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하나의 약, 하나의 치료법이 전혀 다른 질병들에 효과적이라고 하면 일단 사이비로 보는 경향이 있죠. 특히 의사들이 그런 경향이 큰데요, 오랫동안 A약->A질병, B약->B질병, C약->C질병.. 의 관점으로 교육받았기 때문입니다. 의사들은 혈압은 혈압약으로, 당뇨는 당뇨약으로, 고지혈증은 고지혈증 약으로 조절해야만 진정한 근거중심의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루빨리 이런 관점에서 벗어나야만 만성 질병의 늪으로부터 환자도, 사회도, 그리고 의학도 구해낼 수 있을 겁니다.
“Exercise is medicine”이란 책이 있습니다. 미국스포츠의학회에서 발간한 <의사들을 위한 운동처방 매뉴얼>로, 운동 그 자체가 약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죠. 실제로 혈압, 당뇨, 고지혈증은 물론이고 암, 심장병, 뇌졸중, 치매, 우울증.. 등 거의 모든 질병에서 운동을 하지 않는 환자와 운동을 하는 환자와의 예후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Meditation is medicine”이라는 책도 있죠. 명상 역시 약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명상을 통한 자율신경계 관리는 다양한 질병 치료에 직접적인 도움이 됩니다. 운동과 명상 둘 다 수많은 연구에서 치료 효과를 보고하고 있는 명백한 과학의 영역입니다만, 대부분 질병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그 가치가 평가절하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태극권은 그냥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운동과 명상이 결합된 형태의 독특한 움직임입니다. 운동이 약이고 명상이 약이라면, 운동과 명상을 결합한 태극권은 과연 어떻게 부르는 것이 적절할까요? “Tai-Chi is medicine of medicine”이라 부른다면 너무 과장된 걸까요? 태극권을 시작하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느리고 느린 움직임에 집중하지 않으면 여지없이 다음 동작을 놓치게 되는, 참으로 이상한 운동이 태극권입니다.
몇 년 전부터 의대생들에게 <보완대체의학>을 1시간 강의하고 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한 학기 강의로 개발하고 싶지만, 아쉬운 대로 학생들의 시야를 넓혀보고자 나름 애쓰고 있습니다. 그 강의에는 태극권에 대한 무작위배정 임상시험 논문들이 몇 편 소개되는데 그중 NEJM에 발표된 2편의 논문이 있습니다. 태극권 효과를 보고한 무작위배정 임상시험 논문들은 매우 많지만, NEJM이라는 저널에 대한 의사들의 신뢰가 워낙 커서 일단 이 논문부터 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학생들은 통상적인 운동의 관점에서 본다면 고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태극권이란 운동의 효과가 NEJM에 보고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워하죠.
첫 번째 논문은 대표적인 만성통증질환인 섬유근육통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태극권을 일주일에 2번, 약 3개월 정도 시행하고 나니 증상이 뚜렷하게 호전됨을 보고합니다. 두 번째 논문은 알츠하이머 다음으로 흔한 퇴행성 뇌질환인 파킨슨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태극권 효과를 평가한 것으로 이 논문에서는 흥미롭게도 태극권, 근력운동, 스트레칭 3가지 운동의 효과를 비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태극권군의 낙상발생률이 다른 운동군보다 2~3배 낮았음을 보고했고요. 이런 연구들에서 적용한 태극권은 현란하고 복잡한 고난이도 동작이 아니라 환자들도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기본 동작들을 반복하는 정도의 저난이도 태극권이었죠.
이 논문들이 발표된 뒤 단지 플라세보 효과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다른 연구자들의 코멘트들이 NEJM에 실리기도 했는데요, 직접 태극권을 경험해보지 않은 연구자들일 거라고 확신합니다. 섬유근육통과 파킨슨병은 NEJM에 발표된 논문의 대상자들일뿐입니다. 그 외에도 관절염, 우울증, 심장질환, 호흡기질환, 고혈압, 치매, 골다공증 등등 다양한 환자군들을 대상으로 태극권의 효과를 보고한 수많은 무작위배정 임상시험이 존재하고, 아직 연구조차 해보지 못한 환자군들은 훨씬 더 많습니다. 현재 의학계에서 태극권을 두고 선택가능한 수많은 운동 중 하나 정도로 간주하면서 노인이 되면 고려할 만한 운동으로 분류하는 것은 태극권이 가진 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극권을 두고 "medicine of medicine"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히 과장입니다. 그런데 운동과 명상 외에도 “Food is medicine”, “Sleep is medicine”이라는 오래된 격언들도 존재하는데요, 최소한 <운동, 명상(마음), 음식, 수면>의 생활습관 4종세트는 "medicine of medicine"으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합니다. 이 4종세트가 현대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환경오염물질들이 일으키는 수많은 질병들에 대한 현실적인 대응책이라는 사실만 정확히 인지한다면, 아마 의사들도 이 불편한 표현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약이란 단어는 단순히 건강에 좋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누군가 환자가 되었을 때 이런 생활습관에 집중하여 실천하면 그것으로 치료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는 의미죠. 여기서 핵심 질문은 통상적인 의료적 개입 없이 생활습관 변화만으로도 치료효과를 보일 수 있는가? 에 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초기일수록 생활습관 변화만으로도 가능하고, 진행된 질병일수록 적절한 의료적 개입과 생활습관 변화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로 생활습관 변화만으로도 회복될 수 있는 사람들이 약에 의존하는 것도 문제이듯, 적절한 의료적 개입이 시급한 사람들이 단지 생활습관에만 매달려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의사는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데 최적화된 전문가입니다만, 고착화된 약물 처방 중심의 접근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가진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생각이 많이 듭니다. 이런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국가가 제도적으로 그런 진료행위가 가능한 의료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의사들도 지금까지 교육받은 틀에서 벗어나 <왜 질병이 발생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부터 스스로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