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에 다시 오기로 한 이후 가장 기뻤던 일은 만시야(Mansilla de las Mulas)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많은 마을을 지나쳤는데 유독 만시야가 눈에 밟히는 것은 그곳에 다다르기까지의 여정과 풍경이 나를 매료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버스를 타고 만시야에 가서 하룻밤 머물고 걸어서 레온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얄궂게도 모든 일이 마음처럼 흘러가지는 않는다.
하필 일요일. 만시야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싶다는 계획은 일요일엔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는 것으로 물거품이 됐다. 만시야의 다리를 보고 싶었는데, 그곳에서 먹었던 맛있는 또르띠야(Tortilla)를 다시 한 번 먹어보고 싶은데, 계획이 틀어진 것이다.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간다면 만시야에 갈 수는 있겠지만, 문제는 사아군에서 만시야까지는 40㎞에 육박하는 거리라는 것. 우리의 속도라면 이틀에 나눠 걸어야하는 구간이었다. 결국 만시야는 포기하고 바로 레온으로 가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사아군의 기차역
아침 7시 48분. 레온행 기차표 두 장을 받아들고 마치 무궁화호 열차를 닮은 렌페(Renfe)에 몸을 실었다.
꽤나 빠른 열차 속도에 주변을 둘러볼 기회는 적지만 편하게 앉아 황금들녘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만시야의 저녁 노을과 그 아름다운 다리는 다음을 기약해야했지만 기차를 타고 스페인을 즐길 기회를 얻었음에 살짝쿵 미소를 지어본다.
걸어서 갔다면 3일 후에나 갈 수 있었을 레온(León). 기차여행으로 일찍 도착한 덕에 하루가 참 길게 느껴졌다. 우연히 만들어진 레온으로의 기차여행 덕에 일요일 축제를 시작부터 즐길 수 있었다. 스페인이 카톨릭 국가임을 제대로 알려주는 대대적인 종교 행렬이 있었던 것이다. 각자 작은 성당에서 출발해 대성당에 모였다가 도시를 돌아다니고 다시금 대성당에 모여 미사를 올리는, 일종의 축제였다.
레온의 종교 행사. 일종의 축제였는데 카톨릭 성인들의 관을 레온 대성당으로 모셔가고, 대성당에 모두 모여 미사를 드린다.
우연.
레온은 우연이 거듭되는 곳이었는데 숙소를 잡기도 전 아침을 먹는 동안 첫 출발의 행렬을 보았다. 이후 숙소를 잡고 짐을 내려놓고 나오자 골목골목을 순회하는 행렬과 마주했다. 그들과 멀어져 대성당으로 갔더니 이번에는 마지막 행렬을 맞이했다.
축제 덕분에 문을 활짝 열어놓은 대성당(축제가 아닐 때는 유료로 줄서서 기다렸다가 들어갈 수 있다.)을 보고 웅장한 오르골 연주를 들었다. 레온대성당은 장미창과 수많은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만들어내는 화려한 아름다움이 매력적인 곳이다. 그렇기에 문이 열리고 불이 켜진 것이 조금은 아쉬울 수 있었지만, 웅장한 오르골 연주와 장대한 종교행렬이 함께하니 어둠 속 고요했던 그 때와는 또 다른 매력을 안겨줬다.
가우디가 디자인한 보티네스 저택. 여러 사연이 섞여 완공은 가우디의 디자인에서 일부 벗어났지만 특유의 가우디 감성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었다.
축제 구경이 끝난 후 가우디가 디자인했다는 건물을 보려고 이동하는데, 또 다시 이어진 우연이 우리를 반겼다. 바로 꼬마기차 시티투어였다.
부르고스 시내를 하루 안에 두루 살펴볼 수 있었던 꼬마기차의 추억이 떠올랐다. 한 사람 당 4.5유로인 꼬마기차는 순례자들에게 있어 결코 저렴한 가격은 아니었지만, 대도시인 레온을 구석구석 돌아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망설이지 않았다.
레온 대성당. 커다란 장미창을 비롯한 다양한 스테인글라스 장식이 빛의 향연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레온 시내를 돈다. 구시가지의 오래된 집들과 성벽 그리고 성당들. 스페인어를 할 줄 몰라 가이드의 설명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발품을 팔아서는 도저히 다 돌아보지 못했을 곳들을 두루 살펴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하지만 레온은 부르고스와 달리 주변에 산이 전혀 없어 전망대가 따로 없었다. 위에서 내려다볼 수 없다는 것이 어찌나 아쉬웠던지. 지형적 아쉬움이랄까.
그래도 일요일이라 열린 장으로 가서 편한 원피스를 12유로에 구입했는데 그간 하나쯤 사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기에 너무 좋은 기회였다.
1년 전에는 부활절 주간에 레온에 도착한 바람에 슈퍼며 식당이며 대부분 문을 닫아서 제대로 즐기지 못했던 터였다. 그 아쉬움을 달래주려는 까미노의 선물일까.
우연으로 시작된 레온행. 그 우연이 또 다른 우연을 낳고 그 우연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색다른 추억들이 남는 레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