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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멘트 Sep 11. 2023

지겹게 반복되는 삶의 무의미함에
대한 나의 대답

세상의 끝에 서서


아침에 눈을 뜨면 정신없이 출근을 한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거의 모두 직장에 반납한 뒤 몸도 마음도 지칠 때쯤이 되어서야 다시 집에 돌아온다. 야근을 하지 않아도 일단 집에 오면 피곤과 귀찮음이 모든 것에 우선되어 생산적인 자기 계발 같은 일은커녕 곧 또다시 반복될 얼마 남지 않은 내일을 위해 제대로 쉬는 일조차 쉽지만은 않다. 그리고 이 일상은 7일 중 무려 5일이나 매우 비슷하게 반복된다. 


이렇게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상에 몸은 이미 익숙해져 큰 고통은 없지만 문제는 가끔 번쩍 하고 제정신이 드는 날이 있다는 사실이다. 분명 어제도 같은 시간에 이렇게 지하철을 타고 문제없이 출근을 했는데, 어떤 날에는 이렇게 무한 반복되는 일상과 삶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세상에 던져진 모든 생명들의 삶이 아무리 고단하다 해도 그것에 진정한 의미가 있다면 그 고단함은 견뎌낼 수 있겠지만 그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나는 꽤나 자주 끝없는 허무함에 빠졌다. 


사람보다는 동물들과 자연의 존재가 더 큰 Puerto Natales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3시간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세상의 끝과 마주한 칠레의 최남단 해안 도시, 푼타 아레나스(Punta Arenas)가 나온다. 그리고 거기에서 차로 3시간 정도를 올라가면 푸에르토 나탈레스(Puerto Natales)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이곳이 푸에르토 나탈레스라는 이름을 갖기 전, 과거 행정구역명은 '마지막 희망(Última Esperanza)'이었다. 그냥 희망도 아니고 마지막 희망이라니, 의미심장하다.

마젤란 해협에 둘러싸여 있는 두 도시

에스트레초 데 마가야네스(Estrecho de Magallanes). 우리에게는 마젤란 해협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곳은 지리적으로 정확히 말하면, 남쪽 내륙땅인 파타고니아와 섬처럼 떨어져 있는 티에라 델 푸에고 (Tierra del Fuego) 사이에 위치한 바닷길인데 1914년 파나마 운하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매우 중요한 항로였다. 포르투갈에서 태어난 페르난도 데 마가야네스(Fernando de Magallanes)가 약 270명의 선원들과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서 1519년부터 약 3년간 세계를 일주하고 돌아오는데 이것이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일주였다. (270명이 떠나서 생존해 돌아온 것은 18명이었고, 페르난도도 중간에 사망해 일주를 끝마친 건 후안 엘까노다.) 

16세기 초 인류의 최초 세계일주 여정 

그렇게 이 해협이 발견된 건 1520년이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발견'만 한 것일 뿐, 수많은 섬들과 항해하기 어려운 기후를 극복하며 이 해협을 처음으로 왕복으로 항해함으로써 길을 낸 것은 1557년 후안 라드리예로(Juan Ladrillero)다. 그와 선원들은 지금의 페루에서 내려와서 칠레 남쪽에 도착한 뒤 마젤란 해협을 찾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다가 현재의 푸에르토 나탈레스 지역을 지나며 마젤란 해협을 찾기 위한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항해를 시작하며 그 간절한 마음을 이곳 지역 이름으로 붙였다.  

이 지역에는 약 3만 개의 섬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섬들을 모두 넘어서 더 내려가면, 남극이 나온다.

21세기의 나는 기모바지와 오리털이 들어간 파카를 껴입고 편하게 비행기와 차를 타고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도 보이지 않는 바다 앞에 서니 막막함부터 밀려왔다. 극지방의 대자연은 야생성이 너무 강해 쉽게 인간에게 길을 내어주지 않을 듯했는데, 하물며 16세기에 배를 타고 여기까지 와서 수많은 섬들과 남극에서 올라오는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바다 위에서 길을 찾아야 했던 그 여정이 얼마나 고단하고 두려운 일이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춥고 배고프고 불편한 모험을 매일 반복하면서 그들도 이 온갖 고생에 대한 의미에 대해 생각했을까? 아니면 죽음이 언제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았을 대자연 속의 위험한 항해를 이어가며 내가 하는 이 일이 본인 스스로와 인류역사에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의지를 불태우며 그 시간을 보냈을까? 그들의 삶과 일에 의미를 부여했던 것은 항해의 성공이라는 오직 하나의 결과뿐이었을까? 항해의 총책임자와 나머지 선원들에게 항해의 의미는 달랐을까?


