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주 조금의 요행을 행하기로 했다. 아헤스에서 부르고스까지는 꽤 험준한 산들이 포진해있는데, 체력 비축을 핑계삼아 버스를 타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잠깐의 요행을 야단치기라도 하는 것일까. 버스 정류장을 찾지 못해 길을 헤매었다. 노란 화살표와 조개껍데기만 따라가면 되는 까미노를 벗어나 정류장을 찾아가는 길은 초행자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왠 농가를 따라갔다가 다시 돌아 나오고, 바르에 들어가 길을 물어보고, 다시 돌아와서 알려준 길을 찾기를 반복하면서 꼬박 30분을 헤매었다.
까미노에서 30분이란 3㎞를 걸을 수 있는 시간이다. 자신만만하게 버스를 타고 가자고 말해놓고 길을 잃고 헤매느라 체력 비축은커녕 고생만 하고 있으니, 동행인에게 미안해져서 울컥하고야 말았다.
“아직 시간 남았으니까 천천히 찾아보자.”
노란 화살표가 없는 길을 걷는다는 것은 꽤 위험한 일이다. 그렇기에 현지인들은 화살표를 벗어나는 순례자를 발견하면 묻지 않아도 나서서 길을 안내해주고는 한다.
나 자신이 답답하고 짜증나서 울컥 눈물을 쏟아내는 나에게 동행인은 한없이 다정하게 말한다. 겨우 마음을 다스리고 알베르게에서부터 천천히 길을 찾아갔다. 그리고 다행히도 금방 정류장을 찾을 수 있었다. 길을 건너지 않고 빠졌어야 했는데, 섣부른 판단으로 무작정 앞만 보고 갔던 것이 문제였던 모양이었다.
운 좋게도 정류장에 도착하고 얼마 안가 버스가 왔고, 더 이상 실수 없이 부르고스에 들어왔다. 동행인은 걷지 않고 버스를 탄다는 것에 내심 서운한 기색이었지만, 모처럼 즐기는 신혼여행 분위기에 들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부르고스에 들어서기 전에는 이곳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곳인지 알지 못했다. 반나절만 머무르고 지나치기에는 아쉬운 곳이다.
부르고스는 까미노 프랑스길에서 만나는 가장 큰 도시이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잘 어우러져 있는 부르고스는 그 무엇보다 부르고스 대성당(Burgos Cathedral)이 유명한 곳이다. 1년 전 이곳에 왔을 때는 대성당에 매료되어 일정을 변경해 하루 더 머물렀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부르고스 대성당은 하루라는 시간을 꼬박 할애하고서도 채 다 못봤다는 아쉬움이 남는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한국인 순례자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는 부르고스 대성당보다 더 중요한 필수코스가 있으니, 그건 바로 한국 라면을 파는 식당. Restourante Don Nuño는 '까미노의 친구들 연합(줄여서 까친연)'과 가맹점을 맺은 식당이라는데, 라면과 밥을 8유로에 판매한다.
삼시세끼 빠지지 않는 빵, 맛있기는 하지만 퍽퍽한 느낌을 감출 수 없는 스페인식 요리들 사이에서 뜨끈하고 매콤한 '국물' 맛이 그리워질 수밖에 없는 토종 한국인이기에 ‘라면을 파는 식당이 있다.’는 말은 마치 달콤한 노랫말처럼 들렸다.
동행인은 라면을 주문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까미노에서는 순례자메뉴보다 라면이 더 반가울 때가 있는 법이다.
아침 10시, 평소 일정이라면 한참 까미노를 걷고 있을 시간에 부르고스에 도착한 우리는 곧장 식당으로 가 모처럼 든든한 아침 식사를 했다. 동행인은 굳이 이곳에 와서까지 라면을 찾는 내가 이해가 안 간다고 말했지만, 오랜만에 먹는 매운 라면은 맛이 아니라 반가움이었다.
늦은 아침을 해결하고 나와 부르고스 대성당을 둘러보는데, 100년에 걸쳐 지어진 대성당은 한 눈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로 큰 위용을 자랑했다. 여전히 변함 없이 아름답고 멋진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사진 한 장에 다 담을 수 없어 아쉬워하는 찰나, 부르고스 시내를 도는 꼬마기차를 발견했다.
1인당 4유로(한화 6천원)는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지만 이왕에 신혼여행 분위기를 즐겨보기로 한 마당에 못 할 것이 무엇이랴.
전망대에 오르면 저절로 탄성을 내지르게 된다. 순례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나서서 사진을 직어주고 추억을 남기기 바쁘다.
그런데 꼬마기차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았다. 걸어서는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쳤을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재미가 있었다. 꼬마기차는 전망대에서 한 번 멈추는데, 부르고스 대성당을 중심으로 부르고스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모두들 대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바빴다. 우리 역시 한껏 들떠서 점프샷부터 커플 사진까지 온갖 포즈를 다 취해가며 사진을 찍었더랬다.
꼬마기차를 타지 않았다면 감히 와볼 생각도 못했을 곳, 그랬다면 보지 못했을 전경.
찰나의 선택이 불러오는 무한한 가능성은 실로 놀랍다. 1년 전처럼 부르고스까지 걸어왔다면 어땠을까? 험준한 산을 넘느라 고생은 했겠지만 뿌듯해하고 길에서 만난 인연들과의 추억에 감사했을 것이다. 반면 걷지 않고 버스를 탄 덕에 대도시인 부르고스를 천천히 관광해볼 수 있었고 서점이며 악기상점, 광장의 노점들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게다가 관광 상품인 꼬마기차(나름 거금을 들여서)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보는 행운이라니.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하였던가? 까미노에서는 이렇게 말해야 할 듯하다. 모든 선택에는 그에 합당한 선물이 주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