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 사이엔 ‘무색무미무취무형의 벽’이 있나요
심채경 박사의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를 읽고 있다. 매일 책 읽을 시간을 내는 건 어렵지만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읽는다. 애들을 모두 재우고 집안일도 마치고 아무도 없는 거실 소파에 홀로 드러누워 책을 읽는 시간이 소중하다.
별이니 과학이니 하는 단어가 들어간 제목의 책을 읽고 있으면 ‘네가 뭐 그런 걸 읽냐’는 시선이 으레 따르는데, 은근히 천체나 우주, 물리학, 생물학, 유전자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다. 어렸을 적엔 집에 <과학동아>가 몇 권 있었는데, 그중에서 특히 우주에 대해 권두특집으로 다뤘던 호를 좋아했다. 표지에 커다랗게 어느 행성의 그림이 있는 호였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하늘에 빛나는 별이 사실은 색깔도 무늬도 그 거리도 (빛의 속도로 가도 수만 년이 걸린다는!) 제각각이라는 사실이 재밌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이나 과학에 조금만 더 흥미가 있었더라면 천문학과에 갔을 것이다.
아무튼 그러한 이유로 천문학자가 쓴 에세이라는 점이 끌려 구매하게 됐는데, ‘여성’ 천문학자의 입장에서 쓴 몇몇 글이 의외로 심금을 울려 펑펑 울고 말았다. 과학자 워킹맘으로서 쓴 글이었는데, 같은 대학에서 일하며 가끔 오가다 마주치면 안부 인사를 하곤 하는 사이인 동료가 있었다. 그도 저자와 같은 워킹맘으로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가져 일종의 묘한 동지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이가 아파 두 돌도 되기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는 이야기였다. 그 소식을 듣고 저자는 아주 슬퍼했는데, 아이가 없는 친구들은 그 슬픔을 전해듣고 심각한 표정은 지었지만 별로 친하지 않은 타인의 아이의 이야기에 왜 그리도 가슴 아파하는지 백 퍼센트 이해하지는 못하였다고 했다. 반면 엄마 아빠들은 그 슬픔에 깊이 공감했다고. 저자는 아이를 키워본 적 없는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무색무미무취무형의 벽’을 느꼈다고 했는데, 정말로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그런 벽을 많이 느끼고 있다.
특히 나는 결혼하고 십 년 동안을 아이가 없이 지내서, 주위 친구들도 아이가 없거나 결혼조차 하지 않은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보니 내가 얼마나 아이가 있는 친구들에게 편협하게 굴었는가를 반성하게 된다. 한때 SNS피드에 올라오는 아이 사진을 음식 사진으로 바꿔주는 앱이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아마 크롬의 확장형 프로그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타인의 고양이나 강아지 사진에는 관대하면서 아이 사진에는 관대하지 않은 세태가 슬프기까지 하다.
어쩌면 오로지 ‘나’와만 관련있는 사진들로 채워지던 SNS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사진, 자식 사진이 잔뜩 올라가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쿨병말기의 사람들도 아이 사진을 수용하지 못하는 세상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그런 쿨병말기의 나는 아이 사진 테러로 내 지인들의 피드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아 새로운 SNS 계정을 만들어 낯선 타인들에게서 위로를 얻는다. 비슷한 월령의 아이를 키우는 많은 ‘맘’들을 많아 ‘육아소통’을 하며, 각자의 아기 사진에 좋아요를 눌러주고 귀엽다며 댓글을 달아주고 아픔에는 같이 슬퍼하고 기쁨에는 같이 웃어주면서. 얼굴도 이름도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같은 기쁨과 슬픔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하다.
물론 아이가 없는 친구들이 주는 행복과 위로 역시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일이지만, 아이로 인해 연결된 인연은 신기하기만 하다. 그들은 칭얼대던 아이가 방긋 웃을 때의 그 행복감을 공유하고 있다.
세상에 온전히 나만을 필요로 하는 존재, 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가슴 벅찬 일이다. 그래서 그 존재는 사랑스럽다. 아이가 때로는 힘들게 하고 귀찮게 해도 늘 그 사실을 생각한다. 아이의 우주에는 부모가 전부이므로. 아이의 우주가 다른 것들로 채워질 때는 얼마든지 자리를 양보해줄 생각을 하며, 그 때까지는 그 우주에 충실히 보답해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