그래서 '마지막 희망'이라는 이 지역의 과거이름이 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16세기 이곳을 항해했던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있었다는 것은 곧 그들에게 역경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려움을 극복해서 무언가를 해내겠다는 의지가 있었다는 의미와도 같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현대에 살고 있는 나는 무엇이 그들을 희망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게 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유일하게 분명한 것은 과거의 사람들은 이제 여기에 없고, 그들의 불타던 의지도, 희망도 없지만 이 세상을 살다 간 모든 이들의 삶이 모여 역사가 되었고 현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마젤란 해협 앞 동상

신들을 기만한 죄로 평생 엄청난 크기의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고 떨어진 바위를 또 밀어 올리기를 반복하며 본인의 에너지를 다 써버리는 시시포스의 일화처럼, 수백 년 전 그들에게도 영원하게 느껴지는 노동의 반복과 쉽게 방향을 틀기 어려웠던 삶의 무거운 굴레는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아무리 의미를 찾으려고 해 봐도 결국 우리는 죽는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거의 모든 것들은 아찔하게 그 의미가 퇴색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세상은 이런 비합리와 부조리로 가득 차있지 않은가.


시지프는 돌이 순식간에 저 아래 세계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 아래로부터 정상을 향해 이제 다시 돌을 밀어 올려야 하는 것이다. 그는 또다시 들판으로 내려간다. 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저 산꼭대기에서 되돌아 내려올 때, 그 잠시의 휴지의 순간이다. 그토록 돌덩이에 바싹 닿은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은 이미 돌 그 자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 오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해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中 - 

16세기 선원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땅에 서서 카뮈의 <시지프 신화>가 생각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바위를 산정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반복하는 시지프(시시포스)는 무의미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았던 걸까. 


무의미함을 알면서도 본인의 운명을 의식하고 기꺼이 그 무의미한 벌을 받겠다는 본인의 의지와 그것을 선택함에 있어서의 자유, 그리고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본인 나름의 반항. 카뮈는 그런 시지프를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한 존재이자, 바위보다 강한 존재라고 했다.     


16세기 이 배에 탔었던 일반 선원들처럼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무의미한 삶이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일이더라도 자신의 일을 묵묵히 이어가는 이들과,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쓰는 사람들과, 아무도 사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이들처럼, 자신의 바위를 끊임없이 정상에 올려다 놓으며 삶의 무의미함을 있는 그대로 의식하고 받아들이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을 살아내려 노력하는 이들에게는 그 무의미함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터였다. 


그리고 16세기 이 남미의 끝단을 항해했던 이들이 이름 붙인 이 '마지막 희망'의 땅에는 가늠할 수 없는 긴 시간을 꾸준히 생명과 죽음으로 채워온 자연이 이렇게 선물처럼 남아있었다. 

물은 흐르되, 흘러가 버리기만 하지는 않았다.

    

점점 더 빠르게 작아지고 있는 Grey 빙하의 조각들



이 지구를 아주 잠시 스쳐갈 인간들의 행렬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지만 결국은 소멸할 것을 알면서도 생명을 끝까지 지켜내는 자연처럼 나도 무의미하게 반복되기만 하는 것 같아 보이는 나의 일상으로 용감하게 돌아가리라. 또다시 모든 것이 허무해지고 무의미하기만 한 것 같게 느껴질 때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리라. 그렇지만 허무감에서 허우적거리기보다는 있는 힘껏 나의 바위를 정상에 올리고, 또 올려놓으리라. 수백 년 전 탐험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거대한 자연이 그래왔던 것처럼, 삶의 무의미함 속에서 끊임없이 나만의 '마지막 희망'을 만들어 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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