진다. 좌우를 살펴보고 뒤를 돌아보지만 넓은 평원에서 내가 찾을 수 있는 것은 내 앞에 놓여있는 단 한 갈래의 길 뿐이었다.


이미 우리를 앞질러 가버린 사람들, 다 마셔버려 텅 빈 물통, 내가 의지할 것이라고는 내 옆을 지켜주는 동행인뿐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뜨거운 햇살 아래 그늘 하나 없는 곳을 걷다보니 정신이 이상해지는지 별 거 아닌 말에도 파안대소하게 된다.

“메소포타미아 평원이라고 했지?”

“메소포타미아가 아니라 메세타.”

땀범벅이 되어서는 사소한 말실수를 물고 늘어지며 웃는다. 이게 뭐라고 그리 크게 웃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하고 이해가 안가지만 더위라는 것은 참 모를 일이다.

황금색으로 물든 들녘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다 익은 밀밭은 추수가 끝나 황무지마냥 변해있고 물을 잃은 입술은 바짝바짝 타들어간다. 머리맡에 자리 잡고 서서 순례자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태양을 원망해봤자 변하는 것은 없으니 아주 작은 그늘이라도 만날 손치면 발을 빨리해 그곳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땡볕에 힘들게 걷다 마을을 보고 나서 오는 환희가 인생과 흡사하다. 그늘 한 점 없는 길에서 땡볕에 강행군이 이어진다. 힘든 여정 속에서도 드넓은 풍경은 감동을 넘어 경탄을 하게 한다.


‘장관이네요. 절경이고요. 신이 주신 선물이네요.’


어느 여행 예능에서 개그맨이 했던 말이다. 너무 뻔한 표현에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지만, 메세타 평원을 표현하는 데는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메세타 지역으로 들어오면 앞 뒤 좌 우 모두 드넓은 평원이 펼쳐진다. 몸 쉴 그림자 하나, 구르터기 하나 없이 마주한 메세타는 고난의 구간이다.

오르막길을 오르면 탁 트인 전경이 펼쳐지는데, 사방을 다 둘러봐도 산은커녕 언덕 하나 보이지 않는다. 360도 캠이 그때 있었다면 말 그대로 장관인 모습을 담아올 수 있었을 텐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쉽기만 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무더위의 까미노라는 고난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드넓은 밀밭을 빛나게 하고 그 사이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은 찰나의 시원함으로 땀을 식혀줌과 동시에 아직은 초록의 싱그러움을 간직한 밀밭을 춤추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메세타 지역이 모두 평원만 지나는 것은 아니다.

메세타 지역의 가장 큰 고난은 평원만큼이나 힘든 센다(senda)에 있다. 도로 옆을 지나는 길을 센다라고 부르는데, 아스팔트의 뜨거운 복사열과 지겨운 풍경은 메세타의 드넓은 절경과 대비되어 더욱 고되게 느껴진다.


물이 모자라 힘들었을 때 나는 가방 깊숙이 숨겨두었던 사과를 꺼냈다. 멍이 들어 상품가치가 떨어져 평소의 반값으로 샀던 사과였다. 손수건으로 대충 닦아 한입 베어 무니 달콤함과 새콤함 그리고 목을 축여주는 시원함이 입 안에서 춤을 춘다.


이 얼마나 행복한가.


까미노에서도 특히 메세타는 고난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을, 또는 고난 속에도 꽃은 핀다는 말을 가장 잘 대변한 곳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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